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해
「봄꿈을 보며」
만약에 말이지요, 저의 임종 때,
사람 살아가는 세상의 열두 달 가운데
어느 달이 가장 마음에 들더냐
하느님께서 하문하신다면요,
저는 이월이요,
라고 서슴지 않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눈바람이 매운 이월이 끝나면,
바로 언덕 너머 꽃 피는 봄이 거기 있기 때문이지요.
네, 이월이요. 한 밤 두 밤 손꼽다 기다리던
꽃 피는 봄이 코앞에 와 있기 때문이지요.
살구꽃, 산수유, 복사꽃잎 눈부시게
눈처럼 바람에 날리는 봄날이
언덕 너머 있기 때문이지요.
한평생 살아온 세상의 봄꿈이 언덕 너머 있어
기다리는 동안
세상은 행복했었노라고요.
시_ 김종해
김종해(1941~ )는 부산에서 태어났다. 1963년 《자유문학》과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 『인간의 악기』 『항해일지』 등이 있다.
낭송_ 이준혁 - 배우. 연극 '날자날자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달무리' 등에 출연.
배달하며
어떤 시들은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노경(老境)에 든 시인의 ‘임종’과 ‘봄꿈’의 연결이 맑고 슬픈 울림을 만드는 시를 읽을 때 그렇지요. “사람 살아가는 세상의 열두 달 가운데 어느 달이 가장 마음에 들더냐”라고 묻는다면, 제각각의 대답이 나오겠지요. 노시인은 뜻밖에도 “이월이요”라고 하는데요. 언덕 너머 ‘봄꿈’이 있기에, 백화제방의 시절에 대한 기다림으로 채워진 이월이 아름답다는 것이지요. 시인은 ‘이월’이 무지개와 같은 봄꿈을 품은 달이라고 하지만, 정작 이월은 스산합니다. 응달엔 푸른빛의 잔설, 실내에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가 여전하니까요. 시골 물가 집에서 ‘이월’을 날 때 늘 무릎에 담요를 덮고 무언가를 읽거나 썼지요. 이월에 자주 무릎이 시리고 허기가 졌으니까요. 언땅이 풀릴 기미조차 안 보이는데 기대와 동경을 품은 ‘봄꿈’이라니요! 누군가는 가혹한 시절을 견디며 기다림을 달콤한 사탕처럼 녹여먹겠지만, 저와 같은 비관주의자들은 기다림을 존재의 고갈과 탕진을 일으키는 비극으로 받아들이기도 할 테니까요.
문학집배원 장석주
출전_ 『봄꿈을 보며』(문학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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