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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역사의 평가가 대통령에게 덜 가혹해지려면

Bawoo 2016. 11. 12. 21:46



      

혈통 숭배와 부도덕한 벼슬아치 야심이 현 사태 낳아
국민은 부패는 참더라도 국가 차원 수치심은 못 참아


다니엘 튜더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전 서울 특파원

다니엘 튜더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전 서울 특파원


2012년 한국 대선 TV토론을 유튜브에서 한번 찾아 보시라. 나는 한국어가 불완전한 외국인이지만 분명 내가 보기에도 박근혜 후보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었으며 여러 사안에 대해 숙지하지 못했다. 그에게 투표한 사람들 대부분은 사실 그의 아버지를 찍은 것이며 비극적인 삶에 대한 연민도 작용했다고 하는 게 솔직하지 않을까.

나는 2012년 12월 20일에 지인으로부터 “최초의 여성 대통령 만세”라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엄밀히 말하면 맞는 말이지만 그가 대통령 자리에 오른 것은 ‘우먼 파워’와 무관했다. ‘두 번째 박 대통령’이라는 게 훨씬 더 중요했다. 그의 부상은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을 더욱 강화했다. 명실상부한 첫 여성 대통령은 아버지가 ‘큰 인물(big man)’이 아닐 것이다.

그의 승리는 혈통의 매혹적인 지배력을 입증했다. 물려받은 정치적 지위는 책임성의 장애물이다. 왕조 정치는 권력의 지름길을 종종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이들에게 제공한다. 둘 다 일종의 로또이긴 하지만 대통령직 승계는 가족기업을 물려받는 것과는 또 다르다. 제대로 된 민주적 통치는 ‘국민’을 구성하는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를 요구한다.

아마 세상 사람 중 박근혜와 유사한 인성 형성 과정을 겪은 경우는 손꼽을 정도다. 나는 인간 박근혜와 공감한다. 나는 그에게서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나오는 외로움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이해가 옳다면 슬프게도 그는 야심가들의 완벽한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최순실뿐만 아니라 수많은 ‘친박’ 사람들 또한 그의 치명적 약점을 간파했고 권력행 급행열차에 올라탔다.

궁극적으로 나는 이번의 비틀거리는 대통령직이 혈통 숭배와 부도덕한 벼슬아치 야심이 낳은 결과라고 본다. 얄궂게도 이는 개헌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권력이 짧은 임기에 극단적으로 집중되면 이런 문제가 틀림없이 악화될 뿐이다.

일부는 “현재 무속신앙과 연관된 기이한 일들에 대해 아직 결정적 증거가 없다”며 “터무니없는 음모 이론의 만연과 공격적인 매체 보도가 비합리적인 마녀 사냥이 벌어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지적한다.

그들 주장이 사실일 수도 있다. 한국의 ‘여론 법정’은 대단히 강력하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모든 나쁜 일은 그야말로 최순실 탓이다. 또 지금은 대통령이 최씨로부터 정확히 어느 정도까지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내 생각에 대통령이 두 번째 사과에서 인정한 것만으로도 이번 스캔들은 과거 대통령들의 스캔들과 충분히 ‘다르다’. 또 그토록 많은 취재원과 매체들이 매우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어느 쪽 주장이 사실 가능성이 큰지는 이미 결판났다.

모든 전임 대통령들은 수뢰한 친인척·친구들이 있었지만 그들 중에 공직이 없는 부패한 외부인의 영향을 받은 경우는 없었다. 그 어떤 전직 대통령도 현 수준의 국가적 수치심을 초래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엔 그게 우파가 대통령을 포기한 궁극적 이유다. 박정희는 우파가 애지중지하는 강력한 국가 이미지의 건설자였다. 슬프게도 딸은 그런 이미지에 손상을 입혔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까지 부패를 참을 수 있지만 수치심은 용인하지 않는다.


대통령의 도덕적·정치적 권위는 이제 확실히 없다. 이 나라가 어떤 해결책을 수용하건 그 해결책에는 그의 권력을 부분적으로라도 박탈하는 게 포함될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물러나지 않는 상황에, 1년4개월이 남은 임기는 애매함과 갈등에 시달릴 가능성이 크다. 탄핵 과정 또한 늘어지고 험악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트럼프 임기를 앞두고 한국은 지정학적인 불안을 더 심히 느끼게 될 것이고, 이런 상황에서 명백하고 단호한 지휘가 더욱 더 필요하다.

주요 정당이 대통령 선거까지 전열을 가다듬을 얼마간의 시간을 주는 전면적 전환이 더 좋지 않을까. 한국인이 아닌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나라면 사임 일정을 개시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게 이 비극적 ‘대하소설’을 끝내는 가장 명예로운 방식이며 역사라는 심판관을 보다 상냥하게 만들 것이다.[다니엘 튜더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전 서울 특파원]


[출처: 중앙일보] [삶의 향기] 역사의 평가가 대통령에게 덜 가혹해지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