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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때와 죽을 때/원희복/공명 - 국경 초월한 韓·中항일 혁명가 부부의 불꽃 삶

Bawoo 2015. 8. 16. 00:30
[이 주의 책 1]사랑할 때와 죽을 때 기사의 사진
사랑할 때와 죽을 때/원희복/공명 

<소감- 항일혁명가인 부부와 관련된 삶을 지나치게 깊이 들어간 내용들이라 읽을 필요성을 안 느껴

내용 요약이나 다름없는 에필로그를 읽는 것으로 대신.>

[책과 길-사랑할 때와 죽을 때]  국경 초월한 韓·中항일 혁명가 부부의 불꽃 삶 기사의 사진


얼마나 많은 항일투사들이 아직도 역사의 지층 아래 묻혀있는 것일까? 언제쯤 누가 사진 한 장, 이름 한 자 남기지 못 한 채 죽은 그들의 생애를 수습해 우리 역사의 페이지에 기록할 것인가?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읽어나가는 동안 내내 가슴을 짓눌렀던 생각들이다. 이 책은 1939년 서른도 못 살고 중국 땅에서 총살형을 당한 항일투사 김찬을 그의 중국인 아내 도개손과 함께 사후 76년 만에 불러낸다. 10년 전 중국 취재에서 김찬 이야기를 처음 접한 현직 신문기자 원희복씨가 오랜 시간을 들여 그의 생애를 복원해 냈다. 

김찬은 1930년대 혁명적 노동운동을 통해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려던 청년이다. 1911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나 가족과 중국으로 이주했고, 18세에 상해의 조선공산당에 가입할 정도로 열정적인 혁명가였다.

20대 내내 조선의 진남포와 경성, 중국의 상해와 북경, 하얼빈을 넘나들면서 주로 국내 노동조합 재건 운동을 펼쳤던 그는 1932년 체포된다. 1933년 6월 2일자 동아일보는 ‘조선 당 재건을 획책, 공산주의의 3거두 홍남표, 조봉암, 김찬 래역(來歷)과 그 활동경로’라는 제목의 기사를 세 사람의 사진과 같이 전면으로 보도했다.

1930년대 조선에서 노동운동가로서 김찬의 역할은 컸다. 그러나 이후 그의 이름을 우리 독립운동사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출옥 후 활동 무대를 중국으로 옮긴데다 그가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투사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저자가 2005년 중국에서 김찬의 아들 김연상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김찬이라는 항일투사의 존재는 물론이고 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일대기도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일흔이 넘은 나이였던 김연상은 부모의 중국 활동 기록을 수집해 놓고 있었다. 조선 활동 기록은 저자가 채워 넣은 것이다.

김찬은 중국에서 도개손과 결혼을 하고 자식 둘을 낳았다. 그러나 중국공산당 중앙의 소재지였던 연안으로 찾아갔다가 당시의 정풍운동 바람에 일제의 간첩으로 몰려 허무하게 생을 마치고 만다.

책은 김찬의 개인 평전이 아니라 김찬·도개손을 나란히 다룬 부부 평전이다. 또 다른 주인공은 도개손이다. 중국 명문가 자녀로 북경대 최초의 여성 이과대학생이었던 도개손은 항일투쟁에서 김찬과 대등한 활동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 남편을 버리기만 하면 살 수 있다는 가족의 제안을 거부하고 남편과 함께 죽음을 맞았다.

“나는 그 사람을 포기할 수 없어요. 나와 그 사람에 대한 죄상이 진실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요. 그렇지만 나와 그 사람에 대한 진실이 조작된 이상, 나만 조작된 거짓에서 빠져나올 순 없어요. 이것은 그이와의 사랑 이전에 진실을 위한 싸움 문제예요.” 

사후 43년 만인 지난 1982년 중국공산당은 부부에게 내려진 과거 판결이 잘못됐다며 복권 결정을 내렸다. 도개손이 죽음으로 지킨 진실이 뒤늦게나마 명예 회복으로 이어진 것이다.

우리 독립운동사에 부부가 항일투쟁에 헌신한 사례가 없진 않지만, 한중 커플은 이례적이고 특히 마지막 순간까지 같이한 경우는 김찬·도개손 부부가 유일하다. 역사학자 이덕일도 추천사에 “김찬·도개손의 삶이 다른 사회주의 혁명가 부부와 달랐던 점은 죽음까지도 함께 했다는 점”이라고 썼다.

김찬과 도개손은 각각 28세, 27세로 너무나 짧은 삶을 살다 갔다. 자신들이 신봉하던 당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억울한 죽임을 당했고 누구도 그들의 죽음을 기억해주지 않았다. 중국 연안의 계곡에서 죽은 둘의 시신은 물론 무덤도 확인할 수 없다. 
[책과 길-사랑할 때와 죽을 때]  국경 초월한 韓·中항일 혁명가 부부의 불꽃 삶 기사의 사진
대부분의 항일투사들이 그렇듯 김찬·도개손 부부도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다. 1935년 중국 상해에서 출산한 아들 연상씨를 안고 찍은 이 사진이 부부가 같이 나온 유일한 사진이다. 사진은 연상씨가 보관해온 것이다. 공명 제공


아들 김연상씨도 최근 생을 마감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저자는 “(생전에) 김연상은 한국 정부에서 아버지

 

김찬에 대한 서훈을 해줄 것을 원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찬의 서훈은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김찬의 서훈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북한에 사촌이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후문을 들었다”고 밝혔다.

