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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3세 (Richard III)- 원작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Bawoo 2015. 10. 15. 19:29

 

리차드 3세 (Richard III)

 

장르 드라마, 전쟁 | 영국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감독 로렌스 올리비에
출연 로렌스 올리비에, 존 길구드, 폴 허스톤


 

영상설명
1930년대 영국, 왕의 암살로 끝난 시민 전쟁으로 요오크카의 맏이 에드워드가 왕위에 오르나 그의 왕권에 불만을 품은 막내 동생 리차드 글로쎄스터(Richard III: 로렌스 올리비에 분)은 마음에 두고 있던 앤(Lady Anne Neville: 클레어 브룸 분)을 얻기 위해 그녀의 남편을 처참히 죽이고 아내로 맞게 된다. 리차드는 자신의 집권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갈 계획을 세운다. 맨처음 희생자는 자신의 정치적 야심에 걸림돌로 여기는 큰 형 클러랜스(George, Duke of Clarence: 존 제일거드 분)를 탑에 가두어 끝내 심복 타이렛(James Tyrell: 패트릭 드로튼 분)을 시켜 살해한다. 이어 엘리자베스(Elizabeth Woodville, Queen Elizabeth: 매리 커리지 분) 오빠 리버스(Antony Woodville, Earl Rivers: 클리브 모톤 분)는 정부와 정사 중 리차드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된다. 또한 리차드는 어린 승계자 웨일즈 왕자(Edward, Prince Of Wales: 폴 휴스턴 분)와 웨일즈의 동생 제임스도 탑에 가두어 살해한 후 호민관의 지위에 오른다. 그런 다음 카리스마적인 리차드를 추앙하는 무리들에 의해 '리차드 3세'로 추대됨으로써 그의 숙원인 제왕의 자리에 서게 된다. 그러나 새로운 왕, 리차드 3세에 반대하는 세력은 점점 더 거세게 밀려온다. 한편 색마 리차드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설득해 그녀의 딸과 결혼하려 하나 자신과 숙명의 대결자 헨리 리치몬드에게 빼앗기고 만다. 결국 '이기기 전엔 죽어도 물러서지 않는다'던 리차드는 민의의 대변자, 헨리 리치몬드가 이끄는 군대에 도전을 받아 불길 속에서 추락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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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리처드 3세 (희곡)

 
많은 주요 장명을 보여주고 있는, 연극의 어떤 미국의 프로덕션을 광고하는 1884년경의 포스터

 

리처드 3세》셰익스피어희곡으로, 에드워드 4세의 짧은 통치 이후 왕위에 오른 그의 동생 리처드 3세 통치 하에서 귀족들의 반란으로 영국이 다시 내란에 휩싸이고, 마침내 랑카스터 가의 외척이자 튜더 왕조의 시조가 된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에 의해 평정되기까지의 기간을 다루고 있다.

바깥 고리

<실제 인물에 대하여>

King Richard III.jpg

리처드 3세(Richard Ⅲ, 1452년 10월 2일 ~ 1485년 8월 22일)은 영국 요크 왕가 최후의 왕(재위 : 1483년 ~ 1485년)이다. 에드워드 4세의 막내 동생으로, 에드워드 4세가 죽자 당시 12세였던 그의 아들 에드워드 5세을 대신해 섭정으로 영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하지만 에드워드 5세의 대관식을 치르기도 전에, 에드워드 5세의 어머니였던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에드워드 4세의 결혼이 무효라 주장하여 대관을 취소시키고, 약 2달 후인 6월 경에 자신이 왕위에 오른다. 두 조카(에드워드 5세와 그 동생)는 8월 이후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리처드 3세가 런던탑에 가두어 살해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1485년 보스워즈에서 있었던 헨리 튜더와의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전투에서 죽은 마지막 영국왕이자,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죽은 해럴드 2세를 이어 영국 내 전투에서 죽은 두 왕 중 한 명이다. 튜더 시대를 거치며 흔히 권세욕이 강하고 책략이 뛰어난 것으로 묘사되게 되었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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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3년 6월 권력을 찬탈해 나라를 다스렸으나 2년 뒤에 전사했다.

그가 어떤 인물인가에 관해서는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역사가와 문필가들은 그를 잔인무도한 악한으로 묘사한 반면 현대의 학자들은 그를 크나큰 잠재적 능력을 지닌 군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가 사악한 인물이라는 평판은 16세기의 정치적 악선전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요크 공작 리처드(1460 죽음)의 막내아들로 1461년 큰형인 요크의 에드워드가 랭커스터 왕가의 허약한 군주 헨리 6세를 폐위시키고 에드워드 4세가 되어 왕권을 장악한 이후 글로스터 공작이 되었다.

