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싸움이나 하는 정치권 망국의 길 걸었던 조선 닮아
통렬한 역사교훈 되새겨야
[황원갑 소설가·역사연구가 ]
올해는 병인양요가 일어난 지 150주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지 140주년 되는 해다. 군국주의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에 따라 조선왕조는 몰락의 내리막길을 달렸고 이 땅은 개명과 수탈로 교직(交織)된 근대사의 문을 열게 됐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던 지난 1876년 2월26일 일제는 8척의 군함을 갑곶 앞바다에 띄워놓고 무력시위를 했으며 열무당(강화도 주둔군 훈련장) 문 앞에 4문의 대포를 걸어놓고 꽝 꽝 공포를 터뜨리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처럼 억지로 맺은 강화도조약에 따라 양화(洋貨)라 불린 서구의 근대적 공장 제품이 다량 유입됐고 농업을 경제적 기반으로 한 전통 가치 질서를 파괴해 왕조사 붕괴를 재촉했다. 식민주의·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가혹한 경제 수탈이 뒤를 이었다.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1875년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에 이어 1876년 이곳에서 체결된 강화도조약은 쇄국의 빗장을 벗긴 서막이었다.
강화도조약 10년 전인 1866년 초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금령을 내리고 프랑스인 신부와 천주교 신자 6,000여명을 학살했다. 이른바 병인박해다. 이때 프랑스 선교사인 펠릭스 리델 신부는 중국으로 탈출해 주중 프랑스함대 사령관 피에르 로즈 제독에게 보복을 촉구했다. 로즈는 군함 7척에 함포 10문, 총병력 1,000여명을 대동하고 강화도를 공격해 10월16일 강화부를 점령했다. 조선 조정은 강화도를 점령당하자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하고 대장에 이경하, 중군에 이용희, 천총(千總)에 양헌수를 임명했다. 양헌수는 군사를 이끌고 통진부(通津府·김포 통진읍)에 진을 치고 강화도 수복작전을 구상했다.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10월26일 김포 문수산성 전투에서도 조선군을 압도했다. 양헌수는 프랑스군에 화력으로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임을 알고 기병(奇兵)작전을 계획한다. 양헌수는 군사 549명을 이끌고 한밤중에 몰래 강화해협을 건너 11월7일 정족산성에 들어갔다. 남문과 동문에 포수 등 300여명을 매복시켰다. 로즈는 올리비에 대령에게 정족산성 공격을 명해 11월9일 160명의 군사를 이끌고 정족산성 공략에 나섰다. 그러자 매복해 있던 조선군은 쳐들어오는 프랑스군에게 일제히 총격을 가해 격전이 벌어지는데 그 결과 프랑스군은 전사자 6명 포함 60여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 조선군 피해는 전사 1명, 부상 4명에 불과했다.
결국 프랑스군은 강화도에서 철수했고 이것이 병인양요의 전말이다. 이 전투는 우리 역사상 최초로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을 격퇴한 전투로 기록된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철수할 때 강화도에 있던 외규장각 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를 약탈해갔다. 해군이 아니라 해적이었다.
1876년 2월26일 체결된 강화도조약에 따라 1876년 부산, 1880년 원산, 1883년 제물포가 강제로 개항됐고 일제는 이들 개항장을 통해 정치·경제·군사적 침략의 발판을 구축했으며 개항지에서 일인들의 토지 임차·건축·거주 및 일상(日商)의 무제한 진출과 자유판매권까지 확보해 식민지 경영의 첫발을 내디뎠다.
백성에게는 범처럼 무서웠고 외세에는 이처럼 무기력하고 무능한 정부 때문에 조선왕조는 결국 망한 것이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날을 되돌아보는 것은 통렬한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기 위함이다. 지금처럼 정치인들이 국리민복과 부국강병은 내팽개친 채 집안싸움이나 하다가는 언제 또다시 내우외환과 국난의 위기를 불러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출처:서울경제]
'♣ 좋은 글 모음♣ > 역사, 정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만한 중국은 사라졌다 (0) | 2016.04.06 |
---|---|
하룻밤에 읽는 일본 군사사 -이재우/북랩 (0) | 2016.03.25 |
[박제균의 휴먼정치]한국, 美中의 ‘바둑돌’ (0) | 2016.02.26 |
[송호근 칼럼] 우수와 경칩 사이 (0) | 2016.02.23 |
[아일랜드 대기근 이야기] 검은 감자 (0) | 2016.0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