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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실[悼亡室] / 이서우:[죽은 아내를 애도하며]

Bawoo 2016. 11. 21. 20:20


悼亡室(도망실)

                                                                    李瑞雨(이서우)






 

玉貌依稀看忽無(옥모의희간홀무)
覺來燈影十分孤(각래등영십분고)
早知秋雨驚人夢(조지추우경인몽)
不向窓前種碧梧(불향창전종벽오)

 

 

     죽은 아내를 애도하며

 

곱던 모습 아련히 보일 듯 사라지고
깨어보면 등불만 외로이 타고 있네.
  가을비가 잠 깨울 줄 진작 알았더라면
  창 앞에다 오동일랑 심지 않았을 것을.

 

 

 

 

[아래는 정민 선생의 글]

 

오동잎에 듣는 가을비 소리에 잠이 깼다. 등불이 아직도 혼자 타고 있다. 잠이 오지 않아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다가 자신도 모르게 깜빡 든 잠이었던 모양이다. 꿈에서 잠깐 아내를 만나 본 것도 같은데, 깨고 보니 그 모습을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다.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시인은 자신의 꿈을 깨운 오동잎에다 그만 원망을 퍼붓고 말았다.


그러니까 이 시는 시인이 세상을 뜬 아내를 그리워 하면서 지은 시다. 가을비는 사람의 마음까지 촉촉히 적신다. 한밤 중에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한층 더 슬프다. 더욱이 시인은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서 빈 방에 혼자 누워 있으니 그 외로움과 허전함을 채울 길이 없었던 것이다.


오동잎은 잎이 크고 넓어서 비라도 오면 창밖이 시끄럽기 그지 없다. 예전에는 딸을 낳으면 마당에 오동나무를 심었다. 딸이 시집갈 때 그 나무를 잘라서 장롱을 만들어 주었다. 아마 시인도 그래서 마당에 오동나무를 심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나무를 같이 심었던 아내는 이미 곁에 없으니, 지난날의 정답던 약속은 하염없는 눈물과 탄식만을 자아낼 뿐이다.

 

비슷한 옛 시조를 한 수 보겠는데, 金尙容 선생이 지은 것이다.

 

오동에 듣는 빗발 무심히 듣건만은
내 시름 하니 잎잎이 愁聲이로다
이후야 잎 넓은 나무를 심을 줄이 있으랴

 

오동잎에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진다. 그냥 들으면 시원하고 상쾌하기만 할 그 소리가 내 마음 속에 이런저런 근심이 많다 보니 온통 시름을 자아내는 소리로 들릴 뿐이다. 그래서 시인은 짐짓 앞으로는 저렇게 오동나무처럼 잎이 넓은 나무는 절대로 심지 않겠다고 투정을 부렸다.


悼亡詩의 절창은 아무래도 추사 김정희의 작품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월하노인 통하여 저승에 하소연해
내세에는 우리 부부 바꾸어 태어나리.
나는 죽고 그대만이 천리 밖에 살아남아
그대에게 이 슬픔을 알게 하리라.


聊將月老訴冥府
來世夫妻易地爲
我死君生千里外
使君知有此心悲

 

제목이 〈配所輓妻喪〉이다. 추사가 만년 제주도에 유배 갔을 당시 지은 시이다. 絶海孤島에서도 아내의 보이지 않는 보살핌에 힘입어 그 낙담의 세월을 지워갈 수 있었다. 그 먼 제주도 길에 김치까지 담궈 보냈던 아내였다. 시어 꼬부라져 입도 댈 수 없게 맛이 변한 김치를 물에 빨아 먹었던 추사였다. 이 사연은 따로 그의 한글 편지에 전한다.

 

정작 평생을 함께 보낸 아내의 죽음 앞에, 가서 곡 한 번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는 기막히다 못해 참담하였다. 그래서 첫구부터 다짜고짜 월하노인에게 하소연하겠다는 말로 말문을 열었다. 내세에는 내가 아내가 되고, 그대가 남편이 되어 다시 한번 부부로 만나게 해달라고 조르겠다 하였다. 이승에서의 미진한 사랑을 잇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때에는 내가 먼저 죽고, 당신은 살아 남아 지금의 내 찢어질 듯 아픈 마음을 당신으로 하여금 알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이것은 독백이 아니라 절규다.

 

사람 사는 일이 비슷해서일까. 여기에도 의경이 비슷한 옛 시조가 한 수 있다.

 

우리 둘이 後生하여 네나되고 내너되어
내너 그려 긋던 애를 너도 날그려 긋쳐보렴
평생에 내 설워하던 줄을 돌려볼가 하노라

 

세월은 덧없고, 남는 것은 늘 아쉬움과 후회 뿐이다.

 

 

※이서우(李瑞雨)


1633(인조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우계(羽溪). 자는 윤보(潤甫), 호는 송곡(松谷). 경항(慶恒)의 아들이다. 당색으로는 대북계열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1651년(효종 2)생원시를 거쳐 1660년(현종 1)성균관유생으로 과제(課製)에 1등하여 바로 전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으며, 그해의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675년(숙종 1)문장에 재주가 있다 하여 허목(許穆)의 추천을 받았다. 같은해 정언이 되어 인조반정 이후 대북가문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청직(淸職)에 올랐다.
서인 송시열(宋時烈)의 예론과 그것을 따르는 김수항(金壽恒)을 공격하였으며, 7월에는 대신을 공격하는 이수경(李壽慶)을 두호하다 파직당하였다.
1676년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남인으로 생활하다 1680년 경신환국 때 서인의 공격을 받아 유배당하였으나 1689년의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자 병조참의로 등용되었다.
그뒤 김수항 등 서인을 공격하였으며, 인현왕후(仁顯王后)축출 때 승지로 있으면서 숙종의 뜻을 받들었다.
1691년 함경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인삼에 대한 행정처리 잘못으로 삭직당하였다.
이듬해 목내선(睦來善)에 의하여 문장으로 천거받아 예문관제학이 되었으며, 그 이듬해 황해도관찰사로 나아갔다.
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나자 삭출당하였다가 1697년에 풀려났다. 그해 남인을 등용하는 정책을 펴던 최석정(崔錫鼎)에 의하여 청백함을 인정받아 서용하라는 명령이 임금으로부터 내려졌으나 현직에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송곡(松谷) 이서우(李瑞雨)의 만시(輓詩)에 이르기를

 

단도제(檀道濟)가 죽어지니 장성이 무너진 듯
이촬(李 (系最))이 죽으니 짧은 팔의 지탱을 뉘 밝히리.
새 무덤을 바라고자 서호로 낯을 돌리니
물빛이랑 산빛에도 슬픔을 못 이기네

 

라 하였다. 촬은 이목(李穆)의 이름이다. 이목은 전국책에 등장하는 인물로 조맹부(趙孟부)가 악비(岳飛)를 조상했던 시구를 인용한 것이다. 이는 송곡이 대장 유혁연(柳赫然)을 조상하는 시로써 유혁연은 무관으로 성호 이익(李瀷)에 의하면 무인으로써 시와 글에 뛰어난 자라고 칭송하였다. 그는 무신으로 숭정대부의 품계에 이르렀으나 경신환국으로 억울하게 죽었으니, 편장과 비장들과 사졸들 또한 눈물을 흘리지 않는자가 없었다 한다.
<성호사설 제 29권 시문문>

 


[출처:cafe.daum.net/simjaijihun/3crl/357   심재 서예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