그러나 1470년 10월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헨리 6세를 다시 권좌에 올려놓자 에드워드와 함께 쫓겨나 망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1471년 3월 에드워드와 같이 잉글랜드로 돌아온 리처드는 선봉부대를 이끌고 바넛과 튜크스베리에서 랭커스터 군대에게 승리를 거두어 에드워드를 복위시켰다. 1471년 5월 21일 밤 런던 탑에서 일어난 헨리 6세 살해사건에도 개입한 듯하며 에드워드 왕은 그에게 충성에 대한 보답으로 높은 직위와 막대한 토지를 주었다.

1483년 4월 9일 에드워드 4세가 죽자 리처드는 에드워드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12세 된 국왕 에드워드 5세의 후견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어린 왕을 조종하던 왕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이끄는 파벌과 갈등을 일으켰다. 리처드는 우드빌파의 세력을 깨기 위해 파벌의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결국에는 처형했으며, 에드워드 5세와 그의 9세 된 동생을 연금시켰다. 런던의 설교사들은 에드워드 4세의 결혼이 무효이기 때문에 그 자녀들은 적법한 상속자가 아니며, 따라서 리처드가 에드워드의 정당한 후계자라고 공표하도록 설득당했다.

6월 25일 의회에서 이러한 주장이 승인을 받아 리처드는 공식으로 국왕 자리에 올랐다.

1483년 8월 어린 두 왕자가 실종되자 항간에는 숙부인 리처드가 사람을 시켜 그들을 살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이 사실일 가능성도 크지만 또다른 유력한 용의자로 한때 리처드의 가까운 동료였던 버킹엄 공작 헨리 스태퍼드가 있었다.

은밀하게 왕에게 등을 돌린 버킹엄이 그에게 불리한 평판을 만들기 위해 왕자들을 살해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1483년 10월 남부 잉글랜드에서 버킹엄이 일으킨 반란은 처음에는 리처드의 체제를 심각하게 위협했으나 이내 무너져 공작은 처형당했다. 이후 리처드는 과거의 불명예를 씻어내고 자신의 약한 지지기반을 넓히기 위해 국왕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 전념해 통상을 장려하고 재정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시대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귀족과 젠트리의 지지가 절실하게 필요했지만 정작 그들은 리처드를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정하기가 곤란하다고 느꼈다.

한편 리처드의 적들은 그의 경쟁자인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의 편에 모여들고 있었다.

헨리는 프랑스에 망명해서 살고 있던 랭커스터 가계의 왕위계승권자였다. 1485년 8월 7일 헨리는 군대를 이끌고 사우스웨일스에 상륙해 동쪽으로 진군하다가 8월 22일 보즈워스 평야에서 리처드와 전투를 벌였다. 리처드의 병력은 헨리보다 우세했으나 전투가 결정적인 고비에 이르자 국왕 편의 유력한 귀족 몇몇이 이탈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리처드는 도망가기를 거부하고 압도적인 적의 병력을 맞아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었다.

그뒤 헨리 튜더는 헨리 7세(1485~1509 재위)로 왕위에 올라 에드워드 4세의 딸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함으로써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의 왕위계승권을 통합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세 Richard Ⅲ〉에서처럼 튜더 시대의 여러 문헌에서 줄곧 리처드가 악인으로 비난받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는 리처드가 꼽추였다고 나와 있지만 초상화나 당대의 기록에서는 그같은 사실이 확인되지 않으며 다만 그의 한 쪽 어깨가 다른 쪽보다 솟아 있었음을 시사해주는 기록은 있다.

리처드에 대한 전기로는 P.M. 켄들이 쓴 〈리처드 3세 Richard the Third〉(1955)가 있다.<다음백과>

 

<원작자-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Cobbe portrait of Shakespeare.jpg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년 4월 26일[1]~1616년 4월 23일)는 영국극작가, 시인이다. 그의 작품은 영어로 된 작품 중 최고라는 찬사를 받으며, 셰익스피어 자신도 최고의 극작가로 손꼽힌다. 그는 자주 영국의 "국민 시인"과 "에이번의 시인"으로 불렸다.

 

그에 관한 자료는 불충분하여 추측과 약간의 기록으로밖에 알 수 없다.

