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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5세 (Henry V) - 원작: 세익스피어(Shakespeare) 희곡

Bawoo 2015. 10. 22. 00:08

헨리 5세 (Henry V)

 

제목 헨리 5세(Henry V, 1944)
장르 드라마, 전쟁 | 영국, 미국
등급 15세 관람가
감독 로렌스 올리비에
출연 로렌스 올리비에, 로버트 뉴턴, 레슬리 뱅스


영상설명
대주교들의 도움으로 프랑스 왕위를 찬탈한 헨리5세는 캐더린 공주를 본 순간 사랑을 느껴 구혼한다. 그들이 사랑과 행로는. 영국왕 헨리5세는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책을 멀리하고, 시종 잡배와 어울리며, 주색과 잡기, 심지어는 도둑의 무리와 어울리며 부랑 생활을 하여, 그가 왕위에 오르면 올바른 정사를 할 수 있을까 모두가 걱정하였다. 그러나 그가 왕위에 오르자 온 세상이 깜짝 놀란다. 학문에도 게을리했지만, 그의 이론은 논리 정연했고, 무술을 연마하지 않았어도 그는 누구도 당할자 없는 군인으로, 무인으로도 손색이 어벗었다. 그는 충신을 볼줄아는 안목을 가지고 정사를 보살핌에 있어서도 겸허한 자세로 신하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온 국민에게 존경받고, 사랑받는 덕망높은 왕이 되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의 직계인 영국왕 헨리는 자신의 조부 에드워드 3세의 직계로써 프랑스에 대한 정당한 권리가 인정되지 않아 마침내 전쟁에 이르게 된다. 헨리왕은 자신의 병사, 국민에 대한 책임과 사랑, 그를 따르는 신하들의 충성을 느끼면서 인간으로써, 국왕으로써의 해야할 바를 알게 되고, 마침내 일치 단결한 소수의 영국군이 승리를 거두게 된다. 그리하여 영국 왕실의 정통을 확립하고, 프랑스 공주 까뜨린느와 결혼하여 양국간의 평화를 맺고 반목과 전쟁으로 얼룩졌던 두 나라는 둘이면서도 하나인 나라로 평화를 다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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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헨리 5세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 사극에 해당하는 <헨리 5세>. <헨리 5세>는 영국에 있어서 국민의 사기앙양용 희곡으로 흔히 불리고 있다. 창작 동기도 그러하다는 것이 셰익스피어 연구자들의 일반적 견해이며, 국가적 대사가 있을 때 활발하게 상연되고 있다.

 

<우리말 자막 없음>

 

 

<역사 속의 헨리 5세>

잉글랜드의 왕
King Henry V from NPG.jpg
재위 1413년 3월 21일1422년 8월 31일
(9년 163일)
대관식 1413년 4월 9일
출생일 1386-87년[1]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웨일스 몬머스
사망일 1422년 8월 31일[1]
사망지 프랑스 샤토 드 뱅센
매장지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배우자 캐서린 오브 발루아
자녀 헨리 6세
부친 헨리 4세
모친 메리 드 보헌
전임자 헨리 4세
후임자 헨리 6세
왕가 랭커스터 왕가

 

 

 

헨리 5세(웨일스어: Harri V; 1386년 9월 16일 - 1422년 8월 31일[1][2])는 141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잉글랜드의 왕이다. 무난하게 치세를 시작한 그는 백년 전쟁에서 군사적 성공을 거두고, 특히 아쟁쿠르 전투에서 거둔 가장 유명한 승리로 최고점에 달해 닫혔던 프랑스 공략의 길을 열었다.

 

초기 생애

헨리는 헨리 오브 볼링브룩(훗날 헨리 4세)과 16살의 메리 드 보헌(Mary de Bohun)의 아들로 몬머스 성(Monmouth Castle)의 게이트하우스 탑에서 태어난 이유로 헨리 오브 몬머스(Henry of Monmouth) 로 불리었다. 그 때문에 출생일 조차 확실히 알 수 없어서 1386년 혹은 1387년의 8월 9일이나 9월 16일 설이 유력하다.[1][2] 그가 태어난 시기 잉글랜드는 리처드 2세의 통치하에 있었고, 헨리는 왕위계승권에서는 먼저 왕과 아마 또 한명의 평등한 상속자가 있어 멀어져 있었다.

