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메모리얼 가든-반수연]
[오랜만에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을 만났다. 다룬 주제의 묵직함이 마음에 와 닿아서이다. 기교, 작법등에서는 흠 잡을 것이 없는 작품들이지만 다룬 주제가 너무 소소한 것들이라 이런 작품들을 시간 뺏겨가면서 읽어야[들어야]되는가 하는 의구심을 많이 들게 하는데 이 작품은 달랐다.
캐나다를 배경으로 죽음이 머지않은 한 노인이 자신이 묻힐 곳을 찾는 과정에서 만난 묘지 괸리인인 화자의 입을 통해 전달해주는 메시지는 우리 모두가 겪게 될 죽음의 문제, 거기에 필연적으로 딸리게 되는 자식, 고향 이야기가 곁들여저 묵직하게 전해져 온다.]
[통영출신 반수연(41·캐나다 밴쿠버)씨가 단편소설 ‘메모리얼 가든’으로 2005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메모리얼 가든’은 캐나다로 이민 가 장례 코디네이터 겸 묘지 세일즈맨을 하는 남자와 묏자리를 사러 온 노인 사이에 일어난 일을 차분하고 단련된 문장으로 풀어 낸 작품이다. 윤후명 심사위원은 “반씨의 소설은 이민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작품의 어조에 일관된 삶의 유랑의식은 보편적으로 읽힌다”며 “서사구조 속에 삶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새길 줄 아는 능숙함도 있다”고 평했다. 최윤 심사위원 역시 “여러 작품에 양념처럼 들어간 섹스도, 음식도, 갑작스런 파국도 없다. 손쉬운 기교도 사절한 이 작품을 수상작으로 뽑는 데 이의도 망설임도 없었다”며 “멀리 갈 준비가 된 신인의 탄생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반씨는 “불혹이라는 말을 세상에 제일 먼저 내어놓은 이는 어쩌면 제 유혹을 감당할 길 없어 미리 연막을 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십 년 전 극작가가 된 친구가 말했다. 뒤늦게 소설을 쓰기 시작한 나는 그 말에 참으로 위로를 받았다”며 “더 열심히 공부해 치열하게 쓰겠다”고 당선소감을 밝혔다. 또 “부족한 소설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 내게 소설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신 인터넷 창작캠프의 박영한 선생님과 캠프 동지들, 매일 퇴근해 오면 밥상보다 그날 쓴 글을 먼저 받아 읽어줘야 했던 남편 김태윤 목수 등 이 모두의 애정을 깊이 간직한다”고 덧붙였다. 반수연씨는 1965년 경남 통영에서 출생, 충렬초교와 충렬여중 통영여고를 거쳐 1988년 부산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졸업했다. 남편 김태윤(통영고 38기)씨와 1남1녀를 두고 있으며 1998년 캐나다 밴쿠버로 이민가 생활하고 있다.[김영화기자 hannews@chol.com]
[작품 전문]
[메모리얼 가든-반수연 ]
“갈비집인가 봐? 가든이라는 걸 보니….”
식당 일을 찾던 아내가 반색을 하며 들고 온 신문의 구인란엔 이렇게 씌어 있었다.
< 구인>
저희 메모리얼 가든에서는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싱그러운 자연을 벗 삼아 성실히 일하실 분을 구합니다. 이중 언어 사용자 우대. 이력서 송부 요망.
오 개월 전에 캐나다의 P시에 이민을 온 이래로 나는 전자메일과 팩스를 이용해 사십여 군데에 이력서를 보낸 바 있었고, 그때까지 단 한 군데에서도 답신을 받지 못한 상태라 몹시 초조해하던 중이었다. 싱그러운 자연을 마다할 사람이야 없겠지만 그 즈음 나는 기관지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작업 환경이 중요했고, 영어를 좀 한다는 것이 유일한 특기였으므로 망설임 없이 이력서를 보냈다. 이틀 후에 인터뷰를 하러 가서야 ‘메모리얼 가든’이 무엇을 하는 곳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잠시 고민을 했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내겐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나는 ‘메모리얼 가든’의 한국인 담당 ‘장례 코디네이터 겸 묘지 세일즈맨’이 되었다.