 

유년기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에 있는 존 셰익스피어의 집,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영국이 낳은 세계 최고 극작가로 불리고 있는 셰익스피어는 잉글랜드 중부의 영국의 전형적인 소읍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에서 출생하였다. 셰익스피어는 아름다운 숲과 계곡으로 둘러싸인 인구 2000명 정도의 작은 마을 스트랫퍼드에서 존 부부의 첫 번째아들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고,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다.[4]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는 비교적 부유한 상인으로 피혁가공업과 중농(中農)을 겸하였으며, 읍장까지 지낸 유지로 당시의 사회적 신분으로서는 중산계급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셰익스피어는 풍족한 소년시절을 보낸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1577년경부터 가운이 기울어져 학업을 중단했고 집안 일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학업을 중단하고 런던으로 나온 시기는 확실치가 않고 다만 1580년대 후반일 것으로 여겨진다.[

 

셰익스피어는 주로 성서고전을 통해 읽기와 쓰기를 배웠고, 라틴어 격언도 암송하곤 했다.[4] 셰익스피어는 11세에 입학한 문법학교에서 문법, 논리학, 수사학, 문학 등을 배웠는데, 특히 성서와 더불어 오비디우스의 《변신》은 셰익스피어에게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4] 셰익스피어는 그리스어를 배우기도 하였지만 그리 뛰어나지 않는 편이었다. 그리하여 셰익스피어와 동시대 극작가인 벤 존슨은 “라틴어에도 그만이고 그리스어는 더욱 말할 것이 없다."라고 하면서 셰익스피어를 비꼬아내기도 하였다.[4] 이 당시에 대학에서 교육받은 학식 있는 작가들을 ‘대학재사’라고 불렀는데, 셰익스피어는 이들과는 달리 대학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였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타고난 언어 구사 능력과 무대 예술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 다양한 경험, 인간에 대한 심오한 이해력은 그를 위대한 작가로 만드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4] 그는 다른이들과 다르게 뛰어난 교육을 받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연 그 자체로부터 깊은 생각과 뛰어난 지식을 끌어모은 자로서 그 세대의 최고의 희곡가라고 불리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18세의 나이에 26세의 앤 해서웨이와 결혼했다. 우스터의 성공회관구(자치적이고 독립적인 지역 성공회 교회를 일컫는 말)의 교회 법정에서는 1582년 11월 27일에 혼인 허가를 내주었다. 해서웨이의 두 이웃은 결혼을 막을 아무런 장애 요인이 없음을 보증하는 보증서를 다음 날 보냈다.[6] 셰익스피어의 생애에서 세례일과 결혼일을 제외하고 확실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4]

 

셰익스피어와 앤 사이에서 1583년 5월 23일에 수잔나(Susanna)라는 딸이 탄생한다.[4] 앤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정황으로 보아 그리 늙은 신부가 아니었지만 셰익스피어가 연상의 아내를 그리 사랑한 것 같지는 않다.[4] 연상의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든 개인적인 성공의 야심에서였든, 아니면 고향에 머무를 수 없을 만한 사고를 저질렀든, 셰익스피어는 1585년에 햄닛(Hamnet)과 주디스(Judith)라는 쌍둥이가 태어난 후 곧장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닌다.[4] 1585년 이후 7∼8년간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녔는데, 이 기간 동안 셰익스피어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4] 다만 1590년경에야 런던에 도착해 이때부터 배우, 극작가, 극장 주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4]

런던과 극작 활동

런던에 이주한 셰익스피어는 눈부시게 변하고 있던 수도 런던의 모습에 매료되었다.[4] 엘리자베스 여왕(1558∼1603)이 통치하던 이 시기의 런던은 많은 농촌 인구가 유입되어 대단히 북적거리고 활기 넘치는 도시였다.[4] 런던은 인구의 급격한 팽창으로 도시는 지저분해지고 많은 문제점이 야기된 도시였지만, 북적거리는 사람들과 다양한 경제 활동, 다양한 문화 활동과 행사, 특히 빈번한 연극 공연은 많은 사람들에게 여흥을 제공하면서 셰익스피어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4]

 

셰익스피어가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극작가 로버트 그린의 기록을 보면 셰익스피어가 적어도 1592년에는 런던에서 알려진 극작가 중 하나였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로버트 그린은 셰익스피어가 대학도 마치지 못한 학력으로 인해 품격이 떨어지는 연극을 양산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7] 1594년부터 셰익스피어는 당시 런던 연극계를 양분하는 극단의 하나였던 궁내부장관 극단[8]의 전속 극작가가 되었다.[5]

 