 

1398년 헨리가 12살 때 헨리의 아버지가 국외로 추방되었고, 리처드 2세가 어린 헨리를 맡아  보살펴 주었다. 국왕 리처드 2세와 함께 아일랜드로 간 젊은 헨리는 왕에게 봉사하면서 아일랜드의 고대 회의 장소인

미스(Meath)에 있는 트림(Trim) 성을 수리했다.

1399년 헨리의 아버지와 랭커스터가 왕권을 찬탈하자 헨리는 아일랜드에서 되돌아와 잉글랜드 왕국의

상속자임을 나타내었다. 그의 아버지가 대관식을 거행하고 헨리 4세가 되자 헨리도 프린스 오브 웨일스에 임명되었다.

1399년 11월 10일에는 랭커스터 공작(Duke of Lancaster)에 서임되는 등 그 해 3개의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그의 기타 다른 타이틀은 체스터 백작(Earl of Chester), 콘월 공작(Duke of Cornwall)과 아키텐 공작(Duke of Aquitaine)이었다. 그 시대 기록된 문서를 보면 헨리는 대학의 총장이었던 삼촌 헨리 보퍼트(Henry Beaufort)의 보살핌을 받으며 옥스퍼드 퀸스 컬리지(The Queen's College, Oxford)에서 공부하며 보냈다.[3]

 

1401년 10월부터 그의 이름으로 행정업무가 이루어 졌다. 3년이 지난 후 헨리는 잉글랜드군 일부를 지휘하여 1403년 웨일스에서 일어난 오웨인 글린드와(Owain Glyndŵr)의 반란 때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아버지와 합류해 해리 핫스퍼(Harry Hotspur)를 슐즈베리(Shrewsbury)에서 격파했다.[4] 이때 16살이었던 헨리는 얼굴에 화살을 맞아 거의 죽을 뻔 하였다. 보통의 병사라면 이 부상으로 인해 힘이 다되어 죽을 수도  있었지만 헨리는 가능한 가장 좋은 치료를 받아 살아날 수 있었다. 왕실 주치의 존 브래드모어(John Bradmore)는 며칠간의  시간을 보내면서 상처에 벌꿀을 발라 살균하고, 특수한 도구와 나사를 사용해 부서진 화살대와 화살을 뽑아내고 상처에 알코올을 발라 상처가 더 이상 악화되지 않게 하였다. 이 치료는  성공적이긴 했으나  헨리의 왼쪽 얼굴에는 영구적인 흉터가 남게 되었고, 헨리는 전투에서 얻은 경험의 증거라고 생각했다.[5]

통치 역할과 헨리 4세와의 대립

1408년까지 오웨인 글린드와에 의한 웨일스의 반란 진압에 주력했다. 그 후 왕의 건강상태가  악화되면서  그의 정치적 위상이  서서히 높아지게 되었다. 1410년 1월에는 숙부였던 헨리토마스 보포드(Thomas Beaufort;곤트의 존의 합법적인 아들)의 도움을 받아 실질적인 정권의 지배자가 되었다.

 

헨리 왕자의 정책은 국내정책, 대외정책에서도 국왕과는 달랐기 때문에, 1411년 11월 어전회의에서는 왕자를 부르지 않았다. 보포드 형제가 헨리 4세의 퇴위를 획책할 가능성은 있었으나, 헨리 부자가 대립한 것은 정책적인 것들 뿐이었다. 그리고 보포드 형제와 대립한 세력은 헨리를 중상모략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과 정치에 대한 적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묘사되 내용들에  일부 책임이 있지만

 젊을 적부터 전쟁과 정치에 참여한 기록이 있어  반박할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인 사법장관과 다툰 일은 1531년 토마스 엘리엇(Thomas Elyot)경이 그 시대 권위자로써 처음으로 언급하였다.[6]

 

