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 감상실 ♣/[1881년 이후]

Arnold Schoenberg

Bawoo 2016. 1. 21. 20:19

 

Arnold Schoenberg

 

 

(13 September 1874 – 13 July 1951) 

 Austrian composer and painter

 

개요

무조성을 만드는 12음계에 의한 체계적인 작곡 기법을 창조했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곡자로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버른 등 중요한 작곡가들을 길러냈다(음렬주의).

초년

아버지 사무엘은 빈의 유대인 제2지역에서 조그만 신발 가게를 경영했다.

사무엘과 아내 파울린은 음악에 대해 그다지 조예가 깊지 않았으나, 그당시 대부분의 오스트리아인들이 그렇듯이 음악을 좋아했고, 가족 중 형 하인리히와 사촌 한스 나호드는 직업 가수였다. 나호드는 재능 있는 테너 가수로 쇤베르크의 〈구레의 노래 Gurrelieder〉의 초연 때 발데마어 역을 맡기도 했다. 9세가 되기 전에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소품들을 작곡했고, 선생이나 사촌과 함께 연주하기도 했다. 얼마 뒤 비올라를 연주할 줄 아는 친구를 만난 것을 계기로 2대의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현악 트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쇤베르크는 오스카르 아들러(나중에 유명한 점성가로 〈Das Testament der Astrologie〉를 저술했음)를 알게 되었고 그의 권고로 첼로를 배우게 되었다. 이로써 그와 그의 친구들은 현악4중주를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쇤베르크는 곧 현악4중주를 작곡하기 시작했지만, 1악장 소나타 형식의 구성법을 배우지 못한 상태였으며 이러한 기술의 터득은 그의 가족이 할부로 구입한 백과사전 〈Meyers Grosses Konversations-Lexikon〉 중 S자(字) 편을 참고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1890년 아버지가 죽은 후 쇤베르크는 1895년까지 은행원으로 일해야 했다.

이 기간에 그는 성장을 거듭하던 젊은 작곡가이자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폴리힘니아의 지휘자였던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를 알게 되어 그 관현악단에서 첼로를 연주했다. 쳄린스키와의 친밀한 우정 속에서 그에게 화성법·대위법·작곡법을 배웠고, 그 결실로 〈현악4중주 D장조〉(1897)를 작곡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쇤베르크의 곡 중 연주된 최초의 작품으로 브람스의 양식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곡은 1897~98, 1898~99년의 연주회 시즌에 빈의 청중들에게 좋은 평을 얻었다.

주요작품들

1899년 그는 상당히 낭만적인 표제음악인 현악6중주 〈정화된 밤 Verklärte Nacht〉을 작곡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작품세계에 있어서 중대한 발전이었다.

이 곡은 같은 제목의 리하르트 데멜의 시에 기초해서 만든 것으로, 현악6중주로 작곡된 최초의 표제음악이었으며 표제가 갖는 관능적 성격과 화성으로 인해 보수적인 표제음악 작곡가들을 격분시켰고, 그결과 1903년에 가서야 초연되었다. 초연 때에도 청중들의 강한 반발이 있었지만, 이후 그의 원래의 곡과 현악 편곡이 모두 쇤베르크의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 되었다.

 

1901년 경제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해 베를린으로 옮겼고, 친구 쳄린스키의 누이인 마틸데 폰 쳄린스키와 결혼했다. 소박하고 예술적인 분위기의 카바레 위베르브레틀에서 지휘자로 일하기 시작했고, 이곳에서 연주하기 위해 소프라노와 피콜로·트럼펫·작은북·피아노를 위한 〈몽유병자 Nachtwandler〉 등 수편의 가곡을 작곡했다. 그러나 그 자리는 그의 생활과 창작활동에 충분할 정도의 보수를 제공해주지 못했다. 독일의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도움으로 슈테른 음악원의 작곡 교수직을 얻게 되었고, 독일음악진흥협회가 수여하는 리스트 장학금을 받았다.

