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文學) 마당 ♣/- 우리 현대시

추일단장(秋日斷章) - 조지훈

Bawoo 2016. 9. 4. 20:16


추일단장(秋日斷章)


조지훈


1

갑자기
산봉우리가 치솟기에

창을 열고
고개를 든다.

깎아지른 돌벼랑이사
사철 한 모양

구름도 한 오리 없는
낙목한천(落木寒天)을

무어라 한나절
넋을 잃노.


2

마당 가장귀에
얇은 햇살이 내려앉을 때
장독대 위에
마른 바람이 맴돌 때

부엌 바닥에
북어 한 마리

마루 끝에
마시다 둔 술 한잔
뜰에 내려 영영(營營)히
일하는 개미를 보다가

돌아와 먼지 앉은
고서(古書)를 읽다가……


3

장미의 가지를
자르고
파초를 캐어 놓고
젊은 날의 안타까운
사랑과

소낙비처럼
스쳐간
격정의 세월을
잊어버리자.

가지 끝에 매어달린
붉은 감 하나

성숙의 보람에는
눈발이 묻어 온다.

팔짱 끼고
귀기울이는

개울
물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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