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클래식]
아나톨 리트박 감독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Aimez-vous Brahms 1961
잉그리드 버그만(폴라), 안소니 퍼킨스(시몽), 이브 몽탕(로제)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1935-2004)이 1959년에 발표한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좋아하는 사람에게 음악회 티켓을 주면서 함께 보러 가자고 하는 것은 데이트 신청의 고전적인 수법이다. 이때 “함께 음악회 보러 가실래요?”라고 하는 것보다 “모차르트를 좋아하세요?” 혹은 “차이콥스키를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면 훨씬 근사해 보인다. 영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남자 주인공 시몽도 그렇게 센스 있는 남자였다. 그는 평소에 흠모하던 폴라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아나톨 리트박 감독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다. 1961년에 나온 고색창연한 흑백 영화로 프랑스와 미국이 합작해서 만들었다. 영화는 프랑스에서는 소설의 원제목인 <브람스를 좋아하세요(Aimez-vous Brahms)>로, 미국에서는 <굿바이 어게인(Goodbye Again>>, 우리나라에서는 <이수(離愁)>라는 제목으로 각각 상영되었다. 사강의 소설 중에서 네 번째로 영화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호화로운 출연진으로 눈길을 끈다. 세계적인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이 50대의 나이로 주인공 폴라 역을 열연했으며, 그녀의 바람기 많은 연인 로제 역으로는 유명 샹송 가수 이브 몽탕이, 폴라를 좋아하는 젊은 변호사 역으로는 <사이코>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미국 배우 안소니 퍼킨스가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여기에 원작의 작가인 프랑수아즈 사강이 엑스트라로 출연하면서 더욱 화제가 되기도 했던 영화이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파리에서 실내장식가로 일하는 폴라는 트럭 매매를 하는 부유한 사업가 로제와 5년째 사귀고 있다. 하지만 로제는 폴라와 결혼할 생각이 없다.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한 그는 폴라를 두고 틈만 나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데, 그때마다 폴라에게는 일 때문이라고 핑계를 댄다. 폴라는 주말마다 혼자 시간을 보내는 적이 많지만 그래도 로제에게 불평 한 마디 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폴라는 실내장식을 의뢰한 고객의 아파트에 갔다가 그 집 아들 시몽을 알게 된다. 시몽은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데, 매우 자유분방하고 로맨틱한데다가 유머 감각까지 갖추고 있는 멋진 청년이다. 24살의 풋풋한 청년 시몽은 폴라에게 사랑을 느낀다. 폴라는 시몽의 관심이 싫지 않지만 자기가 그보다 나이가 많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
브람스 공연 포스터 옆에서 폴라에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말하며 데이트를 신청하는 시몽(안소니 퍼킨스).
어느 날, 시몽이 폴라에게 브람스 교향곡이 연주되는 음악회의 티켓을 주면서 데이트를 신청한다. 폴라는 시몽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여 함께 음악회에 간다. 음악회를 계기로 급격하게 가까워진 두 사람.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 바로 15살이라는 나이 차이이다. 폴라는 시몽의 관심이 싫지는 않지만, 그가 자기에게 갖는 애정이 순수하게 이성에 대한 관심인지, 아니면 연상의 여인에게 느끼는 모성애적 관심인지 몰라 안타까워한다.
폴라에게는 자기 나이에 어울리는 애인 로제가 있다. 하지만 로제는 자기 애인이 젊은 남자에게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지 관심도 두지 않은 채 젊은 여자들과 바람을 피우고 있다. 폴라는 이런 로제의 행각을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지만 커리어 우먼 특유의 자존심 때문에 애써 쿨한 척한다. 그러는 사이 시몽은 더욱 노골적으로 폴라에게 구애를 한다. 하지만 오랜 망설임 끝에 폴라는 시몽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한다. 그래서 시몽에게 헤어지자고 말한다. 폴라의 말에 깊은 상처를 받은 시몽이 계단을 뛰어 내려갈 때, 폴라는 울면서 이렇게 외친다. ▶시몽(안소니 퍼킨스)과 폴라(잉그리드 버그만).