‘메모리얼 가든’은 입구 쪽으로 영결식장, 사무실, 화장장, 시체 처리 보존실, 예배실이 있고 안쪽으로 낮은 능선을 끼고 사십만 평 규모에 만여 개의 묘지가 봉우리 없이 평평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묘지들 사이로 침엽수와 활엽수들이 조화를 이루며 잘 손질되어 있고 군데군데 휴식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아름답고 품위 있는 정원 같았다. 그래서인지 매일 아침 공원묘지에는 산책을 하는 사람들과 조깅을 하는 사람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안개가 짙은 날씨였다. 나는 입구에 있는 주차장으로 들어가지 않고 묘지 쪽으로 차를 몰았다. 늘 하던 대로 묘지부터 한 바퀴 돌아볼 심산이었다. 늦가을 단풍잎들이 속절없이 휘날려 안개와 뒤섞였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디가 하늘인지 어디가 땅인지 분간조차 어려웠다. 지독한 안개였다. 일 년에 한두 번 이런 날에는 화장(火葬)한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해 살을 태우는 냄새가 공원묘지를 음산하게 뒤덮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상처럼, 공원묘지의 무덤도 소수 민족들끼리 군데군데 모여 있는데 입구 쪽에 위치한 중국인과 일본인 묘지들이 그중 규모가 큰 편이었다. 한국인의 묘지인 ‘망향의 동산’은 뒤늦게 만들어져 서남쪽 끄트머리쯤에 자?構?있었다. 나는 ‘망향의 동산’ 앞에 차를 세우고 혹시라도 간밤에 파손된 묘지가 없는가를 먼저 살폈다. 그날 묘지를 보기 위해 방문하기로 한 고객들이 세 명, 그들에게 소개할 마땅한 자리도 미리 봐 두어야 했다. 묘지는 몇 개 남아 있지 않았다. 묘지 값이 오를 것이라는 소문이 나자 죽음을 의식하기 시작한 노인들뿐만 아니라 여유가 있는 중년들도 묘지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아파트처럼 묘지도 투기를 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굿 모닝, 미스터 정. 왔는가.”
안개 속에서 불쑥 박 노인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박 노인은 아침부터 중절모에 양복 차림이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처럼 내 앞에 서 있었다.
“영감님, 아침부터 웬일이세요?”
나는 도둑질을 하다가 들킨 사람마냥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벼르고 벼르던 계약을 마침내 끝내고 돌아간 노인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노인의 양미간에 두 개의 세로 주름이 그어졌다. 표정이 심상치 않다. 그때까지 노인은 열 번도 넘게 나를 찾아왔었고, 올 때마다 구실을 잡아 나를 물고 늘어졌기 때문에 그 즈음 나는 박 노인의 목소리만 들어도 노이로제가 생길 지경이었다.
“내가 말이야. 미국에 아들이 있어요. 뉴욕 월스트리트에 아들놈이 있지. 아들이 잘되었어. 아주 잘되었지. 콜롬비아 유니버서티에서 마스터 디그리했고, 지금은 스탁 브로커야.”
처음 박 노인이 나를 찾아 왔을 때 밑도 끝도 없이 먼저 끄집어낸 말은 아들 이야기였다. 혼자서 이런 일을 보러 다니는 노인들이 업신여김당할 것을 염려해 뒷배를 장황하게 풀어놓는 것이야 늘 있는 일이었고 이해 못할 바도 아니었다. 박노인은 장장 한 시간을 아들의 이력과 성공에 대해 늘어놓았다. 나는 지루했지만 묘지 사러 오셨어요? 하고 먼저 묻지 못했다. 대신 뜨거운 녹차를 내어 주며 본론이 나올 때까지 예의 바르게 기다렸다. 장한 아드님 두셨군요, 얼마나 보람이 있으세요, 그래. 간혹 맞장구도 쳤다. 하지만 노인은 끝내 묘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끄집어내지 않고 한인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는 명석하고 잘난 아들 이야기만 늘어지게 하다가 약속이 있다며 낡은 일본 소형차에 올라타고 돌아가 버렸다. 나는 깍듯이 인사를 하며 배웅을 했지만 그 엉뚱한 노인네에게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박 노인은 일주일쯤 후에 다시 나타났다.
“아들이 미국으로 오라고 그래. 그래도 내가 가서 뭘 하겠어? 용돈만 두둑이 보내주라고 말했지…. 손자 녀석들 생각하면 가고 싶기는 해도, 늙으면 친구가 필요해. 주치의도 여기 있고.”
간간이 걸려오는 상담 전화를 받고, 시에 제출할 사망신고 서류를 만들며 가끔씩 노인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 이야기가 어느 정도 끝나는가 싶었더니 노인의 이민사가 나왔다.
“내가 박정희 정권 때 이민을 왔어. 그러니까 내가 여기 있는 동안 대통령이 다섯 번 바뀌었지…. 자넨 이민 오기 전에 뭘 했나? 영어 선생? 반갑구먼. 나도 선생질을 했었네. 그래도 여기선 바닥부터 새로 해야지 암만. 자네도 이런 일 한다고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네. 이 나라에서 누가 자네한테 영어를 배우겠나. 잘 생각했어. 사람들은 어디서든 죽으니까…. 애들 공부시킬 때 고생한 건 말도 못해. 그래도 그게 또 보람 아닌가. 자녀는 몇이나 두었는가? ….”
“할머니는 살아 계신가요?”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박 노인의 사정이야 어찌됐든 더 이상 충고도 하소연도 아닌 이야기로 마냥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반적으로 묘지를 살 때, 부부의 묏자리를 같이 사기 때문에 마땅한 자리를 물색하려면 내게도 기본적인 정보가 필요했다. 이십 년 전에 갔어, 야단맞은 아이처럼 노인의 표정이 일순 시무룩하게 변했다.
