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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평대군/이요(李㴭) :일편어주도(一片漁舟圖)>화제시

Bawoo 2016. 11. 7. 21:06




<인평대군/이요(李㴭) - 일편어주도(一片漁舟圖)>


一片魚舟歸何處 한 조각 고깃배 어디로 가는가
家在江南黃葉邨 그대 집은 강남하고도 황엽촌이구려

이요(李㴭):조선 후기의 왕족 화가. 인조의 셋째 아들이자 효종의 동생으로 인평(麟坪)대군에 봉해졌다




[원문은 아래 소동파의 시 3,4구이다. 扁舟一櫂을 一片魚舟로 바꿔 썼다.]




書李世南所畵秋景 一 소동파(蘇東坡)




野水參差發漲痕(야수삼차발창흔) 들녘 물 들쑥날쑥 불었던 자취를 드러내고
疏林欹倒出霜根(소림의도출상근) 성근 가지 삐쭉빼쭉 서리에 뿌리를 드러냈네
扁舟一櫂歸何處(편주일도귀하처) 조각배 노 저어서 어디로 돌아가나
家在江南黃葉邨(가재강남황엽촌) 우리 집은 강남의 황엽촌에 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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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자료 1][출처:http://blog.naver.com/kalsanja/220703549219]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17세기 중기 인평대군 이요(李㴭)의 인물 산수도입니다.

선면(扇面)의 화폭에 갈대와 나무가 각각 한쪽에 배치되고 멀리 원산(遠山)이 보이는 강에서

조각배에 홀로 앉아 있는 절파화풍의 그림으로써 아마도 달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그림입니다.

이요(李㴭, 1622 ~ 1658)

 

조선중기 왕족출신의 화가.

조선 중기 때의 왕족.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요(㴭), 자는 용함(用涵, 호는 송계(松溪).

인조의 셋째 아들로서 효종의 동생으로 1630년 인평대군(麟坪大君)에 봉해졌다.

1640년 볼모로 심양(濬陽)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온 이후, 1650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시서화(詩書畫)를 잘하였을 뿐 아니라 제자백가에도 정통하였던 그는 1645년 소현세자

(昭顯世子)를 따라 내조(來朝) 하였다가 3년 뒤에 본국으로 돌아간 중국인 화가 맹영광

(孟永光)과 가깝게 지내기도 하였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은 희귀한 편으로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의 〈산수도〉, 홍성하(洪性夏)

소장의 〈노승하관도(老僧遐觀圖)〉, 정무묵(鄭無默) 소장의 〈고백도(古栢圖)〉 등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고백도〉는 섬세하고 꼼꼼한 필치로 다루어져 있어 맹영광의 공필법(工筆法)과 상통하는

바 크며, 〈산수도〉의 다소 거치른 필치 등은 절파풍(浙派風)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 이외에 《송계집》·《연행록(燕行錄)》·《산행록(山行錄)》의 저서를 남겼다.

 

 

[제화시의 원문과 해석]

 

一片魚舟歸何處(일편어주귀하처)   한 조각 고기 배 어디로 돌아가는가?

家在江南黃葉邨(가재강남황엽촌)   집은 강남에 있는 황엽촌인데...

 

松溪                                      송계

 

 

[시의 출전 및 원문과 내용]

 

이 시는 원래 중국 북송대 시인 소식(蘇軾 1036-1101)이 지은 「書李世南所畵秋景

(서이세남소화추경)」의 2수 중 첫 번째 시로써 원래의 시에 있는 ‘扁舟一棹(편주일도)’를

 ‘一片魚舟(일편어주)’ 로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書李世南所畵秋景 蘇軾            이세남이 그린 가을풍경에 글을 쓴다. 소식

野水參差落漲痕(야수참차락창흔)   들판의 물은 들쭉날쭉하게 흐른 자국을 남겼고

疎林欹倒出霜根(소림의도출상근)   메마른 숲은 쓰러질듯 하얀 뿌리가 드러났네.

扁舟一棹歸何處(편주일도귀하처)   작은 배 노 하나로 어디로 돌아가는가?

家在江南黄葉邨(가재강남황협촌)   집은 강남에 있는 황엽촌인데...