 

슈트라우스의 격려로 벨기에의 작가 모리스 메테를링크의 희곡을 기초로 대규모 관현악단을 위한 교향시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Pelleas und Melisande〉(1902~03, 그의 유일한 교향시)를 작곡했고, 1903년 빈으로 돌아와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와 사귀게 되어 이후 그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의 중요한 작품은 현악4중주 1번 D단조 작품 7(1904)이었는데, 이 작품은 두터운 음악적 짜임새와 이례적인 형식(고전적인 현악4중주의 전통적인 4개 악장들이 거의 중단 없이 하나로 묶여 50분 동안 계속됨)으로 인해 1907년 초연 때는 청중들이 이해하지 못했다.

 

〈실내 교향곡 E장조 Chamber Symphony in E Major〉(1906)는 앞의 작품과 비슷한 형식을 사용했지만 더욱 압축적인 곡으로 합주악기의 선택에 있어서 새로운 시도였다(후기 낭만주의에서 사용한 '거대한' 관현악단 대신 15대의 악기에 의한 실내악 편성을 사용함). 이 기간에 교육자로서 점차 많은 활동을 하게 되었다. 1904년 오스트리아의 젊은 작곡가인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버른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쇤베르크는 이들에게 강렬한 자극을 주었으며, 그 역시 제자들로부터 지적인 자극을 받았는데 저서 〈화성법 강의 Harmonielehre〉(1911) 서문에 "이 책은 내 제자들로부터 배운 것이다"라고 쓸 정도였다. 선생으로서의 재능은 이 책뿐 아니라 〈작곡 초심자를 위한 모범 Models for Beginners in Composition〉(1942)·〈화성의 구조적 기능 Structural Functions of Harmony〉(1954)·〈대위법 초보 연습 Preliminary Exercises in Counterpoint〉(1963)·〈작곡의 기초 Fundamentals of Musical Composition〉(1967) 등 교재 성격을 띤 여러 저술에도 잘 나타난다.

조성으로부터의 이탈

이전까지의 그의 모든 작품은 엄격하게 조성음악(하나의 주음을 중심으로 나머지 음들이 위계구조를 이룸으로써 조성감을 갖는 음악)의 테두리에 머물러 있었지만, 점차 복잡한 화성과 선율을 사용함에 따라 조성의 중요성이 훨씬 약화되었다.

조성을 '극복'하는 과정은 현악4중주 2번(1907~08)의 마지막 악장 시작부분에서도 목격할 수 있다. 이 마지막 악장 앞에는 시인 슈테판 게오르크의 시구 "나는 또다른 흑성으로부터의 공기를 느낀다"(Ich fühle Luft von anderen Planeten)가 적혀 있는데, 흔히 쇤베르크가 새로운 음향세계(무조성의 세계)로 들어섬을 암시하는 상징으로 해석되어왔다.

 

1909년 2월 19일 그가 완성한 피아노 소품 작품 11-1번은 음 구성의 수단으로서의 '조성'과 완전히 결별한 최초의 작품이다.

이제 그는 더이상 조성적 중심(음들간의 위계질서를 이루는 데 있어서 중심이 되는 음, 즉 으뜸음)이 존재하지 않고, 어떤 종류의 제한도 받지 않는 상태로 자유롭게 음들이 화성적·선율적으로 배합될 수 있는 음악을 쓰기 시작했고, 이것은 흔히 무조성 음악이라 불리게 되었다. 쇤베르크 자신은 무조성이라는 표현보다는 '범조성'(pantonality)이라는 표현을 좋아했다.

 

무조성으로 된 기악곡들은 흔히 길이가 아주 짧았고, 성악곡의 경우에는 길이가 길 수 있었지만 가사가 통일성의 수단을 제공해야만 했다. 그가 당시 작곡한 중요한 무조성 작품들로는 〈5개의 관현악 소품 Five Orchestral Pieces〉 작품 16(1909), 소프라노와 관현악을 위한 모노드라마 〈기대 Erwartung〉 작품 17(1924), 실내악 반주가 곁들여진 21개의 낭송적 '멜로드라마' 〈달빛 속의 피에로 Pierrot Lunaire〉 작품 21(1912), 음악이 있는 드라마 〈운명의 손 Die glückliche Hand〉 작품 18(1924), 미완성 오라토리오 〈야곱의 사다리 Die Jakobsleiter〉(1917 작곡 시작) 등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이전에 작곡한작품들도 처음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1913년 2월 23일 〈구레의 노래〉(1900 작곡 시작)가 빈에서 초연되었다. 이 거대한 칸타타는 이례적으로 커다란 규모의 성악 및 관현악을 요구하는 작품으로, 말러의 교향곡 8번 〈천인의 교향곡 Symphony of a Thousand〉과 함께 후기 낭만주의의 기념비적 양식의 절정을 상징하는 곡이다. 이 작품은 초연 때 청중으로부터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그 자신은 그 작품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으며 청중의 열광도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았다.