박 노인이 묘지를 계약한 것은 그 다음으로도 예닐곱 번은 더 오고 나서였다. 묏자리도 구두로 실컷 약속을 하고 돈을 가져다주기로 한 날이 되면 방향이 안 맞네, 나무 그늘이 지네, 나무뿌리가 관을 뚫겠네, 배수가 마땅치 않네, 이 자리는 너무 비싸네, 하며 하룻밤 사이에 말을 싹 바꾸어 버리기가 예사였다. 전날 정식으로 사인을 하고 수표로 결제를 하기까지 박 노인에게 묘지를 파는 과정은 내겐 이른바 고난의 여정이었다. 나는 잔뜩 긴장을 하고 노인을 쳐다보았다.
“망향의 동산에 웬 중국 놈이 있어? 어제는 못 봤었는데 오늘 자세히 보니 이거 중국 놈 거네.”
노인은 지팡이를 들어 한국말로 쓰인 묘비들 사이에 생뚱맞게 자리하고 있는 王씨 성을 가진 중국인의 묘비를 가리키며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애당초 ‘망향의 동산’에 조성된 이백삼십 개의 묘지는 한국인들에게만 팔기로 계획되었지만 중국인이 막무가내로 그 자리를 탐내니 팔지 않을 도리가 없었노라고 나는 여러 차례 노인에게 말했었다.
“아니, 영감님. 어제 계약할 때도 말씀 드렸잖아요. 중국인 묘지가 두 개 있다구요.”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그랴? 난 처음 듣는구먼. 망향의 동산이면 다 같이 한국 사람이어야지 중국 놈이 들어오긴 왜 들어와. 게네들하고 우리하고 고향이 같아, 뭐가 같아? 게다가 내 자리 옆에 옆에구만. 중국말로 씨부렁거리면 속 시끄러워서 어떻게 누워 있으라고.”
“아이쿠, 영감님도. 저기 저 묘지들 좀 보세요. 백인, 흑인, 베트남, 필리핀, 수십 개 나라 사람들이 다 섞여 있잖아요. 캐나다 공원묘지에서 땅을 사면서 외국인들은 싫다 하시면 말이 안 되죠.”
“한번 묻히면 끝인데 그걸 이렇게 얼떨결에 정할 수는 없네. 바꿔주게나. 내 다시 찾아봄세. 간밤에 꿈자리도 뒤숭숭하고 말이야.”
노인은 생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집을 산다 해도 이보다 더할 것 같지는 않았다. 노인이 이 묘지를 둘러본 것만도 이미 여러 번, 그때마다 내게 주변 묘지 주인들의 사연을 묻기도 하고, 애달픈 사연이라도 들었을라치면 혀를 끌끌 차며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비석을 쓰다듬기도 했었다. ‘망향의 동산’은 태평양을 바라보고 있으니 곧장 가면 한국의 동해 어디쯤 닿을 것이라고 내가 말했을 때 노인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내가 태어나긴 이북 청진에서 났지’라고 했다. 노인은 이사 갈 동네의 인심을 알아보는 것보다 더 면밀히 묘지를 조사했다. 그랬던 노인이 묘지를 얼떨결에 샀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박 노인과 실랑이를 벌이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한산했던 입구 쪽이 벌써 붐비기 시작했다. 주차장에도 빈곳이 없을 정도로 차들이 많아졌다. 터번을 쓴 인도 남자들이 많은 것을 보니 오전의 장례식은 인도인인 모양이었다. 이렇게 안개가 자욱한 날에 화장을 해야 한다니. 수습된 유해를 가지고 바라나시 성지의 갠지스 강으로 가기 위해서 인도인들은 거의 예외 없이 화장을 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살았든 그들의 현세의 삶은 바라나시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는 듯 보였다.
사무실 책상 위에 한복이 든 종이 가방이 놓여 있었다. 그 사이 김 할머니 유가족이 다녀간 모양이었다. 나는 그것을 들고 퓨너럴 디렉터(funeral director)인 데이비드에게로 갔다. 김 할머니의 영결식은 내일 오전으로 잡혀 있었다. 주말에 돌아가신 김 할머니의 장례는 서류작업이 늦어져 팔 일 동안이나 치러졌다. 이곳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지만 한국의 삼일장을 생각하던 유가족들은 절차가 길어지자 심하게 반발했다. 부고를 듣고 급히 한국에서 건너온 막내아들은 직장을 그렇게 오래 비워 둘 수 없다며 언성을 높였고, 시신을 보게 해 달라며 울부짖었고, 당신이 뭘 잘못 처리해서 이렇게 된 게 아니냐고 나를 원망했다. 나는 관청에서 허가가 떨어져야만 장례를 치를 수 있는 이 나라의 장례 절차를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설명하며 흥분한 상주들을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시신 처리실의 문을 두드리자 데이비드가 문을 열고 방문자를 직접 확인했다. 머리에는 비닐 캡을 쓰고, 하늘색 유니폼을 단정히 입은 데이비드가 기다리고 있었다며 나를 맞았다. 데이비드는 김 할머니에게도 자기와 같은 비닐 캡을 씌우고, 시신의 머리맡에 놓인 생전의 사진을 보며 눈썹을 그렸다.