 

人間斤斧日創夷(인간근부일창이)   사람들은 도끼로 날마다 약탈하는데

誰見龍蛇百尺姿(수견룡사백척자)   비범한 사람의 백척 모습을 그 누가 보았을까?

不是溪山曾獨往(불시계산증독왕)   계곡과 산에는 일찍이 혼자 가는 게 아니니

何有解作挂猿枝(하유해작괘원지)   원숭이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줄 사람

                                                     누가 있을까?

 

* 李世南(이세남) : 소식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화가로 산수화를 잘 그렸다. 자는 당신(唐臣)이고 안숙(案肅,

                          지금의 하북성 서수현) 사람이다.

* 參差(참치) : 들쑥날쑥하여 가지런하지 못한 모양. 참치(參差)의 美란 정제미(整齊美)에 대한 상대 개념이다.

                    정제의 미란 비유하자면 <대칭으로 대표되는 미>이고, 참치의 미는 <비대칭으로 대표되는

                    미>라 할 수 있다.

                    정제미는 지적(知的)인 산물이며 만들어진 미이기 때문에 본시 부자연적인 것이다. 즉 정제미는

                    관념적 미이고 기하학적 미이며 인위적인 미이다. 여기에 대하여 參差치의 美는 자연스레

                    우러난 미이고 무위자연적(無爲自然的)인, 다시말하면 무작위적(無作爲的) 美이며 자연 발생적

                    미인 것이다.

* 漲痕(창흔) : 물이 불어난 흔적

* 欹倒(의도) : 곧 쓰러질 듯 기대 있는 모양. 비트적거리다, 비틀거리다, 비뚤비뚤하다

* 霜根(상근) : 서리같이 햐얀 뿌리. 흰 뿌리

* 斤斧(근부) : 도끼

* 創夷(창이) : 상처. ‘創痍’로도 쓴다. 약탈하다.

* 龍蛇(용사) : ①비범한 사람 ②영웅과 범부(凡夫) ③초서체에서 필세의 생동감 ④몸을 숨기다

* 不是(불시) : ① …이 아니다 ② (적당한 시기나 형편이) 아니다

* 何有(하유) : ① 무엇이 있는가 ② 어찌 있겠는가 ③ 무슨 어려움이 있는가 ④ 어렵지 않다

* 解作(해작) : 풀어 설명하다. 묘사하다. ~로 변화시키다[만들어내다]

 

소식(蘇軾, 1037년~1101년)

 

소식(蘇軾, 1037년~1101년)은 중국 북송 시대의 시인이자 문장가, 학자, 정치가이다.

자(字)는 자첨(子瞻)이고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였다. 흔히 소동파(蘇東坡)라고 부른다.

현 쓰촨 성 미산(眉山)현에서 태어났다. 시(詩),사(詞),부(賦),산문(散文) 등 모두에 능해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소동파는 송시의 성격을 확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대시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문장가였고, 중국 문학사상 처음으로 호방사(豪放詞)를 개척한 호방파의 대표 사인(詞人)이었다.

그는 또 북송사대가로 손꼽히는 유명 서예가이기도 했고, 문호주죽파(文湖州竹派)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중국 문인화풍을 확립한 뛰어난 화가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 천재 예술가요 못 하는 것이 없었던 팔방미인으로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천 년이 다 돼 가는 지금까지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중국문예사상

가장 걸출한 인물이다.

 

그는 송나라 때 저명한 문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소순(蘇洵)이었고, 그 아우도 소철(蘇轍)로 유명한 문인이다.

이 세 부자를 사람들은 삼소(三蘇)라고 불렀는데, 모두 당송팔대가로 손꼽혔다.

 

당송8대가의 하나인 구양수 문하에서 배웠으며, 22세에 과거에 급제 일찌감치 문재를 알렸다.

당시 북송(北宋)은 왕안석 등이 주창한 신법을 둘러싸고 당쟁이 확산될 시기였는데, 소동파는

신법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이를 구법당이라 하며, 구법당의 영수는 '자치통감'의 저자인

사마광이었다), 이로 인해 정치적인 부침을 거듭했다.

1079년에는 황주(호북성)로 유배를 갔지만 낙천적인 성격으로 6년간의 유배 생활을 무사히

끝냈다.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한림학사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1094년 다시 신법당이 득세하면서 혜주(광동성)으로 유배되었고, 3년 후인 1097년

중국 최남단인 해남도까지 귀양을 갔다.

