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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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33년 8월 11일 일본 조슈 번 |
사망 | 1877년 5월 26일 (43세) 일본 교토 |
직업 | 정치인 |
기도 다카요시 / 가쓰라 고고로 (木戸 孝允 / 桂 小五郎)는 1833년 8월 11일 ~ 1877년 5월 26일)는 일본의 정치인이며,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유신 삼걸중의 하나이다.
생애
그는 지금의 야마구치 현인 조슈 번의 하기 시에서 무사 집안인 와다 마사카게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가쓰라 집안에 양자로 들어갔다. 요시다 쇼인의 문하생으로서, 요시다 기숙학교에서 공부하며 존왕양이의 사상을 배웠다. 학생 시절에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릴 운동을 이끈 조슈 번의 지도자들과 가깝게 지냈다.
조슈 번의 지도자
1862년 조슈 번의 최고 지도자들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나가사키와 시모다에서 서양식 함선의 건조를 참관한 후 조슈에 돌아와 조슈 번의 첫 번째 전함의 건설을 감독하였다. 그곳의 급진파들의 영향이 번영하자, 1865년 도쿠가와 막부는 조슈 번에 대항하는 가혹적 원정을 이끌었다. 기도는 지도자 직을 박탈당하고, 보수적 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급진파들이 자신들의 군사를 성립하였고 도쿠가와 군대가 철수하자, 2차 도쿠가와의 원정을 성공적을 격퇴할 수 있었다. 조슈 번 정부의 우두머리로서, 사쓰마 번의 급진파 사무라이들과 협상을 시작하였다. 그와 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는 함께 쇼군을 무너뜨리고 일본 천황을 권력에 복직시키기 위한 쿠데타를 지도한 유신 삼걸로 알려졌다.
메이지 유신
메이지 유신의 가장 권력있는 지도자들 중의 하나가 되어, 제국의 수도를 교토에서 에도(지금의 도쿄)로 옮기는 책임을 지던 기도는 국가를 현들로 재분배하여, 중앙 정부에 의하여 임명된 지사들에게 다스리도록 하였다.
1871년 오쿠보, 이토와 함께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세계를 여행하였다. 이후에 그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하였으며 귀국 후에 사이고의 정한론에 반대하여 조선출병을 막았다.
1874년 대만 정벌에 반대하다가 실각하였다. 1875년 오사카 회담 이후에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고, 서양식 헌법의 수립을 위한 일을 시작하였다.
사쓰마 반란이 일어난 후인 1877년 5월 26일, 43살의 나이로 예부터 갖고 있던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출처: 위키백과 - 기도 다카요시 [Kido Takayos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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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kugawa shogunate years)
[요약 ]
264년간 지속된 도쿠가와 바쿠후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왕정을 복고한 메이지 유신의 지도적 인물이다.
조슈 한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문의 지도적 인물들과 도쿠가와 바쿠후를 타도하는 데 뜻을 같이했다. 그는 조슈 한의 대표로서 사쓰마 한의 급진적 무사들과 두 한의 연합을 비밀리에 협의했다. 이때 자리를 함께 했던 사쓰마 한의 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유신 3걸'이라 불렸으며 이들이 뒤에 바쿠후를 타도하고 왕정복고를 이룩한 혁명을 지도했다. 그는 신정부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관료 중 하나였다. 수도를 교토에서 에도(도쿄)로 옮기는 데 앞장섰고 큰 한의 영주들을 설득하여 한에 대한 지배권을 덴노에게 반환하게 했다. 나아가 한을 폐지하고 나라를 여러 개의 현으로 나누어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관리로 하여금 통치하게 했다.
기도 고인이라고도 함. 본명은 가쓰라 고고로[桂小五郞]. 264년간 지속된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왕정을 복고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지도적 인물이다.
조슈 한[長州藩]의 이름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한[藩]의 행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조슈 한의 지도적 인물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도쿠가와 바쿠후 타도에 뜻을 같이하게 되었다. 조슈 한의 급진파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1862년 한의 요직을 맡게 되었다. 도쿠가와 바쿠후에서는 조슈 한의 급진파들에게 경계심을 품고 1865년 정벌을 행하여 기도를 비롯한 급진파들은 물러나고 보수파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쿠후의 군대가 철수한 뒤 급진파들은 군대를 조직하여 다시 한을 장악했으며 바쿠후가 재차 정벌을 감행했지만 잘 물리쳤다.
기도는 조슈 한의 대표로서 사쓰마 한[薩摩藩]의 급진적 무사들과 두 한의 연합을 비밀리에 협의했다. 이때 자리를 함께 했던 사쓰마 한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함께 '유신 3걸'(維新三傑)이라 불렸으며 이들이 뒤에 바쿠후를 타도하고 왕정복고를 이룩한 혁명을 지도했다.
그는 신정부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관료 중 하나였다. 수도를 교토에서 에도[江戶:지금의 도쿄]로 옮기는 데 앞장섰고 큰 한의 영주들을 설득하여 한에 대한 지배권을 덴노에게 반환하게 했다.