“유가족들이 화장(化粧)을 진하지 않게 해 달라는데, 어때 상태는?”
“방부제 처리가 잘 되어서인지 상태는 좋아. 시신이 너무 검게 변하지도 않았고. 편안해 보이는데.”
시신을 인계받은 데이비드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시신을 알코올로 잘 닦아 살균을 하고 냉장 상태에서도 변하지 않게 몸의 몇 군데에 구멍을 뚫어 방부제를 투여하는 것이었다. 이곳에서는 좀체 시신을 냉동하지 않는다. 김 할머니의 몸은 가운 위로 다시 비닐이 덧씌워져 있어 출고를 앞둔 장난감 인형 같았다.
“할머니 젊었을 때, 미인이었겠어. 아주 고우셔.”
데이비드가 마치 잠든 사람을 깨우지 않으려는 듯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는 전문학교에서 이 년 동안 퓨너럴 디렉터 과정을 마치고도 오랜 실습기간을 거쳐 퓨너럴 디렉터가 되었다고 했다. 그는 노련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시신을 매만졌다.
“옷은? 영결식에 입을 옷 말이야.”
상주들 사이에서는 할머니의 마지막 옷에 대한 의견도 분분했다. 이곳에 오래 살았던 큰아들은 평소 어머니가 좋아하던 한복을 입히자 했고, 한국에서 장례를 치르기 위해 온 아들과 딸들은 수의도 입히지 않고 어떻게 어머니를 보내느냐고 울부짖었다. 이곳의 관례대로 관 뚜껑을 열고 영결식을 하려면 수의는 마땅한 옷이 아니었다. 수의는 반드시 죽은 사람이 입는 옷이고 살아 있을 때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며 이별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자칫 낯설고 무서운 느낌을 줄 수도 있었다.
“마치려면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릴까? 괜찮으면 지금 옷을 입혀 드리고 싶은데. 오후엔 손님들이 많이 예약되어 있거든.”
나는 가방에서 한복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한복을 입히는 일은 데이비드에게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도와줘야 했다.
“유가족들은 몇 시에 오기로 했어?”
데이비드가 볼터치로 시신의 얼굴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지워내며 말했다.
“한 삼십 분 남았네.”
“어때 너무 진한가?”
“잠든 것처럼 자연스럽군. 내 보기엔 좋은데 유가족 마음에 들어야지 뭐.”
시신을 덮고 있던 비닐과 가운을 벗겨냈다. 분칠로 화사해진 얼굴과는 달리 마른 장작처럼 뻣뻣한 몸엔 검버섯 같은 얼룩이 여기저기 피어 있었다. 속곳 위로 옥색 치마와 저고리를 입히고 옷고름을 매었다. 김 할머니의 주검 위로 노모의 얼굴이 스쳤다. 수속을 모두 마치고 비행기 표를 타고 나서야 노모에게 이민을 간다고 말했다. 나 죽으면 어쩌라고, 그리 먼 데서 나 죽으면 어찌 오려고. 낯선 삶에 대한 불안으로 착잡해진 아들을 앞에 두고 당신의 죽음부터 걱정하는 노모가 몹시 서운했다. 데이비드와 나는 시신을 양쪽으로 들고 갈색 가죽 베드로 옮겼다. 시신은 짚으로 만든 것처럼 가벼웠다. 얇은 이불을 덮어주고, 베드 주위로 화환을 놓고 양쪽으로 큰 촛불 두 개를 밝혔다. 화장과 염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상주들이 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비닐장갑과 캡을 휴지통에 벗어 던지고, 가운을 벗어 세탁함에 넣은 후 담배 한 대를 빼내 물었다. 불꽃이 뻘겋게 달아오르도록 담배를 깊이 한 모금 빨아 당기더니 긴 숨과 함께 연기를 뱉어냈다. 불꽃 위로 회색의 재가 아슬아슬하게 매달렸다.
박 노인이 다시 나를 찾아온 것은 묏자리를 바꾸어 달라고 실랑이를 벌인 후 두 달 만이었다. 그날은 포클레인 기사들이 묘지를 파고 있었는데 때마침 내린 함박눈이 시야를 가려 애를 먹었다. 나는 한 평 간격으로 다닥다닥 붙은 다른 묘지에 손상이라도 갈까 그 광경을 염려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박노인은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에는 가방을 들고 비치적비치적 눈길을 걸어왔다.
“또 마음이 바뀐 건 아니지요? 이젠 어쩔 수 없어요. 계약서에 사인 끝나고 나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정히 싫으시면 할아버지가 다른 사람에게 직접 팔고 다시 사시든지. 반품은 안 돼요.”