1911년 빈에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되자 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겨 살았으며,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빈에서 징병검사를 받게 되었다.

 

1916~17년에 오스트리아 군대에서 잠시 복무했으나 질병으로 제대했다. 전쟁기간에는 작곡을 하지 못했는데, 군복무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조성으로부터의 이탈이 야기한 커다란 구조적 문제들을 어떤 식으로 풀 것인가에 대한 성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자유자재로 풍부한 화성·선율 재료들을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원리를 찾고자 했다. 1921년 7월말경 그는 한 제자에게 "오늘 나는 앞으로 100년간 독일 음악에 최고의 지위를 부여해주게 될 그 어떤 것을 찾아냈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곧 12음 기법(즉 12개 음들이 위계구조를 갖지 않는 가운데 서로 대등한 자격으로 연관되도록 하는 새로운 작곡방법)이었다.

 

12음 기법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작품은 〈피아노 모음곡 Piano Suite〉 작품 25였다.

12음 기법에 의한 음악작품은 12개의 서로 다른 음들을 특정한 순서로 배열한 음렬로 이루어진다. 음렬에는 원래의 형태 그대로인 원형음렬과 이것의 변형들, 즉 전위음렬(원형음렬과 구성음들의 순서는 같되 음정관계를 뒤집어놓아 만든 음렬, 한 예로 원형음렬이 E음에서 F음으로 반음 상행 진행하면 전위음렬에서는 E음에서 E♭음으로 반음 하행 진행함)·역행음렬(원형음렬의 음들을 뒤에서부터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형태로, 한 예로 원형음렬이 E음에서 E♭음으로 진행하면 역행음렬에서는 E♭음에서 E음으로 거꾸로 진행함)·역행전위음렬(역행을 하고 난 뒤 다시 전위를 하여 만든 음렬) 등이 있으며, 모든 음렬은 어떤 음높이로도 전이가 가능하여, 음렬은 정해진 음정관계만 유지하면 반음계의 12개 음 중 어느 음높이로도 시작할 수 있다.

 

이렇듯 하나의 원형음렬은 원형·역행·전위·역행전위에 의한 4가지 형태로 변형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48개(12×4개)의 변형음렬이 생기게 된다. 이로써 작곡가는 융통성을 갖고 작곡할 수 있게 되었다. 음렬의 각 음들은 또한 옥타브 진행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한 음렬에서 만들 수 있는 선율의 가능성은 더욱 많아지게 된다.

한 예로 E-F-G로 시작하는 음렬을 가지고 작곡을 할 경우, 작곡가는 E-F-G를 반음씩 순차 상행 진행할 수도 있지만, 또한 E음 다음의 F음을 한 옥타브 위의 음으로 도약 진행시키고 또다시 G음을 도약 하행 진행시킬 수도 있다. 이로써 12음 체계의 융통성은 더욱 커지게 되며, 이것은 12음 기법에 의한 선율들이 종종 이례적인 도약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한 음렬의 음들은 시차적(선율적)으로 차례로 배열할 수도 있지만, 동시적(화성적)으로 배열함으로써 화음을 형성할 수도 있다.

사실 12음 기법을 사용한 곡에서 모든 화성 및 선율은 음렬에서 유도되어나온 것이다. 12음 기법은 얼핏 규칙에 얽매인 듯 보이지만, 쇤베르크는 대작 〈모세와 아론 Moses und Aron〉(1930 작곡 시작) 등의 실제 작곡을 통해 이러한 우려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12음 기법을 사용했다.