그뒤 작은 한들도 이 선례를 따르게 했으며, 나아가 한을 폐지하고 나라를 여러 개의 현(縣)으로 나누어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관리로 하여금 통치하게 했다.
1871년 유럽 시찰을 위해 파견한 '이와쿠라 사절단'[岩倉使節團]의 일원으로 참가한 뒤 1873년 귀국하여 정한론(征韓論:당시 신정부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무사계급을 무마하기 위해 조선을 침략하자고 한 주장)에 반대하여 이를 물리쳤다. 1874년 타이완 출병(出兵)에 반대하여 요직에서 물러났다가 요인들의 설득으로 복직했다. 이후 서구식 헌법의 제정에 일익을 담당했지만 건강의 악화로 활발한 활동은 하지 못했다.
「維新3傑」의 1人 기도 다카요시
道服 차림의 다카스기 신사쿠. 그는 柳生新陰流의 면허를 皆傳한 검술의 達人이었다. |
藩醫 아오키家로부터 바로 몇 집 건너 가면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1833~1877)의 옛집이다. 기도는 「과격파와는 一線을 그은 냉정한 혁명가」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가 역사의 앞무대에 등장한 것은 에도의 검객 齊藤彌九郞(사이토 야구로)의 도장에 입문해 塾頭(숙두)에 오르고 부터이다. 기도는 검술뿐만 아니라 造船術·蘭學도 배웠다.
1860년 8월, 에도灣에 정박 중이던 조슈번의 군함 丙辰丸(병진환)의 선상에서 水戶(미토)藩의 니시마루 타테와키(西丸帶刀) 등과 「丙辰丸 맹약」을 맺었다. 이 맹약은 櫻田(사쿠라다)門 사변 이후의 정국을 둘러싼 미토藩 중심의 운동에 조슈번도 海防(해방)을 통해 참획한다는 내용이었다. 1860년의 「사쿠라다門 사변」이란 천황의 재가도 받지 않고 서양 5개국과의 조약을 인준한 막부의 大老(首相)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를 미토藩 번사 일당이 궁문 앞에서 난도질해 암살했던 大사건이다.
1861년, 조슈번의 藩是는 나가이 우다(長井雅樂)가 제창했던 「航海遠略策」에 바탕한 公武合體策으로 결정되어 조정과 막부를 단합시키는 것이었다. 기도는 구사카 겐즈이·다카스기 신사쿠 등 요시다 쇼인 門下와 결연해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구사카 겐즈이 등 존양과격파와는 전면적으로 동조하지 않았던 기도는 동년 5월 京都에서 公家 및 他藩(타번)과의 절충에 나섰다.
「維新3傑」의 1人으로 불리는 기도 다카요시의 옛집. 그는 尊攘과격파와는 一線을 그은 현실정치인이었다. |
1862년, 「8·18 정변」으로서 조슈번은 京都에서 쫓겨났지만, 기도는 京都에 잠복해 있으면서 雪(설원)에 노력했다. 훗날 기도의 夫人이 되는 게이샤 이쿠마쓰(幾松)가 新選組(신선조: 막부에 고용되었던 암살집단)에 쫓기는 기도를 위기에서 구했다는 것은 일본에서는 꽤 알려진 얘기다.
1864년 4월, 기도는 藩의 京都留守居役이 되었다. 이때 쿠루지마(來島又兵衛)·구사카 겐즈이 등 존양과격파가 전년의 「8·18 쿠데타」에 대한 복수를 계획하는 것을 알고 만류했지만, 실패했다. 동년 7월19일 「禁門의 變」을 일으켰다가 패전한 조슈번의 존양과격파가 京都로부터 도주하자 그도 막부의 追討를 피하기 위해 다지마(但馬)에서 잠복했다.
1865년 4월26일, 기도는 다카스기 신사쿠·이토 히로부미 등의 권유로 귀번, 對막부 전쟁에 대비해 여러 개혁을 실시하는 등 藩政의 중추에 위치하게 되었다.
기도 다카요시 옛집의 내부. |
1866년 1월21일, 도사(土佐)의 浪人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주선에 의해 기도는 京都의 사쓰마 藩邸(번저)에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만나 삿초(薩長) 비밀동맹을 맺었다. 동년 6월7일, 막부군의 先攻으로 시작된 四境전쟁(막부 측은 조슈征討戰이라 부름)에서 조슈번은 승리했다.
막부 붕괴 후, 기도는 新정부의 參議(참의)에 올라 조슈번을 대표하는 실력자가 되었다. 版籍奉還(판적봉환: 각 藩이 보유해 오던 토지와 호적을 천황에게 바침)의 실현에 있어 중심적 역할을 하고, 이와쿠라(岩倉) 사절단의 副使로서 歐美를 시찰했다. 기도는 스승 요시다 쇼인의 영향으로 원래 征韓論者였으나 歐美를 시찰한 후에는 內治優先論者인 오쿠보 도시미치(사쓰마번 출신)와 힘을 합쳐 사이고 다카모리를 고립시켰다. 그는 1877년(明治 10년) 5월26일에 病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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