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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 3걸 중 1인]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Bawoo 2015. 12. 1. 19:54

 

사이고 다카모리
西鄕隆盛

에두아르드 키요소네의 판화
(사이고의 친척을 모델로 한 묘사)
출생 1828년 1월 23일(1828-01-23)
에도 막부 에도 막부 사쓰마 국 가고시마
사망 1877년 9월 24일 (49세)
일본 제국 일본 제국 가고시마 현 가고시마
별칭 아호(雅號)는 난슈(南洲), 난슈오(南洲翁)
아명(兒名)은 사이고 고키치(西鄕小吉), 사이고 다카나가(西鄕隆永), 사이고 다케오(西鄕武雄)
직업 무사, 정치가
활동 기간 막부 말기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일본어: 西郷隆盛 (さいごうたかもり) 서향융성[*],

 

1828년 1월 23일~1877년 9월 24일)는 일본의 에도 시대메이지 시대에 걸쳐 활동한

정치가이자 무사이다.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었고 1877 사쓰마 번 무사들의 반란인

세이난 전쟁패배후 자결했다.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와 함께 메이지 유신 삼걸(三傑)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왕정복고 쿠데타를 일으켜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 중심의 정치 제체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1828년 가고시마 현의 사쓰마 번에서 하급 무사인 사이고 기치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이름은 기치노스케이며, 호는 난슈(南洲)이다. 가난한 하급 무사 집안에서 4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동생들을 양육하며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에는 체구가 크고 동작이 느린데다 얌전한 성격이어서 또래들에게서 얼간이로 통했다고 하는데, 성인이 되었을 때는 183센티미터의 키에 90킬로그램의 몸무게를 지닌 거구로 사람들을 압도했다. 그는 열여덟 살 때 사쓰마 번의 농정 관리로 등용되었고, 스물일곱 살 때까지 농촌을 순회하며 마을 관리들을 지도, 감독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그는 농민의 고된 생활을 직접 체감하고, 농정을 중심으로 한 사회 개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51년 그는 같은 하급 무사 계층의 여성인 도시코와 결혼했다. 말단 관리로 봉록이 낮은 수준이어서

살림은 어려웠다. 그가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854년 사쓰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참근교대 제도로 에도에 갈 때 그를 수행하면서부터이다. 같은 해 3월 막부는 미국의 페리 제독과 미일 화친조약을 체결했다. 이 사건은 막부의 정치 운용 능력이 한계에 도달했음을 알려 주는 사건으로, 각지에서 반막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막부를 중심으로 정치 개혁을 해야 한다는

인물들도 있었다. 사쓰마 번주 나리아키라는 후자에 속했다. 그는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번들과 막부 관료들 사이의 연락책으로 다카모리를 발탁했다. 다카모리는 이를 통해 정치적 견문을 넓히고 지배층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출세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1856년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가 병약하여 후계자를 둘 가능성이 없다고 여겨지는데다 외국 함선의 개항 요구 등 정세가 불안해지자 후계자 분쟁이 일어났다. 미토 번은 번주의 아들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추천했고, 히코네 번주 이이 나오스케를 중심으로 한 막부 관료들은 도쿠가와 요시토미(도쿠가와 이에모치)를 옹립하려 했다. 다카모리는 요시노부를 지지하던 나리아키라의 명으로 각 번주 간의 연락을 담당했다.

 

이때 남편마저 떠난 고향에서 홀로 동생들을 책임지며 살아가야 했던 아내 도시코가 궁핍한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이혼을 요구했다.

그는 이혼이라는 개인적인 아픔 속에서도 에도와 고향, 교토의 조정을 오가며 요시노부를 쇼군으로 추대하는 작업을 계속 해 나갔다. 그러나 결국 요시토미가 쇼군으로 추대되면서 막부 정권은 이이 나오스케를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반대파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게다가 사이고는 요시노부 추대 과정에서 미토 번의 존왕양이각주[1] 파 지사들과 친분을 쌓게 되었는데, 이는 요시토미 아래 보수적인 막부 정치에 실망을 느끼고 막부 타도의 기치를 드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 시기 일본은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 중심의 정치 체제를 구축하려는 다이묘들이 등장하고, 막부 내에서도 보수파와 개혁파가 대립하는 등 정치적 격변기였다. 나리아키라가 죽은 후 그의 뒤를 이은 다다요시와 생부 히사미쓰는 막부와 조정 사이를 중재하여 번을 안정시키려고 했다. 나리아키라가 죽기 직전 안세이 대옥(安政の大獄)각주[2] 이 시작되면서 각 번은 막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다카모리는 과격한 성정에다 존왕파로 의심을 받아 결국 오시마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1864년 다카모리는 사면되어 군부역에 임명되었다. 그해 6월 조슈 번의 존왕양이파 지사들이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조슈 번은 교토에 군대를 보내 막부와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사쓰마 번은 조슈 정벌군에 임명되었다. 다카모리는 조슈와 화친하여 사태를 마무리하려고 했으나 결국 교전 끝에 조슈 군을 교토에서 철수하게 했다. 그는 이 일로 군대에서 급부상하고 막부의 실력자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대정봉환 논의

 

1867년 10월 13일, 쇼군이 대정봉환을 논의하기 위해 신하들을 불러 모은 모습을 그린 그림

조슈의 군대가 물러갔지만 막부는 실추된 위세를 만회하기 위해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조슈 정벌군을 파견하기로 했다. 그러나 다카모리는 조슈와의 화친을 위해 조슈의 급진파들을 설득해 정벌군이 퇴각하게 했다. 막부는 1866년 또다시 2차 조슈 정벌군을 구성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했고, 결국 막부의 조슈 정벌은 실패로 끝났다. 내부 조직의 부패와 정치력 약화로 막부의 위세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막부 타도 운동이 전국적으로 들끓었다.