나는 이 성가신 노인에게 어지간히 지쳐 있었기 때문에 먼저 못을 박았다. 노인은 퀭한 눈으로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아무 말 없이 녹차를 마셨다. 무슨 병이 들었는지 노인의 얼굴이 눈에 띠게 축이 나 있었다. 사무실의 온기 때문에 노인의 안경알에 뿌옇게 김이 서렸다. 노인은 안경을 닦을 생각도 않고 가방을 가슴에 안은 채 불편한 자세로 차를 마셨다. 노인의 회갈색의 모직 코트 위에는 눈이 축축하게 녹고 있어 몹시 추워 보였다. 모서리가 뒤집힌 모직 코트에는 수십 년은 지난 것 같은 양복점 라벨이 금박 테두리를 두르고 붙어 있었다. 녹차를 다 마신 후에야 박 노인은 가방을 열어 나무 박스를 꺼내고 말문을 열었다.
“한 달 전에 양로원으로 들어갔네. 이것 좀 맡아주시게.”
“그게 뭔가요?”
“내 안사람일세. 나 죽고 나면 나랑 같이 묻어주게.”
노인은 옷 가방 하나 맡기는 것처럼 무덤덤하게 말했지만 나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녹차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럼 그 상자 안에 든 것이?”
“내 안사람 뼛가루일세. 그동안 벽장 속에 두었던 걸세. 그 사람 저 세상으로 갔을 때는 애들 한창 공부할 때라 묏자리 살 돈도 없었어. 그렇다고 아무 데나 던져 버릴 수도 없는 노릇. 지금에 와서 애들한테 보내기도 그렇고.”
나는 정신을 차리고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이 상황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나는 박 노인에게 묘지를 판 세일즈맨이다. 내가 이 일을 하고 있는 동안 노인이 죽는다면 내 업무의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해 노인의 장례를 치러 줄 것이다. 그러나 박 노인 아내의 유해는 이야기가 다르다. 이런 것은 뉴욕 증권가에서 잘나가고 있다는 아들에게나 내려야 할 지시사항이지 나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무엇 때문인지 강력하게 거절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노인이 지팡이를 쥔 손을 어찌나 덜덜 떨고 있는지 가뜩이나 어지러운 머릿속이 더 산만해졌다. 나는 충격을 덜 주면서 거절하는 방법을 생각하느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휴, 그러셨군요.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일단 제가 알았으니 영감님 돌아가시면 자제 분들이랑 의논해서 책임지고 처리하겠습니다. 여기엔 둘 수 없으니 일단 영감님 방에 도로 가져다 두세요.”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절충안을 들이댔다.
“묘지 말고 미리 사 둘 수 있는 것들이 뭐가 있소?”
박 노인은 내 절충안을 듣는 둥 마는 둥 슬며시 세일즈맨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관이랑 장례비용도 미리 지불해 둘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논스톱 풀 서비스죠. 계약된 절차대로 장례가 치러지기 때문에 갑자기 돌아가셔도 전혀 문제 될 게 없습니다. 예, 저희가 다 알아서 해 드립니다. 여긴 한국처럼 부조금이 있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이 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하지요. 관을 사 두시는 건 정말 잘 생각하신 겁니다. 본인의 장례를 본인의 의도대로 차분히 준비하는 것은 삶을 성공적으로 마감하는 의미 있는 일이죠. 웬만한 관이라면 사천 불 정도면 살 수 있어요.”
내관의 보호를 위해 필수적으로 설치하게 되어 있는 콘크리트 외관을 만들고, 방수를 위해 그 위로 스틸이나 플라스틱 처리를 하고, 내관으로 동관 정도를 하려면 관의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묘지의 가격과 맞먹는 돈이었다. 나는 이 깐깐하고 변덕스러운 노인네가 또 무슨 트집을 잡을지 숨을 죽이고 반응을 기다렸다. 의외로 노인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박 노인은 관뿐만 아니라 장례비용까지 지불을 하고 갔다. 관을 선택하고, 장례절차를 의논할 때는 묘지를 살 때처럼 까다롭지 않았다. 나는 불안과 안도가 교차하는 묘한 심정으로 노인을 안내했지만 오히려 노인은 오래 생각해 온 듯, 부고의 초안에서 묘비명까지 일사천리로 처리했다. 이제 서류는 거의 완벽하게 갖추어졌다. 단 하나 비어 있는 난은 사망일자뿐이었다.