그들의 생애는 이렇게 끝이 났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조차 이대로 끝나선 안 된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항일투사들을 찾아내 기념하는 일을 중단해선 안 될 이유가 여기 있다. 어찌 김찬·도개손 뿐이겠는가?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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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사진

최근 ‘사랑할 때와 죽을 때’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한중 항일혁명가 부부 김찬 도개손 평전’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이 김찬은 1925년 4월 을지로의 중국음식점 아서원에서 창립된 제1차 조선공산당의 선전부장 김찬과는 동명이인이다. 김찬의 부인 도개손은 북경대 최초의 여성 이과대학생이자 명가 후손의 중국인인데, 중국청년들 대신 식민지 청년을 반려자로 삼은 것이 눈길을 끈다. 필자가 김찬의 일생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한때 큰 인기를 끌었던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장지락)의 일생과 닮은꼴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여성작가 님 웨일즈는 중국 공산당의 근거지였던 연안(延安)에서 김산을 만나 ‘아리랑’을 썼다. 김산은 역정에 가득 찼던 자신의 일생을 설명한 후 더욱 열심히 혁명운동에 매진하고 싶다는 견해를 밝혔다. 필자는 님 웨일즈와 헤어진 이후의 김산의 삶이 궁금했다. 김산이 제 발로 찾아간 연안에서 일제의 간첩 혐의로 사형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꽤 놀랐다. 그런데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주인공 김찬도 마찬가지 운명이었다. 김찬이 더 비극적인 것은 부부가 함께 사형 당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사형시킨 인물은 중국공산당 중앙사회부의 강생(康生)이었다. 중공 중앙사회부는 중공 중앙정보부로서 ‘중공중앙 적구(敵區)공작위원회’라고도 불렸다. 강생(康生)은 모택동(毛澤東)의 이른바 연안정풍(延安整風) 운동에 편승해서 고문에 의한 자백을 근거로 수많은 사람들을 첩자나 반당분자로 몰아 처형했다. 그래서 연안에 ‘홍색(紅色) 공포’라 불렸던 숙청이 만발했다. 중국국민당에는 대립(戴笠)이 이끌었던 군통(軍統)이라는 정보기관에서 공산주의자 색출과 숙청을 주도했다.

 

그나마 대립의 군통이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주로 제거했다면 강생의 중앙사회부는 국민당의 첩자나 반당분자라는 명목으로 김산이나 김찬처럼 평생을 혁명운동에 바쳤던 인물들을 대거 제거했다. 김산과 김찬ㆍ도개손 부부의 최후가 더 비극적인 것은 제 발로 연안을 찾아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국민당의 대립은 1946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지만 중국공산당의 도살자 강생은 1975년 사망 당시 중공 중앙정치국위원이자 부주석으로 승승장구했다. 사망 당시 모택동(毛澤東), 주은래(周恩來), 왕홍문(王洪文)의 뒤를 이은 중국 서열 4위였다.

 

김산과 김찬이 왜 제 발로 연안을 찾아가 강생 같은 도살자의 손에 목숨을 맡겨야 했을까? 박헌영이 1929년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시절 남녀 동기생 열여덟 명과 찍은 사진이 있다.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과 평생동지였던 김단야가 있고, 올 봄에 출간된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의 주인공 현앨리스도 있다. 이 사진에서 박헌영과 함께 눈길을 끄는 인물은 제일 뒷줄의 베트남 혁명가 호치민(胡志明ㆍ1890~1969)이다. 호치민과 박헌영은 국제레닌학교 동기생이었던 것이다. 이 사진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과 달리 호치민은 승리했고, 베트남의 국부로 추앙 받고 있다. 필자는 호치민이 성공한 이유를 베트남인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사고했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호치민은 1930년 영국의 식민지 홍콩에서 월남공산당을 조직했다가 1940년 일제가 인도차이나 북부를 점령하자 연합전선인 월남독립동맹회를 결성해서 그 주석으로 베트남 남부를 차지한 프랑스와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독립전쟁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 사진의 한국인 사회주의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 임원근, 박헌영과 함께 초기 한국사회주의 운동의 삼총사로 불렸던 김단야는 1934년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민족부 책임자가 되었으나 1937년 소련 내무인민위원부 경찰에 체포되었다. 일제의 간첩 혐의였는데 1938년 제 발로 찾아간 소련에서 사형 당했다.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 총비서가 되었던 박헌영은 6·25 와중인 1952년 미국의 간첩 혐의로 조선노동당에서 숙청당하고, 1956년 7월 미제의 간첩이란 혐의로 처형되었다. 현앨리스 역시 같은 해 평양에서 처형당했다.

 

호치민은 우리가 월맹(越盟), 또는 북월(北越)이라고 불렀던 월남민주공화국 주석으로 있던 1969년 9월 2일 세상을 떠나 그제 46주년 추모식이 치러졌다. 김일성이 정적에 대한 가혹한 숙청과 극도의 공포통치로 신격화된 반면 호치민은 사망 당시 옷 몇 벌과 지팡이, 타이어로 만든 슬리퍼 밖에 없었다고 할 정도로 무소유의 삶을 살았고, 지금도 베트남 국민들은 그를 ‘호 아저씨’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여긴다. 호치민이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즐겨 읽었다는 이야기의 진위는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호치민의 부친 응우옌 신삭(阮生色)이 한의사였던 것처럼 호치민도 한문을 읽을 수는 있었다. 호치민과 함께 사진을 찍었던 한국인 사회주의자들은 왜 한결같이 비극적 운명에 처해야 했을까? 한국 사회의 보수화 경향을 우려하는 진보 계열 인사들이 깊게 고민해야 할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