1599년 궁내부장관 극단은 템스 강 남쪽에 글로브 극장을 신축하고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한 후 제임스 1세가 즉위하자 극단은 국왕 극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9] 셰익스피어는 이 극단에서 조연급 배우로서도 활동했으나 극작에 더 주력하였다. 그리고 이 기간을 전후해서 시인으로서의 재능도 과시하여 《비너스와 아도니스》(1593)와 《루크리스》(1594) 등 두 편의 장시(長詩)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극작가로서의 셰익스피어의 활동기는 1590년1613년까지의 대략 24년간으로 볼 수 있는데, 이 기간에 희·비극을 포함한 모두 38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1590년대 초반에 셰익스피어가 집필한 《타이터스 안드로니커스》, 《헨리 6세》, 《리처드 3세》 등이 런던의 무대에서 상연되었는데, 특히 《헨리 6세》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4] 셰익스피어에 대한 악의에 찬 비난도 없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학 교육도 받지 못한 작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의 인기는 더해 갔다.[4] 1623년 벤 존슨은 그리스와 로마의 극작가와 견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셰익스피어뿐이라고 호평하며, 그는 “어느 한 시대의 사람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사람”이라고 칭찬했다.[4] 1668년 존 드라이든(John Dryden)은 셰익스피어를 “가장 크고 포괄적인 영혼”이라고 극찬한다.[4] 셰익스피어는 1590년에서 1613년에 이르기까지 10편의 비극(로마극 포함), 17편의 희극, 10편의 역사극, 몇 편의 장시와 시집 《소네트》를 집필하였고, 대부분의 작품이 살아생전 인기를 누렸다.

 

생전의 엘리자베스가 셰익스피어에 대한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국가를 모두 넘겨주는 경우에도 셰익스피어 한명만은 못 넘긴다." 이었다.

말년과 죽음

셰익스피어에 대한 첫 번째 전기를 출간한 작가 로우(Rowe)는 셰익스피어가 죽기 몇 년전에 고향인 스트랫퍼드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전했다.[10] 그러나 당시에 모든 작품 활동을 그만두고 은퇴하는 일은 보기 드문 경우이었고,[11] 말년에도 셰익스피어는 런던을 계속 방문하였다.[10] 1612년 그는 마운트조이의 딸 메리의 혼인 신고와 관련하여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할 것을 요구받았다.[12] 1613년 3월 그는 과거에 런던 블랙프라이어스 소 수도원 이었던 문루(gatehouse)를 사들였고,[13] 1614년 11월에는 내과 의사이자 그의 사위인 존 홀과 함께 몇 주간 런던에 머물러있었다.[14]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에 있는 셰익스피어의 장례 기념물

 

1606년에서 1607년을 지나면서 셰익스피어는 몇 편 안되는 희곡을 썼으나 1613년 이후에는 그의 창작으로 볼 수 있는 작품이 하나도 없다.[15] 그가 마지막으로 쓴 세 편의 희곡은 아마도 극작가인 존 플레쳐와 함께 창작한 것으로 보이며,[16] 존 플래쳐는 셰익스피어의 뒤를 이어 왕의 부하들을 위한 실내극을 창작한 인물이었다.[17]

 

셰익스피어는 1616년 4월 16일에 세상을 떠났다.[18] 유족으로는 그의 아내와 두 딸이 있었다. 수잔나는 내과의사인 존 홀과 1607년에 결혼하였으며,[19] 쥬디스는 셰익스피어가 죽기 두 달 전에 포도주 제조 업자인 토마스 퀸네이와 결혼하였다.[20]

 

자신의 뜻에 따라 셰익스피어는 갖고 있던 많은 부동산을 큰딸인 수잔나에게 물려주었다.[21] 유언장에 따르면 그녀는 그 재산을 온전히 보전하여 "그녀의 몸에서 낳은 첫 아들"에게 상속해야 했다.[22] 둘째 사위인 퀸네이는 세 자녀가 있었으나, 모두 결혼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23] 수잔나의 남편이자 첫째 사위인 홀에게는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을 지닌 자녀가 한 명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두 차례 결혼하였지만 1670년에 자녀를 남기지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셰익스피어의 직계는 대가 끊기게 되었다.[24] 셰익스피어는 유언에서 당시 법에 따라 아마도 자신의 재산 중 3분의 1을 물려받을 상속권이 있었을 아내 앤에 대해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한 마디를 남겼는데, 그것은 자신이 그녀에게 "나의 두 번째 좋은 침대"를 물려준다는 것이었다. 셰익스피어가 언급한 침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난무하였다.[25] 일부 학자는 언급된 그 침대가 실제 물건이 아니라 앤에게 모욕을 주려고 한 말이라고 보는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진짜 그러한 침대가 있었고 따라서 그것은 의미있는 유산이었으리라고 믿는다.

셰익스피어의 무덤

셰익스피어는 죽은 뒤에 고향의 성 트리니티 교회(Holy Trinity Church)에 묻히게 된다.[4]

그의 흉상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4] “판단은 네스터와 같고, 천재는 소크라테스와 같고, 예술은 버질과 같은 사람. 대지는 그를 덮고, 사람들은 통곡하고, 올림푸스는 그를 소유한다.”[4]

작품 세계

그가 쓴 작품의 수는 각본이 36편이고, 154편의 14행시(소네트)가 있다.