때로 전통적인 조성으로 돌아간 적도 있었지만, 이것은 그가 말한 대로 "C장조로 여전히 좋은 음악을 작곡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가 말년에 작곡한 조성음악 작품으로는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음곡 Suite for String Orchestra〉(1934)·〈레치타티보 선율을 주제로 한 오르간 변주곡 Variations on a Recitative for Organ〉 작품 40(1940), 〈밴드를 위한 주제와 변주곡 Theme and Variations for Band〉 작품 43A(1943) 등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쇤베르크의 음악은 점차로 명성을 얻었지만, 12음 기법의 고안 자체는 상당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23년 그의 아내인 마틸데가 오랜 와병 끝에 죽었고, 1년 뒤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 루돌프 콜리슈의 누이 게르트루트 콜리슈와 재혼했다. 1925년에는 베를린에 있는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로부터 작곡과 마스터 클래스 수업을 요청받아 그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의 활동은 절정을 이루었다. 그의 교습은 좋은 반응을 얻었고, 여러 중요한 작품들도 작곡했다. 그러나 1933년 독일에 들어선 나치 정권이 유대인들의 활동을 제약함에 따라 이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결국 그는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이주했고, 이곳에서 정식으로 젊은 시절에 버렸던 유대교로 전향했다. 1933년 11월 보스턴의 말킨 음악원 교수가 되었고, 1934년 캘리포니아로 이주, 1941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 후 여생을 보냈다. 서던 캘리포니아대학교(1935~36),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교(1936~44)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미국에서 작곡한 대표적인 작품들은 12음 기법의 처리에 있어서 더욱 능숙함과 자유로움을 보였고, 특히 뛰어난 곡으로 바이올린 협주곡 작품 36(1934~36), 현악4중주 4번 작품 37(1936), 피아노 협주곡 작품 42(1942),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 Fantasia〉 작품 47(1949) 등을 들 수 있다.

1951년 7월 2일 독일 다름슈타트에서 '신음악을 위한 여름학교' 프로그램의 하나로, 20세기 음악에 정통한 헤르만 셰르헨의 지휘로 〈모세와 아론〉 중 〈황금송아지를 에워싼 춤 Dance Around the Gold Calf〉이 연주되었다. 이 연주회의 대대적인 성공을 알리는 전보로 그는 매우 만족스러워했지만, 11일 후 죽었다. 그는 비록 전자음악에 의한 궁극적인 혁명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혁신적인 작품활동이 없었다면 전자음악도 빛을 보지 못했을지 모른다.[다음백과 - 쇤베르크 [Arnold (Franz Walter) Schoenberg]]

 

[다른 자료 보기]

1. 한국어 위키-아르놀트 쇤베르크 (Arnold Schoenberg)

2. 영어 위키 - Arnold Schoenberg

3. 작품 목록 - List of compositions by Arnold Schoenberg

 

 

[참고자료]

클래식-쇤베르크,이전과 이후

12음 기법(dodecaphony) 혹은 음렬주의(serialism)가 20세기 음악사에 남긴 흔적과 영향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기법을 창안하고 주도한 쇤베르크의 음악사적 위치와 의미 또한 막중하다.

서양음악사를 쇤베르크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생각하는 패러다임의 설정도 가능할 것이다.

그만큼 그의 작곡기법은 서양음악사에 있어서 거의 혁명적인 변화를 몰고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쇤베르크는 말한다. 자신이 한 일은 철저하게 서양음악의 전통을 계승한 것 일 뿐 새로운 시도나 창작은 전혀 아니라고. 바흐, 베토벤, 브람스 등 선배 작곡가들이 일구고 발전시킨 창작어법을 이어받아 그것을 또 다른 형태로 진화시켰을 뿐이라는 것이다.

즉 자신은 바흐가 세워놓은 견고한 조성의 체계, 모차르트나 하이든의 철저한 기능화성 구축 그리고 브람스가 굳혀놓은 조성 속의 풍부한 내용 삽입 등과 같은 유산을 바탕으로 모든 조성과 구성 음들의 평등한 전개와 자유로운 조합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구현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그의 초기작품인 ‘정화된 밤(Verklarte nacht)’만 해도 브람스, 말러, R. 슈트라우스 등의 영향이 배어있는 이른바 후기 낭만 스타일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스타일은 보다 정교한 대위법적 구조를 향해 나아간다.  동시에  극단적인 반음계주의를 향해 치닫게 되는데 와중에 자연히 조성의 중심이 희미해지거나 해체되는 상태로 진입하게 된다.