병실처럼 복도 양쪽으로 길게 줄지어 있는 방들을 통과해 막다른 벽 오른편에서 주소에 적힌 박 노인의 방을 찾았다. 박 노인이 나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은근슬쩍 유해를 내맡기고 가버린 후, 나는 매우 난감했다. 처음에 나는 가방을 사무실의 캐비닛 구석에 넣어 두었다. 비록 수천 개의 무덤과 납골당이 있는 공원묘지에서 일을 한다 하더라도 사무실에까지 유해를 둔다는 것은 사뭇 그 느낌이 달랐다. 아무도 그곳에 유해가 있다는 것을 몰랐지만 나는 사람들이 왔다가고 나면 캐비닛을 열어 가방을 확인했다. 유해를 두었다는 사실을 의식하자 혼자 있을 때도 나는 자유롭지 못했다. 무엇보다 사무실 규정을 크게 어기는 일이었다. 고민 끝에 가방을 차로 가지고 갔다. 어지럽게 널려 있는 낚싯대와 골프채를 대강 한쪽으로 치우고 가방을 넣었다. 생각할수록 괘씸한 영감이었다. 유해를 자동차 트렁크에 두자, 그것 또한 이만저만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한 시간에 한 대꼴로 차를 도둑맞는 동네에서 누가 차를 훔쳐가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할지가 제일 걱정이었다. 또한 커브 길을 운전할 때나 오르막 내리막길을 운전할 때도 가방이 한쪽으로 쏠려 넘어지거나 파손이 되면 어떡하나 시시각각 신경이 곤두섰다. 그렇다고 집에 들고 갈 수도 없었다. 한창 공부할 나이의 아들이 남의 뼛가루나 들고 다니는 아비에게 느낄 이물감을 생각하자 몸서리가 쳐졌다. 일주일을 버티다가 나는 가방을 박 노인에게 되돌려주기로 했다.
“영감님, 접니다. 미스터 정입니다.”
두어 번 노크를 해도 기척이 없어 손잡이를 돌려 보았다. 미끄럽게 돌아갔다. 방에는 일인용 침대 하나와 식사를 하거나 책을 볼 수 있는 작은 테이블이 벽 쪽으로 붙어 있을 뿐, 다른 가구는 없었다. 나는 선뜻 방으로 발을 내딛지 못하고 다시 한 번 노인을 불렀다. 역시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들고 간 가방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침대와 탁자 사이를 서성거렸다. 노인의 칠십 년 인생에서 남아 있는 것은 몇 장의 사진뿐이란 듯, 황량해 보이는 방과는 달리 탁자 위에는 스무 개가 넘는 사진액자가 있었다. 한국인 여자와 백인 남자, 혼혈로 보이는 두 명의 딸아이가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다. 멕시코에서 의료봉사를 한다는 딸의 가족인 모양이었다. 그 사진 옆으로는 사각모자를 쓴 준수한 청년과 아직 늙지 않은 박 노인이 함께 찍은 사진도 있었다. 내게도 그와 비슷한 사진이 있다. 대학 졸업식 때 아버지에게 가운을 입히고 사각모자를 씌우고 아버지와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다. 사 년 동안 뒷바라지를 해 준 보답이랍시고 그땐 누구나 그렇게 했다. 그 사진은 이민을 올 때까지 고향집 마루에 걸려 있었다.
나는 서성이다, 침대에 걸터앉았다. 날은 어스레해졌다. 골치 아픈 노인네와 부딪쳐서 실랑이를 벌이느니 그냥 가방을 두고 가는 것이 나을 것 같기도 했다. 노인이 아내의 유해를 어떻게 하든 그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굳히며 방을 빠져나왔다. 몇 걸음 걷다가, 복도에 멈춰 섰다. 한마디 말도 없이 탁자에 내동댕이치듯 유해를 두고 나오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나는 방으로 돌아갔다.
마냥 방에서 기다릴 것이 아니라 노인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러고도 삼십 분쯤 더 지난 후였다. 나는 가방을 들고 아래층의 휴게실로 내려갔다. 입구 쪽에서는 한 무리의 서양 노인들이 합주를 하고 있었다. 머리를 덜덜 떨면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 할머니, 휠체어에 앉아 바이올린을 켜는 할아버지, 숨이 가쁜지 쌕쌕거리며 색소폰과 하모니카를 부는 늙은이들. 휴게실 다른 쪽에서도 노인들은 블록을 하든지, 체스를 하며 예민한 아가씨들처럼 자기네들끼리 무리 지어 놀고 있었다.
창가 쪽 테이블에서 다른 한국 노인들과 함께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 박 노인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나는 박 노인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얹으며 노인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아이구, 박 영감 아들인가 봐. 미국에 산다는 아들이 왔는가 보네. 영감하고 똑 닮았네, 그려.”
귀가 몹시 어두워 보이는 할머니가 손뼉을 치며 좋아라 했다. 박 노인은 나를 보자 아무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앞장을 섰다. 나는 구부정하게 굽은 등에 갈고리 같은 손으로 카드를 든 노인들에게 명함을 한 장씩 돌리고 박 노인을 뒤따랐다.
“영감님, 이건 도저히 제가 못 가지고 있겠어요. 집에 둘 수도 없고, 사무실에 둘 수도 없고….”
나는 가방을 노인 쪽으로 내밀어 보이며 말했다.
“에라 이 나쁜 놈! 넌 그 정도의 책임감도 없이 내게 묘지를 팔았더냐.”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에 박 노인이 갑자기 지팡이를 들어 내 정강이를 내려쳤다. 영감님! 다리를 움켜쥐며 소리를 치자 주위에 있던 노인들이 내게 경계의 눈빛을 보내며 모여들었다. 나는 일단 박 노인의 마음을 수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고요, 영감님. 일단 방에 올라가서 이야기합시다. 제 입장도 좀 생각해 주셔야지요.”