그의 희곡 전집은 1623년 극단 동료의 손으로 편찬되어 세상에 나왔다. 그에 대한 평가는 생전에 이미 최대의 찬사를 받았고, 죽은 후에도 계속 숭앙의 대상이 되어 거의 신격화되었다. 비평가 칼라일이 "영국 식민지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위대한 인류의 유산이었다. 그는 '온화한 셰익스피어'라고 불리었지만, 인간 심리의 통찰에는 비할 수 없는 넓은 안목을 가졌고, 완성 과정에 있던 근대 영어의 잠재능력을 극도로 발휘하여 시극미(時劇美)의 최고를 창조하였다.

희곡

셰익스피어는 르네상스 영국 연극의 대표적 극작가로서 사극, 희극, 비극, 희비극연극의 모든 장르를 섭렵하는 창작의 범위와 당대 사회의 각계각층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관객층에의 호소력으로 크리스토퍼 말로, 벤 존슨, 존 웹스터 등 동시대의 탁월한 극작가 모두를 뛰어넘는 성취를 이루었다.[27]

"요정과 함께 춤을 추는 오베론, 티타니아, 퍽",
윌리엄 블레이크 그림, c. 1786. Tate Britain.

인물

특히 유럽 본토에 비해 다소 늦게 시작된 영국 문예부흥종교개혁의 교차적 흐름 속에서 그가 그려낸 비극적 인물들은 인간 해방이라는 르네상스 인문주의 사상의 가장 심오한 극적 구현으로 간주된다.[27] 1580년대 말로의 주인공들이 중세적 가치에 거침없이 도전하는 상승적 에너지의 영웅적 면모를 구현하고 있고, 1610년대 웹스터의 주인공들이 인문주의적 가치의 이면에 놓인 어두운 본능의 세계에 함몰되는 추락의 인간상을 대변한다면, 1590∼1600년대에 등장한 셰익스피어의 주인공들은 중세적 속박과 르네상스적 해방이 가장 치열하게 맞부딪히는 과도기의 산물로서 그러한 상승과 추락의 변증법을 극명하게 체현하고 있다.[27]

 

셰익스피어 극은 인간관계에서 생겨나는 문제를 가장 밑바닥에 깔고 있다. 셰익스피어에게 인간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이 없었다면 그의 극이 이처럼 재미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28] 더욱이 셰익스피어의 인물들은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는 존재들이다.[27] 무엇보다 셰익스피어가 초시대성을 획득하는 극소수의 작가 반열에 드는 것은 특정한 시대정신의 명징한 관념적 표상이 아니라 무한한 모순의 복합체로서의 인간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27] 조화롭게 통합된 존재가 아니라 분열적으로 모순된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치열한 인식이 르네상스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구 문화와 문예를 혁신하는 원동력이었다면, 그러한 인식의 비등점을 이룬 낭만주의, 모더니즘, 실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활발히 탐구되고 공연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박제된 고전이 아니라 살아 있는 고전임을 여실히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27]

표현

"햄릿, 호라티오, 마르셀루스, 햄릿 아버지의 유령",
헨리 퓨슬리, 1780–5.

 

셰익스피어의 탁월함을 증명해 주는 또 다른 점은 그의 문학적, 연극적 상상력과 감칠맛 나는 표현력을 들 수 있다.[29] 셰익스피어는 자신이 속한 극장의 구조를 십분 활용하면서 구조상의 제약을 뛰어넘는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관객과 독자를 매혹한다.[29] 같은 이야기 소재라도 셰익스피어의 손에 들어가면 모든 이의 정서에 공감을 줄 수 있는 보편성을 갖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시공을 초월하여 거의 모든 삶의 영역을 탐구해 볼 수 있는 요소들이 들어 있다.[29] 심지어 현대의 경영학자들이나 정치가들에게도 셰익스피어는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 준다.[29] 또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햄릿의 유명한 대사처럼 셰익스피어는 감히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숱한 명대사를 남겼다.[29] 작품 속 표현 한 마디 한 마디가 관객들로 하여금 무릎을 치게 만들고, 교묘하고 신비로운 표현은 그 속에 인생의 진지한 성찰을 담고 있다.[29] 오늘날 영어의 풍부한 표현력은 셰익스피어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29]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인생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그의 작품이 가져다 주는 문학적 향취에 취해 감탄하게 된다.[29]

 

셰익스피어의 대사에는 운문산문이 혼재되어 있다.[28] 물론 절대적으로 많은 부분이 운문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는 극적 필요에 따라 산문으로 대사를 쓰기도 했다.[28]

창작 시기에 따른 작품 구분

셰익스피어의 37편의 희곡 작품들은 상연 연대에 따라 대개 4기로 분류된다. [30]

제1기 : 습작기

1기는 습작기(1590∼1594)로 이 기간 동안 주로 사극과 희극을 집필했다.[4]