이렇듯 그는 서양음악의 탄탄한 전통으로부터 출발해 그것을 논리적 극단으로 끌고 가는 작업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한 20세기의 상징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한 친지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자신의 초기작품들은 후기의 것들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단서라고 얘기 한다. 그의 후기낭만 혹은 표현주의로 분류되는 초기 작품들의 세계를 이해해야 비로소 12음렬로 발전되는 후기 경향을 논리적으로 쫒아올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를 다시 확장해석하면 자신의 음악을 이해하려면 앞선 시대 음악의 흐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는 진술과도 같다. 그가 자신의 음악의 뿌리를 철저히 과거에 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바로크 이후 피아노 음악이 걸어온 진화의 역정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필연적으로 나아가야 할 미래의 방향을 추구했다는 고백인 것이다.

20세기 초입 느닷없는 파격으로 받아들여졌던 12음 기법이란 다름 아닌 도도히 흘러왔던 서양음악 전통의 불가피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거의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했지만 비엔나거주 작곡가 젬린스키(Alexander von Zemlinsky(1871-1942)문하에 잠시 머문 적은 있다. 그 시절 쇤베르크는 바그너풍의 음악에 깊이 심취했었다.

최초이자 거의 유일한 스승인 젬린스키는 나중에 그의 처남이 되지만 쇤베르크의 부인 마틸드의 출분과 그에 따른 후유증으로 두 사람은 결코 좋은 사이를 유지할 수 없었다.

선생 젬린스키 이외에 쇤베르크가 영향을 받았던 선배 혹은 동시대 작곡가들의 명단은 짧지 않다.

나아가서 그가 영향을 끼친 제자나 후대 작곡가들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당대 동료 작곡가들의 후한 이해를 얻은 것도 아니고 음악을 듣는 청중들과 친화적인 관계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의 사후 수 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작품이 포함된 연주회는 청중동원의 실패를 약속하는 가장 확실한 기획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초반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교량적 역할로서 쇤베르크의 공헌은 크다.

선배세대격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구스타프 말러는 일찍이 쇤베르크의 존재와 명성을 의식하고 있었다.

슈트라우스는 1899년 발표된 쇤베르크의 초기작품인 'Gurrelieder'나 '정화된 밤‘ 같은 작품들에 즉각 접한 바 있었다.

그러나 슈트라우스의 경우 그 스스로 작품세계 말기에 접어들며 보다 전통적인 이디엄으로 회구하려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쇤베르크의 더욱 첨예해진 후기 낭만적 실험에 필요 이상의 관심은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말러는 달랐다. 후기 낭만시대의 끝자락을 유장하게 장식하고 있던 말러는 오히려 쇤베르크에게 동질성을 느끼며 그의 작품세계에 호감을 표했다.  

적어도 쇤베르크가 급진적인 조성 해체의 길로 나아가자 크게 실망하면서 우려를 표명하기 전까지는. 이후 무조성 음악을 받아들이거나 좋아할 수 없었던 말러이지만 쇤베르크를 비롯한 베베른과 베르그의 이른바‘ 제2 비엔나 학파’에 대한 지지는 끝내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말러가 비엔나에서 큰 명성을 얻고 잇을 때 쇤베르크는 아직 그의 선생인 Zemlinsky 수하에서 활동하던 젊은 작곡가였다.

쇤베르크는 처음엔 말러를 폄하했다.  

말러의 작품들에 큰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너무 거창한 그의 작품 컨셉을 비판하기도 했던 것이다.

한편 말러도 쇤베르크의 인간성을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었다.

그러나 서로의 작품에 접하는 일이 많아질수록 쇤베르크는 말러를 지휘자이자 작곡자로서 크게 존경하게 되었으며 말러 또한 쇤베르크에게 내재한 재능과 통찰력을 인정하게 되었다.


사실 쇤베르크의 초기 관현악 작품들의 경우 말러로부터 받은 영향이 농후하다.

초기작품 ‘정화된 밤’ 같은 경우 말러의 ‘교향곡 9번’이나 ‘10번 1악장’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사실이 어렵지 않게 추적된다. 쇤베르크는  이 세기말 거인의 ’교향곡 3번‘을 듣고 전광석화와 같은 충격을 받은 이후 결정적으로 말러 신봉자의 입장에 머무르게 된다. 이후 쇤베르크는 말러를 거의 ’음악의 성자‘로 추앙하는 지경에 이른다.