 

그해 다카모리는 사쓰마와 조슈 간의 군사 동맹을 맺고, 천황으로부터 막부를 타도하라는 칙서를 얻어 냈다. 그리고 1867년 11월 9일, 제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국정 결정권을 조정에 넘기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이 이루어졌다. 12월 9일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군대가 에도에 입성했고, 천황 정부는 쇼군에게 관직 사퇴와 영지 반납을 선포했다. 이에 신정부에 참여하고자 하는 막부 측과 천황을 중심으로 모인 번들 간에 소요가 일어났고, 에도를 중심으로 전투가 발발했다. 이듬해 3월 다카모리는 에도 성 공방전이 일어나기 전 막부와 협상을 이끌어 냈고, 4월 요시노부가 에도를 신정부에 명도하면서 실질적인 천황 중심의 통치 체제가 완성되었다. 이후에도 다카모리는 정부군으로 막부 지지 세력을 토벌해 나갔다.

 

그러나 그후 다카모리는 신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사쓰마로 돌아가 번의 관료로 일했다. 1871년 그는 관료들의 오랜 설득 끝에 정부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다카모리의 등용으로 군사력과 치안 상태가 급격히 신장되었으며, 정부는 이를 기반으로 폐번치현(번을 폐지하고 현 체제로 행정구역을 정비함) 조치, 사족 정치 같은 번 내 봉건 제도를 폐지 등 중앙 집권적 국가 체제를 세워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번의 토지 영유권은 천황의 소유가 되었으며, 각 번의 군대는 해산되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영유되던 사족들의 특권적 지위가 박탈되었다. 이는 사족을 기반으로 움직이던 다카모리의 지지 기반 역시 무너지게 됨을 의미했다. 이런 과정에서 다카모리는 신정부에 크게 회의를 느꼈다.

 

1873년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이 대두했다. 이는 사족들의 불만이 지나치게 커지자 이들의 시선을 외부로 돌리고, 천황 직속 군대를 만들기 위한 정부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다카모리는 전쟁이 문무 관료 중심의 부르주아식 통치에서 다시 사족 중심의 통치로 전환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조선 출병을 강경하게 지지했다. 그러나 이를 반대하는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와 대립하여 결국 사임하고 가고시마로 귀향했다.

 

다카모리는 가고시마에서 군사학을 가르치는 사학을 설립해 후학을 양성했다. 일본 전국에서 무사들이 몰려왔으며, 1877년 무렵에는 학생 수가 2만 명에 달했다. 그러는 한편 사쓰마 번을 중심으로 사족이 주도하던 기존 봉건 체제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매달렸다. 정부는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몰락일로에 있던 사족들의 불만은 날이 갈수록 팽배해졌고, 다카모리는 사족의 옹호자로 여겨졌다. 이에 더해 구마모토 등지에서 사족의 반란이 잇달아 일어나면서 사족들의 관심은 다카모리에게 향했다.

 

1877년 1월 말, 그의 제자 몇이 가고시마의 군수 공장과 해군 기지를 공격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다카모리는 사학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군대를 일으켜 구마모토로 향했다. 이것이 세이난(西南) 전쟁이다. 이 전쟁은 메이지 초기 최대이자 최후의 사족 반란으로 여겨진다. 오쿠보 도시미치를 중심으로 관군이 편성되었고, 다카모리 군대는 구마모토 성 공방전에서 패퇴했다. 전쟁은 9월까지 이어졌으나 결국 9월 24일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다카모리를 비롯해 지도자 대부분이 자결했다. 다카모리가 죽은 후에도 사족들은 그를 추앙하며 정부에 반발했으나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이 반란을 진압함으로써 정부는 사족들을 억제하고 문무 관료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 집권화의 기반을 확립하게 된다.

 

· 1856년 : 쇼군 후계자 분쟁이 일어나다. 다카모리는 이때부터 존왕양이파 지사들과 뜻을 모은다.
· 1867년 :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에도를 떠나면서 천황 중심 체제가 완성되다.
· 1873년 : 다카모리가 정한론을 주장하다.

전체항목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西郷隆盛像) 우에노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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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양은경 전체항목 집필자 소개

대학에서 일문학을 전공한 뒤 일본에서 유학했다. 일본어 전문 번역자 및 역사책 전문 기획자로 활동 중이며,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역사 교양 도서를 집필하고 있다. 저서로는 《역사를 달리는 세계사버스》 등이 있다.

제공처

청아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