이 시기는 옛 작가의 모방과 자신의 것을 찾기 위한 모색의 과정이었다. 우선 <헨리 6세>의 3부작, <리처드 3세>의 사극과 병행하여 세네카풍 복수비극 <타이투스 안드로니쿠스>에서 출발하여 이 시기의 기조는 플라우투스풍의 <실수연발이>, 이탈리아 코믹풍의 <사랑의 헛수고>등 젊은 정열을 발산시키는 경쾌하고 밝은 희극의 세계에 있다. 전체적으로 고전극의 영향이나 말로, 릴리 등 선배의 영향을 받아 엇비슷한 것이 많으며 습작기의 영역에서 완전히 탈피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마침 페스트의 대유행으로 인한 극장 폐쇄기(1592-94)와 겹쳐 <비너스와 아도니스>(1593), <루크리스의 능욕>(1594) 등 일련의 서사시를 발표, 극작가로서 대성하기 전에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확립시킨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제1기말에서 제2기에 걸쳐서는 그린, 말로, 키드, 피일 등 선배의 죽음이 계속되고 릴리도 사실상 극작의 붓을 놓기 시작한 시기였으므로 라이벌이 없어진 셰익스피어는 행운의 극작가로서 자기 길을 걷게 된 셈이며, 초기 낭만비극의 걸작 <로미오와 줄리엣>은 바로 이 무렵에 탄생, 서정과 낭만성이 신인만이 갖는 청신함과 함께 곁들여져 있는 작품으로 천재 극작가로서의 편린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제2기 : 성장기

2기는 성장기(1595∼1600)로 전기(前期)의 희극세계가 더욱 확대되었다. 1595년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낭만 희극을 상연하여 호평을 받으면서 습작기를 벗어나게 된다.[4] 이 기간 동안 《한여름 밤의 꿈》, 《뜻대로 하세요》, 《12야》 등과 《베니스의 상인》 등 로 목가적 분위기나 희비극적 요소가 가민된 낭만희극의 걸작이 속출하는 한편, 《헨리 4세》 1부와 2부 같은 역사극과 《줄리어스 시저》라는 로마극이 상연되었으며, 본격적인 비극으로는 첫 작품인 《로미오와 줄리엣》이 상연되었다.[4] 이를 통해 비극과 희극과 사극이라는 모든 장르에 탁월한 극작가로서 명성을 쌓게 된다.[4] <햄릿>의 싹이 엿보이는 <리처드 2세>나 폴스타프의 개성창조, 극작술의 진보와 함께 셰익스피어의 재능이 훌륭하게 개화하여 인기 독점의 시대에 이른다. 인간적 관찰의 눈이 뚜렷해지고 기법이 숙련되어 당시의 극단에서 뛰어난 존재가 되었다. 이 시기의 그의 희극은 낭만적 희극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화려한 낭만이 온화한 해학에 감싸여 아름다운 언어로써 독특한 세계를 형성한다.

제3기 : 원숙기

제3기는 원숙기(1601∼1607)다. 희극의 계통으로서는 <윈저의 쾌활한 아낙네들>(폴스타프에 마음이 흡족해진 여왕의 요청으로 <사랑하는 폴스타프>를 테마로 한 것)을 제외하고는 전기(前期)까지의 발랄한 명랑함이 자취를 감추고 '다크 코미디(어두운 희극)'라고 불리는 문제 희극 3편, 즉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비극'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끝이 좋으면 다 좋지> <이척보척(以尺報尺)>밖에 없으며 '로마극'이라고도 하는 <줄리어스 시저>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 <코리오러너스> 등 위대한 비극들이 집중적으로 창작되던 시대이다. 여기서 보여주는 심각함과 비극으로서의 장대함은 일찍이 보지 못한 것이다. 이 시기에 씌어진 희극도 끝은 행복한 결과로 맺어졌으나, 매우 음울하여 앞 시기의 작품들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제2기에서 제3기에의 이 커다란 변화는 양친의 죽음을 포함한 신변의 불행뿐만 아니라 여왕의 만년과 죽음을 둘러싼 사회정세의 불온, 정치·종교상의 혼란으로 인한 음모사건(예컨대 1601년에 있었던 에세크 백작의 반란과 처형) 등에도 원인이 있겠으나, 이러한 비극은 '개인'의 성격비극인 동시에 '국가'의 운명과도 관련이 있는 우주적 규모를 지닌 장대함으로까지 이르고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채프먼, 마스턴 등 신진작가들의 대두와 벤 존슨의 눈부신 활약이 있기는 했으나, 그래도 그들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셰익스피어의 창작력은 뛰어난 것이었다.

 

이 기간 중 4대 비극작품인 《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가 상연되었다.[4] 셰익스피어를 세계 문학사에서 불후의 명성을 지닌 작가로 만들어 준 것은 바로 제3기에 집필된 극작품들일 것이다.[4] 이들 작품에서 셰익스피어는 깊은 인생 통찰을 보여주고 있음과 동시에 걸출한 등장인물들을 창조하고 있다.