“나는 너무 늙었어. 늙었다구.”
연상의 여인과 젊은 남자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브람스의 삶과 닮아 있다. 브람스 역시 평생 동안 스승인 슈만의 아내 클라라를 연모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시몽이 폴라를 브람스의 작품이 연주되는 음악회에 초대하도록 한 배경에 이것을 암시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깔려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시몽은 폴라에게 브람스를 좋아하느냐고 물은 것일까?
폴라와 시몽이 음악회에서 감상한 곡은 브람스의 교향곡 1번과 3번이다. 브람스는 낭만주의 시대를 살았던 고전주의자로 불린다. 그는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주의자였다. 자신의 음악적 이상을 고전주의 시대에 두고, 그 시대의 형식과 질서를 작품을 통해 구현하려고 노력했다. 브람스 음악은 당대의 화려한 음악들과 대조를 이룬다. 베를리오즈, 리스트, 바그너 같은 작곡가들이 갖가지 요란한 제목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을 때에도 브람스는 제목 없는 순수음악, 그 어떤 음악 외적인 상념도 갖지 않은 절대음악을 신봉했다.
그는 그 흔한 오페라나 교향시도 쓰지 않았다. 표제음악 신봉자들은 이런 브람스의 음악을 가리켜 메마른 음악, 무기력한 음악, 창의성 없는 음악이라고 비판했다. 브람스는 작곡에서 영감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갑자기 떠오른 영감이나 과장된 감정들을 아무런 원칙 없이 나열하는 것은 그에게는 무의미한 일이었다. 어떤 영감이라도 이것을 진지하게 다루어 하나의 완성된 형태로 만들어낼 때 비로소 예술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낭만주의자로서 그의 혁신적인 화성이나 관현악법, 다채로운 음색들은 모두 이런 기준 속에서 만개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브람스는 고전적 형식 속에 낭만주의의 꽃을 피운 작곡가라 할 수 있다.
영화에 나오는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은 1876년, 브람스가 나이 마흔 살이 넘어 발표한 첫 번째 교향곡이다. 이것은 당대에 이름을 날리던 다른 작곡가에 비해 무척 늦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상에서부터 완성까지 무려 20년이 넘게 걸렸는데, 그가 이토록 교향곡 발표를 망설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베토벤 때문이었다. 베토벤이 기념비적인 교향곡 아홉 개를 내놓은 후, 작곡가들 사이에서는 “베토벤 이후 우리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베토벤의 교향곡에 버금갈 만한 작품을 내놓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브람스는 왜 교향곡을 작곡하지 않느냐는 한 친구의 질문에 “베토벤의 위대한 발소리를 등 뒤로 들으며 교향곡을 작곡한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아느냐.”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베토벤이 애써 세워 놓은 교향곡의 전통을 이어야 한다는 중압감이 그로 하여금 선뜻 교향곡을 작곡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브람스가 오랜 세월 고심한 끝에 세상에 내놓은 이 작품은 많은 사람들의 극찬을 받았다. 특히 당대의 지휘자 한스 폰 뷜로우 같은 사람은 “베토벤의 10번 교향곡이 나왔다.”고 얘기할 정도로 이 작품을 높이 평가했다. 베토벤의 전통을 이어받은 불멸의 교향곡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 작품은 ‘암흑에서 빛으로’ ‘고뇌에서 기쁨으로’ 나아가는 삶에 대한 인간의 투쟁을 그리고 있다.
폴라(잉그리드 버그만)와 로제(이브 몽탕).
1악장은 비극의 서막과 같은 긴 도입부로 시작한다. 팀파니의 웅장한 울림이 배경이 되는 가운데, 현악기는 상승하며, 관악기는 하강한다. 알레그로 부분은 거대한 관현악 소나타로 1주제와 2주제가 제시된 후 악기 사이의 관계가 바뀌면서 전개된다.