“아무 걱정 말라며 묘지를 팔아먹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발뺌이야. 그럼 나 죽고 나서 아무도 이걸 거두지 않으면 어떡할 거야? 자네가 책임진다지 않았나?”
휠체어를 타고 온 노인, 보조기에 의지해 걷는 노인, 지팡이를 든 노인들로 둘러싸인 나는 가만히 있어도 졸지에 가해자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박 노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거칠지 않게 보이려 애쓰며 엘리베이터로 이끌었다. 방으로 들어선 노인은 내게 한마디 말도 없이 텔레비전만 주시했다. 나는 이 용렬한 노인네가 잡아끄는 수령으로 빠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문 앞에 서 있었다.
“영감님, 제가 영감님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든 이것을 수습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정말이지 마땅히 둘 데가 없어요. 아예 납골당을 사서 따로 모시든지….”
노인은 그제야 나를 돌아보았다. 뜻밖에 노인의 얼굴엔 독기라곤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내가 외로울 것 같아서 그래. 젊은이, 아니 미스터 정, 내 사정 좀 봐 주소.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데 마누라라도 옆에 있어야지. 안 그러면 내가 너무 외롭지 않겠소? 내 죽으면 내 몸뚱이를 책임지겠다는 자네 말고 이제 와서 누굴 믿겠나. 큰 은공 베푸는 요량 치고 이것 좀 해결해 주소. 제발 젊은이.”
노인은 방법을 바꿨는지 아예 읍소를 하고 나섰다. 방은 어두웠다. 텔레비전을 등지고 앉은 영감의 실루엣은 더 검게 보였다. 이십 년이 넘도록 아내의 유해를 묻지도 뿌리지도 않은 노인이 괴물 같았다. 노인은 남아 있는 삶을 어떻게 죽을까만 연구하고 보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삶은 노인의 죽음 앞에 오래 머무를 만큼 녹록지 못했다. 나는 해야 할 일이 많았고, 어떡하든 이 땅에서 살아내야 했다. 나는 노인이 그것을 이해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가방을 방안으로 밀어 넣고 뛰듯이 양로원을 빠져나왔다.
양로원 직원에게 전화를 받은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지난겨울 그 일이 있은 뒤 박노인은 한 번도 내게 연락을 하거나 찾아오지 않았다. 중학생이 된 아들의 공부를 봐주고 침실로 들어오니, 밤까지 식당 일을 하고 온 아내는 옅게 코를 골고 잠들어 있었다. 샤워를 하고 때마침 시작하는 열한 시 뉴스의 헤드라인을 듣고 있었다. 그때 벨이 울렸다. 밤늦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는 순식간에 사지를 움츠리게 했다. 전화기를 향해 손을 뻗는 사이에 고향의 부모님 얼굴과 전날 밤 심란했던 꿈도 언뜻 스쳐갔다. 나는 소리를 낮추어 여보세요? 했다. 되돌아오는 소리는 헬로우, 캔 아이 스피크 투 미스터 정?(Can I speak to Mr. Jung?)이었다.
양로원의 서류에는 사망 후 핫라인이 순서대로 적혀 있는데 그 일 순위가 나였다는 것이다. 중년의 여자인 듯한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밝고 경쾌해 한밤중에 죽음을 알리는 음성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지금 올 수 있나요? 망자를 되도록 빨리 옮겼으면 좋겠다는 것이 저희 양로원의 입장이에요.”
“사망 시간이 언제인가요?”
“오 분 전쯤이에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저희 규정상 사망 후엔 한시도 여기에 둘 수 없습니다.”
밤중에 사무실로 나온 나는 운반 팀에게 연락을 취해 양로원으로 보내고 컴퓨터를 두드려 박 노인의 유가족 연락처를 찾았다. 컴퓨터에 저장된 연락처에는 멕시코에 산다는 딸의 전화번호밖에 없었다. 뉴욕에 산다는 아들의 전화번호를 찾기 위해 서류철을 뒤졌다. 그러나 그곳에도 역시 아들의 전화번호는 없었다. 나는 급한 김에 딸에게 먼저 연락을 취했다.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듯해서 영어로 통화를 했다. 딸은 잠시 숨을 흡, 하고 멈추더니 곧 냉정을 되찾았다. 딸은 비행기를 세 번 갈아타야 하기 때문에 아무리 서둘러도 이틀은 걸릴 것이라고 했다. 나는 ‘메모리얼 가든’ 주소를 불러 주었다.
“오빠가 계시다고 들었는데요. 오빠 연락처가 없군요. 혹시 힘드시면 제가 전화를 드리죠.”
나는 유가족의 심정을 헤아려 최대한 따뜻한 목소리로 말하려 애썼다.
“괜찮아요. 오빠에겐 제가 연락하죠. 그럼 사무실에서 뵙겠습니다.”