당시 해남도는 주민 대부분이 소수민족인 여족으로 이루어진 미개척 섬이었고 소동파는

셋째아들 소과만을 데리고 갔다. 해남도에서도 소동파는 뛰어난 적응력을 발휘해 주민들의

인망을 얻었고 중앙의 명을 받고 살던 집에서 쫓겨났을 때에도 해남도 사람들의 도움으로

오두막을 지어 살 수 있었다.

이후 신법당을 지지했던 철종이 죽고 복권되었으나, 귀양길에서 돌아오는 도중 남경에서

6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소동파의 회화론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대나무를 그릴 때는 먼저 네 마음속에

대나무가 있어야 한다.' 이는 각 개인마다 지닌 대나무를 먼저 들여다봐야한다는 뜻으로

소동파가 생각하는 회화론의 특징에 대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소동파는 기본적으로 유교사상에 뿌리를 둔 현실참여주의자로서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구제해야 한다는 지식인으로서의 사명감이 매우 투철했다.

게다가 그는 워낙 다정다감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백성에 대한 연민의 정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에 대한 인간적 애정과 관심도 유난히 깊었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불교사상과 도교사상에서 비롯된 현실도피적 사고방식도 동시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물질세계의 허무성과 무가치성을 간파하고 물질세계 바깥에서 노닐려는 초월적

인생관도 지니고 있었으며, 그 결과로 자연을 매우 사랑했고 나아가 그 자신이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의 일부가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이처럼 세속적인 가치에 대하여 초연할 수 있었기에 그는 온갖 정치적 핍박 속에서

자신의 출중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해 보기는커녕 일생의 대부분을 유배 생활과 지방관 생활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긍정적인 태도로 삶에 임할 수 있었다.

 

소동파의 시는 송(宋)나라 때부터 중국은 물론 고려나 요(遼)나라 같은 이웃 나라에까지도

널리 알려져 있었던 만큼 독자의 수요에 부응하여 그의 시집 역시 송나라 때부터 시작하여

줄곧 간행되어 왔으며, 이 가운데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도 아주 많다.

 

소동파(蘇東坡, 1036~1101)가 우리 문단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했다.

그러기에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세상의 학자들이 처음에는 과거시험에 필요한 문체를

익히느라 풍월을 일삼을 겨를이 없다가 과거에 급제하고 나서 시 짓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면

소동파 시 읽기를 무척이나 좋아하기 때문에 매년 과거의 방이 나붙은 뒤에 사람마다 금년에

또 서른 명의 소동파가 나왔다고 여긴다”라고 했고,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까지는 오로지 만당(晩唐) 시만 익혔고 고려 중엽에는 오로지 소동파 시만

배웠다”라고 했다.

김부식(金富軾, 1075~1151)과 동생 김부철(金富轍)의 이름이 소동파(본명 軾)와 소철(蘇轍)

형제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소동파에 대한 우리 문인들의 추앙심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하겠다. 이렇듯 우리의 선조들은 소동파 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시문집으로는 동파칠집(東坡七集)이 있고, 수필집으로는 「答謝民師論文帖」, 「祭黃幾道文」,

「전적벽부(前赤壁賦)」, 「黃州寒食詩帖」, 「題西林壁」, 「飲湖上初晴後雨」 등이 있고,

그림으로는 아래와 「행목괴석도(枯木怪石圖)」, 「죽석도(竹石圖)」같은 것들이 있다.

 

 

[느낀점]

 

인조의 셋째아들인 인평대군 이요(李㴭)의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는 선면 산수도입니다.

화질이 썩 좋지 않아 확정할 수 없으나 아마도 비단바탕에 수묵으로 그려진 견본수묵화라고

판단됩니다.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선면 산수화중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인정되고 있는 이 작품의

작자 이요(李㴭)는 1936년 발생한 병자호란에서 이듬해인 1937년에 조정이 항복하자

항복조건에 의해 두 왕자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뒤를 따라 1640년 볼모로 심양(瀋陽)에

갔다온 인물입니다.