존 올드캐슬 경(Sir John Oldcastle)은 헨리의 초기 친구로써 폴스타프(Falstaff) 스토리의 오리지널 일부분의 모델이다. 친구들 중에는 롤라드 소망(Lollard hopes)을 지지하던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아룬델(Thomas Arundel)이란 프린스 시절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인물도  있었다. 당시 토마스 월싱엄(Thomas Walsingham)이란 성직 서기가 진술한 이야기에 보면  모든 면에서 실망스러워 보이던  헨리가 왕이 되면서 갑자기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왕위 계승

1413년 3월 20일 헨리 4세가 사망하자, 다음날 헨리가 왕위를 계승하고 1413년 4월 9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의례 때 무서운 눈보라가 일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좋은 예언인지 나쁜 예언인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7] 헨리는 "매우 키가 크고(6피트 3인치), 슬림하며 귀 윗쪽 고리부터 수북한 검은 머리가 있었고, 깨끗하게 면도하였다" 라고 묘사되어있다.  혈색은 건강했고, 얼굴을 앞으로 내밀며 가장 특징적인 날카로운 코를 자랑했다.  무드에 약하고,  눈은 "사자의 광휘와 비둘기의 온후함이 비쳐졌다고 한다".[8]

국내 정치

헨리 5세는 모든 내정문제에 직접 관여했고, 그리고 서서히 자신의 영향력을 높였다. 또한 즉위 초기부터

자신을 잉글랜드라는 연합국가의 수장이라고 언급하고, 과거의 국내대립은 잊어 버리겠다는 방침을 명확히 했다. 즉 아버지와 대립한 리처드 2세를 다시 정중하게 매장하고, 리처드 2세가 재위한 사이 추정상속인이었던 모티머(Mortimer)를 마음에 들어 해 가까운 곳에 거리에 살게 해주고 작위, 영토를 몰수당해 곤란에 처해 있던  귀족들에게는 작위, 영토를 순차적으로 회복시켜 주었다.

 

헨리 5세에게 최대의 국내 문제는 롤라드파에 대한  대처였다.

1414년 1월 헨리의 오랜 친구 존 올드캐슬 경을 화형에 처하는 등 단호하게 진압해 "싹을 잘라 버렸다" 라고 이야기되면서  군주로써의 위치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몬머스 샤이어 홀(Shire Hall)에 있는 시계 문자판(clock face) 아래 헨리 5세의 동상. 헨리 5세는 1387년 8월 9일 몬머스 성에서 태어났고, 1792년 샤이어 홀에 동상이 설치되었다.

 

1415년 6월 케임브리지 백작 리처드(Richard, Earl of Cambridge; 미래 에드워드 4세의 조부)와 매셤의 스크로프 남작 3세 헨리 스크로프(Henry Scrope, 3rd Baron Scrope of Masham)가 포함된 모티머 지지자들에 의한 사우샘프턴 음모(Southampton Plot)를 제외하고는 이후 커다란 내정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1417년 8월부터 헨리 5세는 정부에서 영어 사용을 촉진했다.[9] 그리고 치세  기간 내내 모든  기록과 언어를 영어로 대부분 채택하여 대법관청 기준(Chancery Standard) 영어의 출현을 만들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350년 전 노르만 정복 이래 처음으로 개인서적에 영어를 사용한 왕이 되었다.[10][11]

외교 문제

헨리 5세는 외교문제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동시대 사가는 헨리가 내정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프랑스와 전쟁에 들어가려고 교회학(ecclesiastical) 정치가들을 독려했다고 주장하지만  이 이야기는 근거가 없다. 오랜 상업적 분쟁과 오웨인 글린드와를 프랑스가 지원한 것, 그리고 프랑스 정부의 혼란으로 안전과 평화를 제공하지 못하는 것이 전쟁을 막지 못하게 했다. 프랑스 왕 샤를 6세는 정신병을 갖고 있었고, 그의 나이 많은 아들은 실망스러웠다.