한편 말러의 쇤베르크에 대한 후원 또한 매우 현실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말러는 쇤베르크의 관현악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연주무대에 올렸으며 다른 장르의 작품들을 스스로 관현악곡으로 편곡하여

연주하기도 하였다. 한걸음 나아가서 말러는 쇤베르크에게 재정적 지원까지 약속하게 되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파악할 방법이 없지만 쇤베르크가 말러에게 보낸 감사 편지의 기록을 통해 이 부분에 대한 유추가 가능하다.

그러나 양자 간의 이와 같은 전반적인 호의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음악세계는 꽤나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고

둘 다 이 사실은 인정하고 있었다.

이질적이고 방향이 다른 두 사람의 예술가 사이의 교감은 결국 그들의 정신적 수준의 위대성을 반증하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쇤베르크의 독자적인 카리스마는 그의 주변에 절친한 친구를 두는 일을 힘들게 했다.

그리고 몇몇 절친했던 친구들마저 사소한 이유들로 그와 소원해지기도 한다.

쇤베르크는 그의 대표 제자들인 베르크나 베베른조차 동료나 동지로 대하기보다는 그저 아랫사람 대하듯 했었다.

특히 스트라빈스키와는 피차 정말 좋아하지 않은 사이였다고 알려져 있다.

스트라빈스키와 쇤베르크는 사십여 년 동안 실질적인 적대 관계였다.

그들의 비호감은 베를린에서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인 1912년 11월 무렵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공공연히 알려지게 된 것은 그들이 캘리포니아에서 이웃으로 지낼 때였다.

그들은 일부러 만난 적도 없고 기껏해야 가끔 서로를 멀리서 흘겨보는 것이 전부였다.

비록 스트라빈스키는 쇤베르크를 항상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고는 하나 쇤베르크는 스트라빈스키의 신고전주의를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 간의 실질적인 교류는 없었기에 반감이나 시기의 감정들이 표면화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정통적인 방식으로 훈련되었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가진다. 나아가서 그들의 작품들은 전통 해체 이후 각기 너무도 개성적인 노선을 향한다는 것도 일종의 공통점이다.


스트라빈스키의 스타일은 쇤베르그의 그것과는 극단적인 차이를 보인다.

후기 낭만으로 시작한 쇤베르크가 무조성을 지나 결국 음렬주의로 귀착한 것과 대조적으로

스트라빈스키는 음악적으로 카멜레온과 같은 변화를 거친다.

가장 흥미롭고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원시주의에서 재즈에 이르기까지 온갖 경향을 모두 섭렵하던 스트라빈스키는

쇤베르그가 사망한 뒤에 그의 12음 기법에 깊이 기울어졌다는 사실이다.

쇤베르크는 제자들을 양성하는 일을 일찍이 시작한다.

화성법, 대위법, 그리고 작곡법 등을 1904년부터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베를린의 Prussian Academy of Arts의 작곡교수로 재직하던 시절부터  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다.

베베른, 베르그 그리고 한스 아이슬러 등은 이 초기 제자그룹에 속한다.

그들은 후에 쇤베르크가 발전시킨 12음 기법을 충실하게 계승해 가장 중요한 20세기의 작곡가들이 된다.

베베른과 베르그는 실질적으로 20세기 초반 무조성의 진영을 진두지휘한 전위적 존재들이다.  


제1 비엔나 학파라고 할 만한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그리고 브람스의 전통을 이어받고 쇤베르크로부터 직접 지도 받은 그들은 더욱 복잡한 반음계주의와 더불어 기존의 조성을 과감하게 제외시킴으로써 전통적인 조성체계가 무의미해지는 경지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드디어 조성으로부터의 자유를 획득한 이른바 ‘불협화음의 전성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히틀러의 박해가 본격화된 1933년 이후 그는 해외 망명길로 나서게 된다.

파리를 거쳐 미국에 정착하게 된 쇤베르크는 UCLA에서 역시 많은 제자들을 길러낸다.