 

 햄릿》에서는 우유부단한 주인공 햄릿을 통해 복수에 관련된 윤리성, 삶과 죽음의 문제, 정의와 불의의 문제를 조명하고 있다.[4]오셀로》에서는 무어인 장군 오셀로와 베니스의 귀족 여성 데스데모나, 그들 사이에서 이간질을 일삼는 이아고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과 신뢰와 질투의 문제를,

 

≪리어왕≫에서는 리어왕과 그의 세 딸인 코델리어, 거네릴, 리건의 이야기를 통해 효와 불효, 말과 진실, 외양과 실재의 문제를,

 

≪맥베스≫에서는 야심에 찬 맥베스와 그의 아내가 자행하는 찬탈의 이야기를 통해 선과 악의 문제를 심도 있게 조명하고 있다.[4]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한 비극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가 상연된 것도 이 시기이다.[4]

제4기

제4기(1608∼1613)에 들어 셰익스피어는 비희극이란 새로운 장르를 시험하는데, 당시 희비극의 장르에서 인기가 절정이었던 보먼트플레처에게 자극을 받아 쓴 것이 <심벨린> <겨울밤 이야기> <태풍> 등 일련의 로맨스극이으로 이 시기 동안 대중들의 감상적인 기호에 부합하는 네 개의 비희극이 상연되었다.[4] 집안의 이산(離散), 오랜 세월의 방랑을 거친 재회, 화해, 속죄를 테마로 하는 희비극의 세계는 파란으로 가득찬 20년 창작생활의 종막답게 폭풍 뒤의 고요와도 흡사한 안정된 기분으로 통일되고, 인생의 희비·명암의 전부를 보아온 작자의 달관된 심경마저 엿볼 수 있다. 원래 비극이어야 할 이야기가 그의 체념과 화해의 심정으로 말미암아 행복한 결과로 맺어졌으므로, 보통 로맨스라 불린다.

 

이 시기에 상연된 《폭풍우》는 셰익스피어의 달관된 인생관을 잘 보여주는 수작이다.[4] 이 작품에서 주인공 프로스페로는 이제 연희는 끝났고, 지구의 삼라만상은 마침내 용해되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인간은 “꿈과 같은 물건이어서, 이 보잘것없는 인생은 잠으로 끝나는 것”(4막 1장)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무대에 대한 셰익스피어 자신의 고별사로 받아들여진다.

 

셰익스피어의 세계는 엘리자베스 왕조 연극의 다면성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의 위대함은, 고전작가를 비롯하여 선배와 후배들의 여러 가지 요소를 흡수하면서, 뛰어난 재능과 정교한 극작술로써 모든 장르를 완성하고 동시에 자신의 독자적 세계를 창조했다는 점에 있다. 특히 르네상스적 인간상의 한 전형인 폴스타프의 활약으로 성공한 <헨리 4세>, <헨리 5세>에서의 사극과 희극의 융합, <리처드 2세>나 <로마극>에서의 사극과 비극의 융합은 각각 그린과 말로에게서 그 싹을 볼 수 있다고는 하나 다른 누구에게서도 달성될 수 없었던 영역이었다. 엘리자베스 왕조 연극의 위대한 완성자로서 영국 연극 뿐 아니라 세계 연극의 발전에 공헌한 공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라 하겠다.

1593년과 1594년에 페스트의 유행으로 극장들이 문을 닫게 되자[31] 셰익스피어는 사랑을 주제로 삼은 두 권의 서사시를 출간했다. 《비너스와 아도니스》, 《루크레티아의 능욕》이 그것이다. 《비너스와 아도니스》에서 순수한 아도니스비너스의 성적인 접근을 거절한다. 반면에 《루크레티아의 능욕》에서는 덕있는 아내인 루크레티아가 호색한인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에 의해 강간을 당한다.[32] 이 시들은 통제되지 않는 정욕 때문에 와 도덕적 혼란이 발생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33] 두 시 모두 인기를 얻었고 셰익스피어 생전에 재출간되곤 하였다.

소네트

《셰익스피어 소네트》 1609년판 표지.

 

1609년에 출간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는 셰익스피어가 출판한 책 중에서 연극적이지 않은 작품을 담은 마지막 책이었다.