 

아쟁쿠르 전투 후 헝가리 왕(훗날 신성로마황제 1433년-1437년) 지기스문트(Sigismund)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평화를 희망하며 헨리를 방문했다. 헨리의 프랑스에 대한 요구를 완화시키기 위해서였다. 헨리는 황제를 환대하고 가터 훈장(Order of the Garter)을 수여했다. 지기스문트는 답례로 헨리를 드래곤 기사단(Order of the Dragon)에 등록했다.[12] 헨리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권을 합친 이후 십자군을 조직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죽음으로 계획은 없는 것이 되었다.[13][14][15]

지기스문트는 잉글랜드에서 수개월을 보낸 후 캔터베리 조약(Treaty of Canterbury)을 체결하고 프랑스 왕권에 대한 잉글랜드의 주장을 인정했다.

프랑스의 전역

 
카셀의 잉글랜드의 역사 (1902년)에서 헨리 5세를 묘사한 것.

 

헨리는 왕실의 의무는 자신의 고유 권리의 주장과 관계된다고 생각했다. 그의 해외정책 성공은 필수적인 국가적인 논쟁을 영구히 정착시켰다.

1415년 원정

1415년 8월 11일 프랑스를 향해 출항한 헨리의 잉글랜드군은 8월 13일 북프랑스에 상륙해 아르플뢰르(Harfleur)의 요새를 포위하고 9월 22일에는  이곳을 함락했다. 이후  군사회의에서 위험성을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헨리는 그의 군대를 프랑스 시골 마을을 가로질러 칼레로 행군하기로 결심했다.[16]

1415년 10월 25일 아쟁쿠르의 마을 근처 평원에서 프랑스군이 헨리의 앞을 가로 막았다. 그의 맨앳암(men-at-arms)은 수적 열세와 영양부족으로 피폐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이끌고 전투를 벌여 프랑스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겼다. 이는 흔히 전날 밤에 내린 호우로 진창이 된 전장 탓에 프랑스군의 진격이 방해되었고, 수렁에 빠진 프랑스 맨앳암들은 측면을 노출시켜  잉글랜드와 웨일스 궁사들의 좋은 표적이 된 것에 기인한다. 프랑스군 대부분은 진창에 빠져 압사하거나 살해되었다. 이는 크레시푸아티에 다음으로 인정받는  헨리의 대승리로 기록되었다.

 

이 전투 동안[17] 헨리는  자신의 명성을 더럽히게 될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명령으로 인해 포로로 잡힌 프랑스군들이 죽임을 당했고, 그 중엔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날 수 있는 저명한 인물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케임브리지 역사학자 브렛 팅레이(Brett Tingley)는 헨리가 프랑스군의  3번째 공격을 힘겹게 물리친 후 지친 잉글랜드군에게 프랑스군 포로들의 위협이 될까봐 그렇게 한 것으로 이야기 했을 정도로 위태롭고 힘든 싸움에서의  승리였다.

잉글랜드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쟁쿠르 전투의  승리로 잉글랜드 왕권에 속한  프랑스에 대한 주장을 다시

시작하는 전역(campaign)의 첫 걸음이 된 전투라고  볼 수 있다.

외교와 제해권

영국 해협의 제해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프랑스만이 아니라 프랑스와 동맹한 제노바(Genoa)를 해협에서 몰아낼 필요가 있었다. 잉글랜드 수비대가 있는 아르플뢰르 항구가 프랑스와 제노바 함대에게 포위되고, 프랑스 육군이 도시를 포위하자 1416년 헨리는 평화교섭에 나섰다. 헨리는 아르플뢰르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형제인  베드포드 공작 랭커스터의 존을 대장으로 하여 8월 14일 비치헤드(Beachy Head)에서 범선으로 구성된 함대를 출항시켰다. 7시간에 걸친 힘겨운 전투 끝에 그날 프랑스-제노바 함대를 격퇴해 아르플뢰르는 구원되었다.

외교적으로는 프랑스로부터 황제 지기스문트를 떼어놓는데 성공하고  캔터베리 조약(1416년)으로 교회 분열(schism)을 끝내는 길을 열었다.

