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이 ‘팍스 로마나’를 구가하던 시절에도 오리엔트 강국 파르티아는 골칫거리였다. 감히 로마에 도전해서가 아니었다. 파르티아와 인접한 아르메니아를 탐냈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는 ‘로마 제국의 우산’ 아래 놓인 나라. 아르메니아가 침탈당할 때마다 로마 군단은 원정을 떠났다. 동쪽 변방의 작은 나라 아르메니아가 소중해서가 아니다. 아르메니아가 무너지면 인접국에도 파장을 미쳐 오리엔트의 질서가 무너지고, 결국 제국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제국의 안전이 최우선
수천 년이 지나도 제국의 생리는 바뀌지 않는다. 미국이 한국을 ‘제국의 우산’ 아래 넣은 이유도 마찬가지다. 많은 미국인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South Korea’가 소중해서가 아니다. 한국이 흔들리면 동북아 질서가 흔들려 마침내 미국의 안전을 위협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미국의 보수논객 로버트 캐플런은 전 세계 주둔 미군을 탐사해 지은 역저 ‘제국의 최전선(Imperial Grunts)’에서 “제국주의는 영광을 추구하기 위해서보다는 자국이 완전무결하게 안전해야 한다는 필요에 따라 추진된다”고 설파했다.
가공할 북핵과 미사일에는 눈 하나 깜짝 않던 중국이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의 한국 배치는 사활을 걸고 막으려는 것도 같은 이유다. 남북한은 자국의 안전에 위협이 될 수 없지만, 미국의 사드가 코앞까지 다가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중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강력한 대북 제재를 수용하는 대신, 미국이 사드 배치에 유연함을 보인 23일 미중 외교장관 회담은 한국의 처지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우리의 안전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는…. 아르메니아가 로마파와 파르티아파로 갈려 정쟁을 일삼았던 사실(史實)마저 친미파와 친중파로 나뉘어 치고받는 우리의 현실과 겹쳐 씁쓸하다.
대한민국 제1야당 대표라는 사람이 일개 국장급 주한 중국대사로부터 “한중 관계가 사드 배치 문제 때문에 순식간에 파괴될 수 있다”는 협박을 듣고도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리는 것이 우리의 격(格)이다. 중국 관영 환추시보는 16일 사설에서 ‘한국에 사드가 배치되면 국가적 독립성을 잃게 돼 대국의 게임에서 바둑돌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 관변학자들이 한국을 ‘미국의 바둑돌’이라고 폄훼해온 만큼 관영매체의 ‘바둑돌’ 운운에는 한국을 바라보는 중국 당국의 시각이 담겨 있다.
자기비하에 빠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우리도 그들의 시각에서 냉정하게 우리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미-중-일-러라는 강대국 사이에 끼여 영속해 나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지정학적인 운명이고, 이런 운명이 단시일에 한국이 세계 최빈국에서 10위권 국가로 발돋움하는 기반이 된 것도 사실이다. 우리의 국제정치적 좌표를 직시하고 힘을 모아야 할 위중한 시기다.
망국일에도 훈장 수여
한일 강제병합 조약이 체결된 1910년 8월 마지막 황제 순종은 나라를 팔아먹은 고관과 그 일족에게 집중적으로 훈장 수여를 했다. 을사오적인 이완용과 박제순을 비롯한 고관들과 이완용의 처, 황족과 상궁 등이 줄줄이 훈장을 받았다. 병합이 발표돼 대한제국 최후의 날이 된 8월 29일까지도 훈장 수여는 멈추지 않았다(‘제국의 황혼-대한제국 최후의 1년’). 안보 위기를 도외시한 채 총선을 앞두고 정쟁에만 매몰돼 있는 정치권이 훗날 어떤 평가를 받을지 두고 볼 일이다.
박제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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