셰익스피어와 그의 시대

셰익스피어가 활동을 시작했던 16세기 후반의 영국은 한마디로 전환기였다.[29] 어느 시대인들 전환기가 아닌 시대는 없겠지만, 이 기간은 겉으로 드러나는 역사적 사건들에서뿐만 아니라 그 밑에 흐르는 이념의 작동에서도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되던 분명한 전환기였다.[29] 봉건 체제에서 근대국가 체제로의 전이,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와 유럽 열강으로의 편입, 상업주의의 부상, 다양한 문화 산업의 번성 등이 눈에 띄는 것이라면, 그 저변에 젠더에 대한 인식의 변화, 인종 문제의 부상, 사회의 유동화에 따른 계층의 와해조짐 등 이념적 변동 양상이 흐르고 있었다.[29] 셰익스피어가 위대한 작가라는 것은 이러한 사회변동 양상을 선구자적으로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지배하던 영국의 16세기 후반은 문예 부흥기일 뿐 아니라 국가적 부흥기였다.[29] 동시에 사회의 제반 양상들이 요동치고 변화하는 전환기이자 변혁기이기도 했다.[29] 성숙한 문학적 또는 문화적 분위기, 역동적인 사회가 던져주는 풍부한 소재들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곳곳에 녹아들었으며, 이를 통해 그의 작품들은 문학작품 이상의 사회와 역사에 대한 참고서 역할까지 하게 된다.

 

그가 극장가에서 두각을 나타낼 무렵에는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출신의 극작가들이 많이 활동하였는데 이들 중 극작가 로버트 그린은 셰익스피어를 향한 질투심에서 그의 학식이 낮은 사실을 이용하여 “라틴어는 조금밖에 모르고 그리스어는 더욱 모르는 촌놈이 극장가를 뒤흔든다”고 은근히 비꼬았다. 그러나 후대인들은 그들을 ‘대학 출신 재간꾼(University Wits)’ 정도로 부르는 데 반해 셰익스피어는 ‘대가(Master)’라고 불러 위대한 예술적 정신에 대한 예우를 하고 있다.

 

셰익스피어가 위대한 작가로 추앙받게 된 데에는 운 좋게도 문학적 자양분을 풍부하게 제공하는 시대에 태어났다는 점도 한몫 한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견해

저작자 논란

37개의 작품 전부를 과연 대학 교육도 받지 않은 장갑제조업자의 아들 셰익스피어가 혼자 집필했을까 하는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4] 어떤 학자는 철학자이며 정치가인 프랜시스 베이컨이 셰익스피어 작품의 실제 저자라고 추정하기도 하고 에식스 백작 또는 옥스퍼드 백작이 실제 저자라고 추정하기도 한다.[4] 그러나 이러한 추측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셰익스피어라는 대학을 다니지 않았지만 자연인간의 실제 삶으로부터 모든 것을 배웠다.[4]

다음의 새뮤얼 존슨의 논평은 아마 셰익스피어를 가장 적절하게 평가하는 글일 것이다.[4]

보편적인 자연을 올바르게 재현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많은 사람들을 오래도록 즐겁게 할 수 없다. …셰익스피어는 어느 작가보다도 자연의 시인이다. 즉 그는 독자들에게 삶과 세태의 모습을 충실히 비추어주는 거울을 들어 보이는 시인이다. 그의 등장인물들은… 공통의 인간 본성을 지닌 인류의 진정한 자손들이며… 그가 그린 인물들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삶의 전 체계를 움직이게 하는 보편적인 감정과 원칙에 따라 말하고 행동한다. 다른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개별적 인간이라면 셰익스피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일반적으로 하나의 종(種)이다.[4]

작품 인용

셰익스피어는 《뜻대로 하세요》 2막 7장에서 제이퀴즈의 입을 통해 우리의 인생을 다음의 7단계로 구분한다.

세상은 무대요, 온갖 남녀는 배우. 각자 퇴장도 하고 등장도 하며 주어진 시간에 각자는 자신의 역을 하는 7막 연극이죠. 첫째는 아기 장면. 유모의 팔에 안겨 울며 침을 흘리죠. 다음은 킹킹대며 우는 학동. 가방을 메고 아침에 세수해서 반짝이는 얼굴로 달팽이처럼 싫어하며 학교로 기어 들어가죠. 다음은 애인. 용광로처럼 한숨지으며 연인의 눈썹을 찬미하여 바치는 슬픈 노래를 짓고…(중략) 이상하고 파란 많은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마지막 장면은 제2의 소년기인데, 망각만이 있을 뿐. 이빨도, 시력도, 맛도 아무것도 없는 마지막 장이죠.[4]

작품 목록

존 길버트경이 그린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연극", 1849.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에서 셰익스피어가 살아있을 때 출판된 것은 19편 정도이고, 1623년에 작품집이 간행되었다.[31] 이 전집은 이절판(folio)의 대형판이다.[31] 1623년 출판된 셰익스피어의 작품집에는 서른 여섯 개의 희곡이 있다. 작품집에 들어 있는 희곡은 희극사극비극으로 분류되어 있다.[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