1417년 원정

잠재적인 2개의 적들을 잠재우고, 아쟁쿠르에 이어 2년 동안 준비를 하며 기다린 헨리는 1417년 다시 대규모 침공작전을 개시했다. 노르망디의 연안부를 재빨리 점령하고, 루앙(Rouen)은 파리에서 분리시킨  상태에서 맹렬히 공격했다. 헨리는 이 공성전에서도  아쟁쿠르에서와  같이  똑같은 명령을 내린다. 루앙의  수비대는  굶주리고 허약한 여성과 어린이들의 지원까지 받으며  성문을 굳게 지켰는데 만약  헨리가 그의 군대를 거느리고 그냥  지나치면 방해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헨리는 도시를 포위하고 수로를 막아 기아에 빠진 여성과 아이들의 구제를 거부했다. 당시 프랑스는 부르고뉴아르마냐크(Armagnacs)의 항쟁으로 인해 마비상태에 있었다. 헨리는 뛰어난 술수로 양쪽을 서로 다투게 만들어 자신의 군으로 진격해 오는 것을 최대한  늦췄다.

1419년 1월 루앙은 함락되었다. 저항했던  노르망디의 프랑스인은 엄중하게 처벌당했다. 성벽에서 잉글랜드인 포로의 머리를 베어 떨어뜨렸던 알랑 브랑샤르(Alan Blanchard)는 곧바로 처형되었고, 잉글랜드 국왕을 파문했던 루앙의 사제 로베르 드 리베(Robert de Livet)는 잉글랜드로 보내져 5년간 감옥에 투옥되었다.[18]

 
헨리와 결혼하는 캐서린 오브 발루아

 

1419년 8월 잉글랜드군은 파리성 바깥까지 도달했다. 이 싸움은 프랑스 측의 음모로 인해 몽트로(Montereau)에서 도팽 일행에게 용맹공 장이 암살당하면서 절정에 달했다(1419년 9월 10일). 그래서 새로운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Philip the Good)는 헨리 5세의 잉글랜드군과 손을 잡고 6개월의 교섭 끝에 트루아 조약(Treaty of Troyes)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헨리 5세가 프랑스 왕위계승자이자 섭정이 되는 것을 인정했다. 

 1420년 6월 2일 헨리는 국왕의 딸 카트린(캐서린 오브 발루아)과 결혼했다. 6월~7월에 걸쳐 헨리의 군대는 몽트로 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11월에는 믈룅(Melun)을 점령하고 얼마 안가 잉글랜드로 귀국했다.

1421년 원정

1421년 6월 10일 헨리는 자신의 마지막 군사 원정을 위해 프랑스로 출항했다. 7월~8월에 걸쳐 헨리의 군대는 드뢰(Dreux)를 공격해 점령하고, 샤르트르에서 동맹군을 지원했다. 그 해 10월 를 포위하고 다음해 5월 2일 함락시켰다. 1422년 8월 31일 헨리는 파리 교외 샤토 드 뱅센(Château de Vincennes)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외관상 모 공성전 기간 걸린 이질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나이  겨우 35살때였다. 그는 죽기 전 아들 헨리 6세의 이름으로 동생 베드포드 공작 존(John, Duke of Bedford)을 프랑스의 섭정으로 임명했었다. 헨리 5세는 트루아 조약 체결 시 병약한 프랑스 왕 샤를 6세보다 오래 살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 프랑스 왕" 으로 약정했었지만  샤를 6세가 오히려 2개월 정도  더 살게 된 것이다.

캐서린은 헨리의 유해를 런던으로 운반해 1422년 11월 7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매장했다.

문장

 
국왕 헨리 5세의 문장 (그의 아버지와 비슷한 것)

 

프린스 오브 웨일스로써 헨리의 문장은 왕국의 것과는 다른 3개 포인트의 라벨과 은색이 있다.[19] 그가 계승한 후 왕국과 다르지 않은 문장을 물려받아 사용하였다.

결혼 및 자손

헨리는 1420년 발루아의 캐서린와 결혼하여 한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훗날 헨리 6세가 된다.

같이 보기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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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헨리 4세의 아들이며, 프랑스와 싸운 백년전쟁아쟁쿠르 전투(1415)에서 승리하여 잉글랜드를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의 하나로 만들었다.