하고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다음 날 나는 신문사로 부고의 초안을 넘기고, 박 노인이 연락해 주기를 희망했던 친구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넣었다. 개중엔 벌써 저세상으로 떠난 친구도 있고 연락이 안 되는 친구도 있었다. 노인의 딸은 이틀 후에 왔다. 남편도 딸도 없이 혼자 왔다. 왜 혼자 왔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는 영결식 때만 조문객을 받기 때문에 따로 상가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장례 절차는 노인이 미리 정한 대로 진행되었다.
“아버님이 계셨던 양로원에는 가 보셨나요?”
남아 있는 유품들은 일반적으로 직계 가족이 챙기기 때문에 나는 박 노인의 딸에게 의례적으로 물었다. 그때였다. 순간 방망이로 뒤통수를 후려치는 듯, 노인과의 약속이 떠올랐다. 나는 박 노인의 딸을 이끌고 급히 양로원으로 향했다. 사망 후 양로원을 방문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내 소관이 아니었기 때문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급해졌다. 몇 개의 신호등을 무시하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박 노인 아내의 유해는 다행히 망자의 소지품을 모아 놓은 창고에서 찾을 수 있었다. 딸은 유품들을 손으로 만져보며 그제야 오열했다. 딸의 울음소리를 듣자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유해를 새삼스레 소중히 안고 양로원을 걸어 나왔다. 딸은 유품들 속에서 사진 몇 개와 유서로 보이는 편지 두 통을 찾아 들었다.
“오빠는 아직 도착을 안 했더군요. 연락이 늦게 닿았나 보군요.”
나는 박노인 아내의 유해를 딸의 손에 건네주며 물었다.
“오빠는 오지 않을 거예요. 여기저기 연락을 취했지만 소식이 없군요.”
“오빠가 뉴욕 증권가에 계시지 않나요? 박 노인이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아버지가요? 뜻밖이군요. 삼 년씩이나 연락이 없는 미친 마약 중독자 이야기를 하셨다니 말이에요.”
한땐 촉망받는 수재이긴 했지요. 지금은 아버지가 죽은 줄도 모르는 불행한 천재일 뿐이지만. 딸의 목소리가 흡수되지 못하고 차 안을 뱅뱅 돌았다. 나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삭이기 위해 자동차의 시디플레이어를 누르고 음악을 틀었다. 설명되지 않는 묘한 감정에 짓눌려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안개가 두터운 솜이불처럼 무겁게 공원묘지를 짓누르고 있었다. 박 노인의 영결식은 차분하고 간단하게 끝났다. 이국에 와서 벗이 된 망자의 친구 몇 명과 양로원 친구들, 그리고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러졌다. 박 노인은 종교가 없었지만 기독교인이 된 딸이 서양 목사님을 모셔와 망자의 명복을 염원했다. 친구들은 하얀 국화를 망자의 가슴에 얹고 잠시 관을 쓰다듬기도 했다.
박 노인이 그토록 까다롭게 정한 묘지를 왜 포기했는지 나는 잘 알 수 없었다. 수신인이 ‘메모리얼 가든 미스터 정’이라 적힌 편지 속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내가 원하는 곳은 움직일 수 없는 땅이 아니라, 흐르는 바다였네. 나와 내 아내의 유해를 태평양 바다에 뿌려주게. 흐르고 흘러 고향에도 가고 아들이 살고 있는 뉴욕에도 가고 싶다네. 내 묘지는 팔아서 양로원의 한국 친구들을 위해서 써주게. 부탁하네.
화장터 굴뚝에서는 회색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나는 화장장 앞 벤치에 앉아 아들도 고향도 만나지 못하고 죽은 박 노인이 연기가 되고 재가 되는 것을 바라보았다. 연기는 안개에 싸여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공원묘지 위로 내려앉았다. 새삼스레 땅속에 빽빽이 누운 자들의 존재가 선명히 느껴졌다. 누군가 자신의 재를 자기 집 벽난로에 부어 달라고 유언했다던 생각이 났다. 누군가는 자신의 유해를 애완견에게 먹여 달라고 했다 한다. 고향의 흙 한 줌 무덤 위에 덮어 달라는 말로 수십 년 동안 돌아가지 못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대신 전하고, 이국에서의 삶을 마감했다는 어느 음악가도 생각났다.
묘지 위로 뿌리를 내린 나무에서 떨어뜨린 한 무더기의 단풍이 묘지를 수북이 덮고 있었다. 뿌리가 쉼 없이 관을 뚫을 동안 나뭇잎은 신록이 초록 되고 다시 단풍이 되어 떨어져 내렸다. 수많은 묘지들이 있었지만 주위의 것들과 비교해보면 비슷해 보여도 하나도 같은 게 없었다. 그들의 삶이 비슷해 보여도 하나도 같지 않았듯이 죽음 또한 그러했다. 흙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침묵이 돌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육지에서 삼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바다에만 유해를 뿌릴 수 있다는 법 조항을 박 노인의 딸에게 알려주기 위해 화장장을 향해 걸어갔다. 땅 위로 가라앉은 연기가 발에 밟힐 것만 같아 걸음이 휘청거렸다.
[출처:스토리 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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