그 가운데에는  John Cage, Lou Harrison 등 미국 현대음악의 기수가 되는 이들이 포함되어있다.

쇤베르크의 음렬기법은 유럽과 미국의 젊은 작곡가들에게 지속적으로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Boulez, Stockhausen, Nono, Babbitt등 20세기 후반 이른바 아방가르드 역할을 수행했던 젊은 작곡가들에게 쇤베르크는 정신적, 기법적 대부와도 같은 존재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쇤베르크의 음렬주의로부터 출발했지만 더욱 확장시키고 심화시켜 전음열주의(total serialism)를 비롯한 새로운 경지로 그것을 발전시켜나가게 된다.

미국에 정착하면서 알게 된 존재 중 중요한 이는 바로 조지 거쉬인이다.

쇤베르크는 취미인 테니스를 함께 치고 그림에 대한 공통된 취향을 나누는 동시에 음악에 대한 아이디어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거쉬인과 돈독한 사이가 된다.  사람들이 거쉬인을 진지한 클래식 작곡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을 그는 매우 유감스러워했다.

어떤 외형적 기준이나 틀로 예술가를 재단하는 것을 쇤베르크는 당연히 싫어했던 것이다.  

거쉬인의 아이디어가 비록 다소 가볍거나 피상적인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모든 것을 소리로 치환하여 표현하려는 진정한 음악인이라는 점을 쇤베르크는 무엇보다도 높이 평가했다.


거쉬인이야 말로 순정한 음악인이라는 것이다.

수많은 작곡가들이 단순한 작곡 논리나 일정한 음악 정신에 부합하는 작품을 만드는 일에 열심이지만 그들에게 부족한 진정성, 영혼 그리고 유머가 거쉬인에게는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쇤베르크는 이 이질적인 작곡가를 두둔하고 사랑했다. 문제는 쇤베르크와 거쉬인은 너무나 다른 음악빛깔을 가졌다는 것이다.

거쉬인이 쇤베르크에게 작곡에 있어서 한 수 가르쳐달라고 요청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그리고 쇤베르크가 ‘ 쇤베르크의 아류가 되지 말라 당신은 이미 일류 거쉬인이다’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그는 거쉬인이 개척자 내지는 개혁자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믿었다.

거쉬인이 선율, 화성, 리듬에 관해 시행한 실험은 단지 스타일의 변화가 아니라 음악의 본질적 구성에 대한 혁신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내적인 필연성이나 절박함에서 우러나오지 않고 당대의 경향이나 피상적인 스타일에 기초한다면 참다운 진정성을 가진 작품은 생산되지 않으리라는 것이 쇤베르크의 소신이었다.

이렇듯 거쉬인이 지닌 참다운 예술혼과 자세를 간파한 쇤베르크는 진정 자유롭고 포용력 있는 음악혼을 지녔다고 하겠다.

무조성(atonality)과 12음 기법이라는 서양음악의 극한 지대에 깃발을 높이 꽂은 쇤베르크의 음악세계는 그러나 과거의 전통에 그 맥을 대고 있다. 그리하여 바흐로부터 시작하는 모든 시대의 주요 작곡가들은 모두 그에게 영향을 끼친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추상(抽象)을 구사하려면 먼저 철저한 구상(具象)의 훈련을 거쳐야 한다는 논리에도 그는 충실했다.

쇤베르크의 세계는 전통으로부터 파악한 철저한 질서와 그것을 더욱 확장시키려는 음악적 의지로 채워진 것이었다. 그러한 시도의 결과물인 12음 기법은 20세기 음악사의 흐름에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해준다. 거의 모든 20세기 작곡가들이 12음 기법을 이해하거나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이미 서양음악의 ‘고전적 기법’의 일부가 되어버린 지  오래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다수의 20세기 작곡가들은 쇤베르크의 영향을 받은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쇤베르크 이전과 이후는 치밀한 내면적 논리로 연결되어 있지만 그 두 세계 자체는 급진적인 차이를 보인다. 쇤베르크 이후의 음악은 결코 그 이전의 상태와 똑같을 수도 비슷할 수도 없어진 것이다.

자료 출처: http://blog.daum.net/oyunhwang/6979296

클래식 해설서 <클래식을 좋아하세요?>의 저자 피아니스트 김순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