초기생애

헨리는 더비 백작 헨리(뒤의 헨리 4세)와 메리 드 보헌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1398년 아버지가 망명하자, 리처드 2세는 어린 헨리를 맡아서 잘 보살펴주었고, 1399년에는 그에게 기사작위를 주었다. 헨리의 삼촌인 윈체스터 주교 헨리 보퍼트가 그의 훈육을 책임진 듯한데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훌륭히 교육받았다. 자라면서 음악과 독서를 좋아하게 되었고, 영어로 쉽게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최초의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

아버지가 왕위에 오른 뒤, 1399년 10월 15일에 헨리는 체스터 백작, 콘월 공작 겸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그 직후에 아키텐과 랭커스터 공작이 되었다. 1400년 10월부터 웨일스의 행정은 그의 이름으로 이루어졌으며, 1403년에는 웨일스 반란자들을 진압하는 군대의 실질적인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1408년까지 정력의 대부분을 이 싸움에 쏟아넣었다. 그후 병든 아버지와 캔터베리 대주교인 토머스 애런들에 반대하여 정부에서 발언권을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고, 추밀원에서도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요구했다.

헨리 왕자의 무모하고 방종한 젊은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통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왕이 된 뒤에는 갑자기 돌변했다고 하는데 이런 이야기들은 그가 죽은 지 20년도 채 지나기 전에 씌어졌기 때문에, 순전히 거짓말이라고 치부하거나 그렇다고 해서 엘리자베스 시대 극작가들의 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그가 전쟁과 추밀원에서 보인 태도에 대해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작가들이 묘사한 것과 대체로 모순된다.

그들은 아마 정력을 발산할 수 있는 건설적인 배출구를 충분히 찾지 못한 젊은이의 자연스러운 혈기를 묘사한 데 불과한 것이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그가 재판장인 윌리엄 개스코인 경과 다툰 이야기지만, 1531년에 처음 나타난 이 사건은 튜더 시대에 꾸며낸 이야기이다.

헨리는 1413년 3월 21일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통치 초기의 그의 지위는 실패로 끝난 롤라드파의 봉기(1414. 1)에 이어, 케임브리지 백작인 요크의 리처드와 매셤의 스크로프 경 헨리가 마치 백작인 에드먼드 모티머를 왕위에 앉히기 위해 꾸민 음모(1415. 7)로 위협을 받았다. 그때마다 헨리는 미리 경고를 받았고 반대자들은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어떤 사건도 그의 마음을 오랫동안 사로잡지 못했다. 주요관심사는 프랑스에 대한 야심적인 정책이었다.

그는 칼레 조약(1360)에서 프랑스가 잉글랜드에 할양한 아키텐과 그밖의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요구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일찍이 앙주 왕가의 재산이었던 노르망디와 투렌 및 멘의 소유권을 요구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한 번도 잉글랜드가 가져보지 않은 프랑스 지역까지 요구했다.

프랑스 정부가 발광한 샤를 6세 때문에 갈피를 못 잡고 있다 해도 이런 요구를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았지만, 헨리는 자신의 요구가 정당하며, 공격 의도를 은폐하기 위한 냉소적인 구실만은 아니라고 확신한 것 같다. 그러나 '정의의 수단'이 실패하면, 그는 '폭력적인 수단'에 호소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리처드 2세 시대에 시작된 샤를과 잉글랜드의 협상은 1415년 6월에 마침내 결렬되었지만, 전쟁 준비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프랑스와의 전쟁

헨리 5세의 진정한 천재성은 프랑스를 정복하기 위한 원정 계획과 그 실행에 드러나 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그는 부르고뉴 공작 의 지지나, 그의 중립을 확보하기 위해 노련한 외교 수완을 발휘했다. 프랑스에 해상 지원이 제공되는 것을 막으려는 그의 노력은 그가 중세의 왕으로는 이례적으로 해군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센 전투(1416. 8)가 끝난 뒤 영국 해협을 장악한 잉글랜드 해군은 심각한 저항을 받은 적이 없었다.