2악장은 느린악장으로 서정적이지만 감정에 치우치지 않은 온화함이 특징이다. 3악장은 3박자의 춤곡이지만 가볍지 않은 브람스만의 중후함을 보여준다. 리듬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흥미로운 악장이다. 고전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온 교향곡의 전통을 따르자면 교향곡의
3악장은 대개 3박자 계통의 스케르초나 미뉴에트 같은 쾌활하고 밝은 무곡이 오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브람스는 이 교향곡의 3악장을 우아하고 부드러우며 다소 우울한 느낌의 악상으로 처리함으로써 이제까지의 교향곡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브람스 특유의 중후함을 느낄 수 있는 악장이다.
마지막으로 연주되는 제4악장은 ‘승리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브람스가 추구하는 승리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과 같은 고양된 분위기의 영웅적인 승리가 아니다. 그는 마지막 악장에서조차도 지극히 브람스다운 방법으로 이 승리의 감정을 처리하고 있는데, 우수와 번민, 명상을 연상시키는 내면적인 표현을 거치면서 점진적으로 승리를 향해 돌진해 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곡은 느린 도입부로 시작한다. 안단테 부분에서 호른이 알프스 호른을 연상시키는 소리를 내고 이어 금관악기들이 코랄을 연주한다. 그 다음에 현악기들이 일제히 밝으면서도 유장한 1주제를 연주하는데, 전곡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선율이다.
시몽과 춤을 추는 폴라를 발견하고 로제는 그녀의 손을 잡는다.
폴라와 시몽이 객석에 앉아 음악을 듣고 있는 장면에서 바로 이 대목이 나온다. 주제 선율이 나오기에 앞서 혼이 부는 평화로운 멜로디가 등장한다. 이것은 알펜호른(알프스 호른)의 선율인데, 여기에다 브람스는 스승 슈만의 아내 클라라에게 보내는 헌사를 붙였다.
“산은 높고, 골짜기는 깊고, 나는 당신에게 천만 번의 인사를 보냅니다.”
호른의 포근하고 평화로운 목가에 이어 트럼펫과 파곳이 연주하는 옛 성가 선율이 등장한다. 이것이 ‘아멘’을 연상시키는 음형으로 한 단락을 마무리 짓고 나면, 바이올린들이 일제히 힘차게 주제 선율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씩씩하고 환희에 넘치는 선율이다.
저음역의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이 주제 선율은 어떻게 들으면 마치 찬송가 같기도 한데, 교향곡 1번이 초연되었을 때,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에 나오는 ‘환희의 송가’와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브람스 자신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이것을 베토벤의 것과 같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더 이상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교향곡 1번의 4악장과 더불어 영화에서 주제음악의 역할을 한 것은 교향곡 3번의 3악장이다. 이 악장의 멜로디는 브람스 교향곡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로맨틱하다. 그래서 널리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사실 브람스 교향곡은 대부분 내성적이고 함축적이고 진지해서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쓰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제음악으로 쓰인 3번의 3악장만은 예외이다. 멜로디가 아름다워 대중음악가들이 로맨틱 버전, 에로틱 버전 등 다양한 스타일로 편곡해서 연주하기도 한다. 영화에서도 다양한 버전의 3악장이 나온다.
브람스 교향곡 3번 3악장의 멜로디는 너무 달콤하고 몽환적이어서 얼핏 들으면 브람스 작품이 아닌 것 같다. 진지하고 내성적인 브람스에게 이런 사탕발림 같은 감정이 있었나 놀랍기도 하다. 지나친 로망은 참담한 현실에 대한 인식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폴라는 시몽의 사랑이 비현실적인 로망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극히 현실적으로 대응했고, 이에 시몽은 깊은 상처를 받았다. 영화에서 시시때때로 울려 퍼지는 브람스의 멜로디는 환상은 환상으로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다운 법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글 진회숙(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