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폴 케네디(70) 예일대 교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한 것은 군 중간관리자·과학자·엔지니어 등의 노력 때문이라고 말한다. [중앙포토]
폴 케네디 지음, 김규태·
박리라 옮김, 21세기북스
548쪽, 2만8000원
제2차 세계대전이 올해로 종전 70주년을 맞는다. 이 엄청난 전지구적 규모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람은 누구일까. 좁게 보면 프랭클린 루스벨트·이오시프 스탈린·윈스턴 처칠 같은 각국의 정치 지도자가 떠오른다. 강력한 리더십으로 국민을 독려하며 승리를 견인했다. 넓게 보면 전쟁에 참전하고 이를 돕기 위해 후방에서 애쓴 모든 사람의 피와 땀이 합쳐져 이뤄진 승리다.
하지만, 영국 출신의 미국 예일대 역사학 교수인 지은이는 승리의 숨은 공신을 전쟁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온갖 지혜를 짜낸 장군·학자·엔지니어들에서 찾는다. 우선 1943년 1월로 돌아가 보자. 당시 남북으로 노르웨이에서 그리스까지, 동서로는 모스크바에서 프랑스 서쪽 끝까지 유럽의 거의 전역에 나치 깃발이 휘날렸다. 일본군은 서태평양 곳곳에 일장기를 꽂고 있었다. 연합군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다. 절망적인 이 시기에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가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참모들과 서방연합군의 전쟁 목표와 전략을 검토했다. 최종목표는 적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는 것으로 정했다. 이를 위한 전략 목표로 대서양 해로를 장악하고, 중부유럽의 제공권을 확보하며, 적이 장악한 해변에 상륙해 교두보를 만들며, 태평양의 섬들을 차례로 점령해 일본 본토를 공격할 방안을 마련하는 것 등 네 가지가 제시됐다. 하나같이 어려운 목표다. 아무도 방법을 말해주지 않았다. 벤치마킹할 과거나 다른 지역의 사례도 없었다. 놀라운 점은 1년쯤 지난 뒤 이 목표들이 대부분 달성되거나 현실화됐다는 사실이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연합군이 이 목표를 어떻게 달성했는지 과정을 추적한다. 『강대국의 흥망』이란 저서에서 보여준 혜안대로 인간이 주어진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떠한 지혜를 발휘하는지를 정밀하게 추적한다.
첫째 목표인 대서양 해로 장악은 ‘독일 잠수함과의 피어린 전투’를 통해 이뤄졌다. 지은이는 1939~45년 영국과 미국의 조선소에서 총 4250만t의 선박을 제조하는 가공할 생산력으로 독일 잠수함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고 보는 전통적인 견해를 반박한다. 생산력 우위보다 보유한 해군 전력의 적절한 활용에서 승리의 근원을 찾는다. 연합군 전력이 압도적이었긴 해도,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야 보배’라는 말처럼 조직력과 전력의 질적 향상 없이 승리를 이끌 수 없었다는 지적이다.
직접적인 근거의 하나가 미국과 영국 해군이 기존 장비의 한계를 탓하지 않고 이를 끝없이 개량했다는 사실이다. 대서양을 건너는 수송선단을 호위하기 위해 24시간 가동한 폭격기의 짧은 항속거리를 지속적으로 늘렸다. 미국과 영국의 각 대학교와 연구소 등에서는 소형레이더를 개발해 성능을 꾸준히 향상시켰다. 우선 잇몸으로 버티며 이가 날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호송선단의 해군은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저돌적으로 잠수함 사냥에 나섰다. 참가자 모두가 나라 탓하지 않고 스스로 이순신이 돼 작전에 기여했다.
주목할 점은 2차 대전의 향방을 결정지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다. 2차 대전은 기갑전·전격전·전략폭격 등 다양한 전쟁개념을 발전시켰지만 가장 복잡한 것이 상륙작전이다. 적진에 대규모 병력이 상륙하려면 수송과 호위를 맡은 해군력, 이를 공중에서 보살피는 공군력, 그리고 적진에 상륙해 혈전을 치르며 교두보를 마련하는 지상전력이 유기적으로 결합해야 했다. 사실상 최초의 육해군 합동작전이다.
하지만 전례가 없다고 불가능을 말한 사람은 드물었다. 처음인만큼 창의력이 필요했을 뿐이다. 노르망디에서는 영국군의 버트램 램지 장군이 다국적군의 육해공 전력을 결합한 연합·합동 작전을 설계하고 시행했다. 태평양에서도 수많은 상륙작전이 이뤄졌다. 육해공 합동작전은 미군의 채스터 니미츠 제독이 맡았다. 서로 다른 주체를 설득해 조화롭게 움직여 전술적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에 견줄 수 있다. 이후 현대전은 육해공 합동전의 성격을 띠게 됐다. 육군과 해군, 공군이 따로 움직이는 군대는 전근대적이란 비판을 듣는다.
지은이는 전쟁 승리 비결을 연구하면서 ‘격려의 문화’와 ‘혁신의 문화’가 큰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군대가 승리를 거두기 위해 보유한 전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문화를 가리킨다. 아무리 많은 병력에 비싼 무기를 잔뜩 보유해도 승리해야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서로 힘을 합치지 않으면 깡통이나 다름없다는 지적이다. 이겨서 생존하려면 끊임없이 군 작전을 혁신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지은이는 특히 상중하 간의 소통이 효과적으로 이뤄지고 진취력과 혁신성·창의력을 자극하는 군대만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강조한다. 2차 대전에서 연합군은 아무리 다루기 힘든 지시가 떨어져도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결 주체를 격려했기 때문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S BOX] 루스벨트 vs 히틀러
이 책에선 리더십에 대한 폴 케네디의 생각도 엿볼 수 있다. 그는 군 지휘권에 대한 지도자의 집착에 주목한다. 히틀러와 스탈린 모두 장군들 위에서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불합리한 작전이 과감성으로 포장돼 무모하게 시도됐다. 어떤 부하도 독재자 앞에서 대놓고 의견을 말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병력과 자원이 무의미하게 소모됐다.
다른 점도 있었다. 스탈린은 충성심과 능력이 확인된 장군에겐 자율권을 늘렸다. 반면 히틀러는 장군들에게 작전 운용의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았다. 그 결과가 쿠르스크 전투 등 수많은 작전 실패와 제3제국의 멸망이었다. 프랑스 점령작전을 주도한 전차전 이론가 하인츠 구데리안,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 이탈리아에서 연합군의 발을 묶었던 알베르트 케슬링은 히틀러의 관심권에서 먼 지역에 있었기에 제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루스벨트는 미군의 힘을 믿었기에 군의 작전이나 인사에 별로 간섭하지 않았다. 그 결과 최고의 인재가 동원돼 최상의 지혜를 모아 최강의 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다혈질인 처칠은 작전에 개입했고, 인재를 찾는다며 장군들을 자주 교체했다. 하지만 그는 상상력과 추진력, 웅변술로 군을 격려했다. 지은이는 ‘대담하고 훌륭한 리더십 없이는 거대기업도 쓰러질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