이듬해인 1941년 국내에 돌아온 이후 중국 사정에 밝다고 해 전후 네 번에 걸쳐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는데 심양에 있을 때부터 강남출신 중국화가 맹영광과 친하게 지내게 되어

당시 새로운 중국화 바람을 조선에 전하는 한 계기가 되었는데, 부채 그림도 그 중 하나로

보여집니다.

따라서 현재까지 알려진 국내 작가에 의한 부채 그림은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써 윤두서,

정선, 강세황으로 이어지는 선면화의 효시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림은 잔잔하고 고요한 강에 작은 배 하나에 사람이 한 사람 터고 있는데, 화면이 자세하지

못해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으나 배에 있는 노는 잡지 않고 손을 놓은 채 유유자적 하고

있는 모습으로써 화법은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였던 절파적 기법과 남종화법이 적극 수용되어

표현된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한편 그림의 상단 여백에는 칠언절구의 한시 중 한 소절이 적혀 있는데, 이는 북송 때 시인

소동파가 지은 시 두수 중 하나의 시에서 차용하였는데, 소동파가 1088년 53세의 나이로

북송의 수도 변경에서 한림학사로 있을 때 화가 이세남도 수도에 같이 있었는데 이세남이

그린 「추경평원도(秋景平原圖)」를 보고 지은 두수 중 하나가 바로 이 시입니다.

 

소동파의 원시에서 ‘扁舟一棹歸何處(편주일도귀하처) 家在江南黄葉邨(가재강남황협촌) 작은

배에 노 하나로 어디로 돌아가는가? 집은 강남에 있는 황엽촌인데...‘라 하였는데, 인평대군이

표현한 작품도 또한 소동파의 시를 그대로 그림으로 제대로 표현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소동파는 일찍이 문과에 등용되어 관직에 나아갔으나 당시 정치적 갈등에 의해 비주류로써

많은 박해를 받아 일생을 유배생활과 지방관 생활로 점철되었는데, 이와 같은 정서적 환경이

그의 시와 그림에도 아주 잘 나타나고 있어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이후

수많은 영향을 미쳤던 대문호였습니다.

 

조선시대에 그림에 제화 글이 함께 들어가는 게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이 조선 중기인 17세기

이후라 판단되는데, 이 시대의 제화 글이나 시를 보면 이 작품과 같이 한 수의 시중 한 소절을

차용하는 형태가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와 같은 형식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마음의 뜻은 원 작자가 지은 시의 전문을 모두 읽어봄으로써 진정한 뜻을 헤아려 살펴볼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그림에서 적혀 있는 시의 원작자인 소동파의 원시를 읽어보아도 두 수의 시 중 작자의

진정하고 애틋한 마음은 두 번째 시에서 분명히 드러나는데, 그 원시를 읽어보면

人間斤斧日創夷(인간근부일창이) 사람들은 도끼로 날마다 약탈하는데

誰見龍蛇百尺姿(수견룡사백척자) 비범한 사람의 백척 모습을 그 누가 보았을까?

不是溪山曾獨往(불시계산증독왕) 계곡과 산에는 일찍이 혼자 가는 게 아니니

何有解作挂猿枝(하유해작괘원지) 원숭이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줄 사람

                                                   누가 있을까?

라고 하였습니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1937년 청나라에 끌려갔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1645년 2월에 환국

하였는데, 이때 청나라에서 그림에 조예가 깊었던 맹영광(孟英光)도 함께 조선에 들어와서

1648년까지 머물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 들이고 명을 정복한 청나라와 선린 우호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현세자는 당시 임금이었던 인조의 미움을 받아 일찍 사망하여

독살되었다는 설도 남아 있는데, 중국의 문인인 맹영광(孟英光) 등과 교류하며 자주 청나라에

왕래하였던 인평대군 이요(李㴭)의 입장에서는 이와 같은 금상과 세자의 반목이 바람직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그림에 담았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소동파가 노래한 두 번째 시의 첫 부분 ‘人間斤斧日創夷(인간근부일창이) 誰見龍蛇