국내에서 헨리는 대규모 기채(起債)와 의회가 의결한 과세를 통해 그가 계획한 프랑스 침략자금을 체계적으로 조달했다. 의회가 과세를 너그럽게 인정해 준 것은 그가 전쟁에 대한 국민적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헨리는 유력 인사들의 진심어린 지지와 통일 국가의 지원을 얻어 싸움을 시작했다. 그의 군사적 전략도 그에 못지않게 노련했다. 이 전략은 14세기에 잉글랜드가 프랑스에서 펼친 치밀하지 못하고 즉흥적인 전략과는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그의 주요목적은 프랑스 북부의 대도시와 요새들을 조직적으로 정복하는 것으로서, 전투에서 이기는 것과는 별로 관계가 없었다.

이런 대도시와 요새들을 정복하면 잉글랜드 상설 수비대의 본부로 유지하면서, 이곳을 중심으로 점차 주변의 시골 지방을 정복할 계획이었다. 행정관과 세금 징수관이 병사들을 뒤따라 점령지에 들어가 전쟁 비용을 자체 조달한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장래에 대비한 깊은 통찰력과 놀라운 식견을 보여주었지만 계획을 실행하는 데는 헨리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계획은 7년 동안 그의 정력을 고갈시켜, 그를 일찍 무덤으로 데려갔다.

그는 첫번째 원정에서 하르프뢰르를 점령하고(1415. 9), 아쟁쿠르에서 대승을 거두었다(1415. 10. 25). 이 쟁쟁한 승리로 헨리는 유럽의 외교적 중재자가 되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지기스문트 황제의 예방을 받고 캔터베리에서 동맹조약을 맺었으며(1416), 지기스문트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프랑스와 해군동맹을 맺은 제노바를 그 동맹에서 떼어내는 데 성공했다. 두 통치자는 서로 협력하여 마르티누스 5세를 교황으로 선출함으로써(1417) 교황 분열을 종식시키는 데 직접 이바지했다.

이것은 헨리가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목표였다(서방교회 분열). 그후 그는 길고 무자비한 포위전으로 돌아가, 노르망디를 조금씩 정복했다. 프랑스 북부의 주요 도시인 루앙은 1419년 1월에 항복했고, 1419년 9월에 부르고뉴 공작 장이 살해되자 부르고뉴는 헨리와 동맹을 맺었다.

이처럼 헨리가 성공을 거두자, 프랑스인들은 1420년 5월 21일 결국 트루아 조약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헨리는 프랑스 왕위계승자 겸 프랑스 섭정으로 인정받았고, 샤를의 딸 카트린(캐서린)과 6월 2일에 결혼했다. 그는 이제 권력의 절정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의 승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믈룅과 모를 포위공격할 때 건강을 해친 그는 1422년 뱅센 성에서 발진티푸스로 죽었다.

성품과 능력

헨리의 성품은 결코 전적으로 좋은 편은 아니었다.

매정하고 오만한 그는 반대를 참지 못했고, 정책을 추진할 때는 무자비하고 잔인할 수 있었다. 그는 기사도 자질이 부족했기 때문에, '전형적인 중세의 영웅'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대인들은 정의에 대한 그의 애착을 칭송했고, 당시의 프랑스 작가들조차 그를 용감하고 신실하며 꼿꼿한 인간, 훌륭한 투사, 비열함과 천박함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당당한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했다. 비록 인간적인 따뜻함은 부족했지만 남의 헌신을 끌어내는 재능이 있었으며, 지도자의 자질도 갖고 있었다.

경건한 신앙심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임종할 때 그가 밝힌 마지막 소원은 조금만 더 오래 살아서 다음 십자군 원정에 참가해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세울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능력이라는 점에서 보면, 그는 잉글랜드의 왕들 가운데 높은 자리에 놓여야 한다. 그의 업적은 주목할 만했다.

"그는 방향 없이 표류하던 허약한 나라를 맡아서, 9년 뒤에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로 만들어놓고 떠났다"라는 말은 사실이다. 그의 치세의 비극은 그 뛰어난 재능을 국내의 건설적인 개혁에 발휘하지 않고, 전망이 불확실한 해외 전쟁에 쏟았다는 점이다. 그가 일찍 죽는 바람에 잉글랜드가 해외에서 성공할 가능성은 사라졌고, 잉글랜드는 그후 오랫동안 그의 후계자인 헨리 6세의 견디기 어려운 통치를 받아야 했다.

 

* 출처: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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