百尺姿(수견룡사백척자) 사람들은 도끼로 날마다 약탈하는데, 비범한 사람의 백척 모습을

그 누가 보았을까?’ 라는 구절은 ‘돌아가는 국제 정세도 모르며 실익 없이 의리·명분만

내세우는 이 사람들 속에서, 대세를 바로알고 임금에게 직언하는 그 모습을 보았는가? ‘라고

말하고 있다고 생각되며,

두 번째 부분인 ‘不是溪山曾獨往(불시계산증독왕) 何有解作挂猿枝(하유해작괘원지) 계곡과

산에는 일찍이 혼자 가는 게 아니니 원숭이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줄

사람 누가 있을까?‘의 구절에 인평대군은 ’소현세자의 바른 말에 동조하며 인조에게 직언하고

도와 줄 사람은 누구 없는가?‘ 라며 안타까워 하는 심정이 담겨 있다고 느껴집니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서 살펴보면 그림의 중심 부분에 원산(遠山)으로 표현된 산이 실제로

강과는 거리가 있어 작고 아득하게 그려져야 하는데 매우크고 산의 형세를 알 수 있을 정도로

비교적 거친 질감이 나타나 있으니, 이는 중국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의 새로운 주인인

청나라의 부흥과 강인한 힘이 강 앞에까지 다다라 있음을 의미하는데, 그림의 오른쪽 끝에

위치한 강변의 갈대는 세찬 바람이 불어 심하게 흔들리고 있으니 이는 중국을 통일한 청의

조선에 대향 영향력이 갈수록 세차게 변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림의 하단 강 반대편에는 소나무와 잣나무, 잎 떨어진 상수리나무가 울창하고 서 있는데,

모든 수목들이 농목으로 짙게 표현되어 있고, 또한 두 개의 언덕으로 수목이 양분되어

있으면서 그 사이에 큰 바위가 하나 보입니다.

이는 현재 처해 있는 조정의 의견이 두 갈래로 양분되어 있으면서, 두 파가 서로 의견을

합치기에는 이미 골이 너무 깊이 파여 있음이 느껴집니다.

또한 모든 수목들을 짙은 농묵으로 표현한 것이 곧 죽어있는 듯한 느낌이니 이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조정의 모든 신료들이 돌아가는 국제 정세에 어두워 있는 현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되며, 두 언덕 사이에 있는 골에 보이는 큰 바위는 이렇게 두 세력이 양분되고 합쳐지지

못하도록 하는 주된 인물로써 아마도 송시열(宋時烈)을 말함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결국 이와 같은 대륙의 변동된 국제정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현실정치 세력의 실익 없는 이론과 명분만 앞세우고 있는 현 정세에서 중간에 배를 타고 있는

작가 자신을 어디로 가야될지를 몰라 노를 잡지 못하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모든 상황의 상태와 그림의 내용으로 볼 때 이 그림에 제목을 붙인다면

「거꾸로 가는 세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보충자료 2]

소식의 위 시를 화제로 삼은 우리 옛그림들/출처-cafe.daum.net/pck7077/pVra/52   천년해송

<檀園 金弘道 - 소림야수도(林野水圖)>


소식이 이 시를 지은 것은 1088년 무렵이다. 53살 장년의 나이에 한림학사로 북송의 수도 변경에 있을 때였다. 이때 화가 李世南이 그린 것이 <추경평원도(秋景平原圖)>였다. 이 그림은 물론 현재 전하지 않지만 소동파가 그 그림을 보고 지은 2수 중 하나가 바로 이 시이다. 참차(參差)는 가지런하지 않다는 말이고 창(漲)자는 물이 불어나는 것을 뜻한다. 촌(邨)은 촌(村)과 같은 글자다.  

<혜산 유숙(蕙山 劉淑) - 편주귀가(片舟歸家)>

扁舟一棹歸何處(편주일도귀하처)

家在江南黃葉邨(가재강남황엽촌)



<豹菴 姜世晃 - 호가일도(浩歌一棹)>

浩歌一棹歸何處  큰소리 뱃노래 노 저어 어디로 돌아가나

家在江南黃葉  우리 집은 강남의 황엽촌에 있다오.

 - 烟客錄 연객(허필)이 적다



<근원(近園) 김용준(金瑢俊) - 편주일도(扁舟一棹)>

扁舟一棹歸何處(편주일도귀하처)

家在江南黃葉(가재강남황엽촌)


<心田 安中植 - 소림추경(疏林秋景)>

野水參差發漲痕 疏林欹倒出霜根

浩歌歸何處 家在江南黃葉村


[정보 출처: 책  78~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