伽倻山(가야산)
- 이달(李達)
中天笙鶴下秋宵(중천생학하추소) : 공중의 학이 가을 하늘에 내려오고
千載孤雲已寂寥(천재고운이적요) : 천년 전 최치원은 이미 떠나 쓸쓸하다
明月洞門流水去(명월동문유수거) : 동구밖 밝은 달은 물에 흘러가버려
不知何處武陵橋(부지하처무릉교) : 어느 곳이 무릉교인지 알지 못하겠구나.
[서예 습작]
笙鶴 : 笙簧(생황, 피리)과 학. ‘신선이 학을 타고 피리를 붊’을 뜻함.
秋宵 : 가을밤.
千載 : 천년. 긴 세월. 千歲(천세).
洞門 : 동굴의 입구. 문같이 된 굴. ‘신선이 사는 골짜기 어귀 곧 洞天福地(동천복지)’의 뜻임.
武陵橋 : 가야산의 다리 이름. ‘신선이 산다는 武陵桃源(무릉도원)의 다리’란 뜻으로 붙인 이름
이달(李達, 1539년? ~ 1612년?)은 조선의 시인이다.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 동리(東里), 서담(西潭)이다.
충청도 홍주(洪州) 출신으로, 조선 초 대문장가인 쌍매당 이첨의 먼 후손이자 부정(副正) 이수함(李秀咸, 秀涵)의 서자로 태어났다. 한리학관을 잠시 지냈으나 곧 물러났다. 한때 강원도 원주 손곡리에 정착하여 당시(唐詩)를 연구했으며 호도 손곡(蓀谷)이라 했다.
최경창·백광훈과 함께 당시(唐詩)에 능하다고 알려져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렸으며, 〈문선〉·〈태백〉·〈성당 십이가〉 등을 전부 욀 정도의 한시의 대가였다. 허균의 <손곡산인전>에 따르면,신라이래 당시를 지은 자 중 손곡을 따를 자가 없다고 했다. 명나라 사신 주지번과 석주 권필도 손곡의 시를 이백의 시에 섞어 놓으면 안목있는 자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극찬했다. 또, <구운몽>의 저자 서포 김만중도 <서포만필>에서 그의 '별이예장(別李禮長)'을 조선 최고의 오언절구라고 했다. 그의 시에는 아취가 있는 서정시도 많으나, 임진왜란 전후에 고단한 삶을 살았던 당시 백성들의 아픔을 노래한 시도 많이 남겼다. (오늘날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와 홍주군청 앞에 시비가 있다.)
한편, 감사 허엽의 아들인 허성, 허봉과 친분이 두터웠고, 그 인연으로 성소(惺所, 허균)와 난설헌을 가르치게 되었다. 또한, 손곡과 비교적 가까운 집안사람인 신평이씨 형조참판 이거(李蘧)가 허균의 부친인 허엽의 제자이자 허균의 외사촌 누님인 전의이씨(판서 이귀령의 손녀딸로 문정왕후 외당질녀이기도 함)의 남편인 점도 이들의 만남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성소(惺所)는 손곡(蓀谷)의 제자로, 서자 출신이었던 스승 손곡(蓀谷)의 생을 동기(動機)로 삼아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었다. 또한, 허난설헌도 조선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명나라에까지 그 명성이 자자했다.
손곡은 전국을 떠돌며 여러 벗들과 어울려 시짓기를 즐기다, 말년에 평양 여관에서 졸했다고 한다.
논점
생졸년은 정확치 않으나 보통 1539-1612년으로 본다. 양경우의 <제호시화>에 그가 기유년(1609)에 평양에 갔을 때 손곡이 70이 넘었다고 했고, 이수광의 <서담집발>이 1613년에 쓰여졌기 때문이다. 한때 본관이 원주 또는 홍주 등으로도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원주로 잘못 알려진 이유는 그가 원주시 손곡리에 거주했기 때문이며, 홍주로 잘못 알려진 것은 조선조 신평이 홍주의 속현이었기 때문이다.(신평이씨와 홍주이씨는 별개 본관임)
그의 본관에 관해, 원주 손곡리와 홍성(홍주이씨 협찬)에 있는 시비에는 손곡 이달이 홍주이씨 오경사 이성의 오세손(五世孫)으로 적혀 있으나 이 말은 옳지 않다. 우선, 오경사(五經笥) 이성(李晟)은 <고려사>열전, <고려사절요>, <동사강목>의 졸기, <신증동국여지승람> 담양도호부 편 등에 담양이씨로 나오며, 생졸년이 1251-1325년이고 죽을 때 자식이 없었다고 적혀 있으며, 담양 이씨는 신평 이씨에서 분관한 성씨이기 때문이다. 또한, 제자 허균은 스승인 손곡 이달이 쌍매당 이첨(1345-1405, 신평이씨 대제학)의 후손이라고만 여러 번 언급하고 있을 뿐 오경사 이성은 한번도 언급이 없었다.
그를 잘 아는 제자인 허균은 <학산초담>(1593), <손곡산인전>, <손곡집>(1618) 등 수십 년에 걸쳐 쓴 여러 저작들에서 손곡을 계속 쌍매당 이첨의 서예손(먼 서손)이라고만 했으며, 쌍매당 이첨이 신평이씨이므로 손곡 이달의 본관도 신평이다. 당시 신평이 홍주목의 속현인 관계로 신평이씨를 "신평인" 뿐아니라 "홍주인"이라고도 칭했던 점이 후대에 손곡의 본관에 관한 혼란을 야기한 듯하다.(이첨도 조선왕조실록 졸기엔 "홍주인"으로 적혀 있으나 고려 문과방목에는 "신평인"으로 정확히 적혀 있슴) 그러나, 역사적 인물인 이첨이란 인물을 들어 그의 후손이라 한 이상 신평이씨로 봐야 한다.
한편, 안동대 이종호 교수는 <손곡 이달과 삼당시>(1980)란 논문에서 손곡 이달의 본관을 홍주로 적어 이후의 후속 연구들에서도 손곡의 본관이 홍주로 알려졌다고 본다. 그러나, 이종호 교수는 <조선의 문인이 걸어온 길>(2004)이란 책에서 이를 착오라고 인정하고 손곡의 본관을 신평으로 정정했다. 이 책에서 그는 과거 논문을 쓸 때 홍주이씨 족보만 보고 신평이씨 족보는 입수하기 어려워 참고하지 못 했으나 나중에 신평이씨 족보도 입수하여 대조한 결과 손곡을 신평이씨로 봄이 타당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제자 허균이 여러 저작에서 손곡을 쌍매당의 후손이라고 했는데, 이런 결정적인 단서를 간과한 것도 연구자로서 부주의한 점이었다고 인정했다.[1]
또한, 손곡시집을 번역하는 등 손곡 연구의 권위자로 손꼽히는 연세대 허경진 교수도 처음에는 손곡을 홍주이씨라고 했으나, 심층적인 연구 후에 신평이씨라고 정정했다. 그는 허균이 남긴 여러 기록들로 볼 때 손곡 이달을 신평이씨 쌍매당 이첨의 서예손으로 봄이 타당하며, 또한 손곡이 신평이씨 족보에 훨씬 더 먼저 실려 있는 점 등으로 볼 때 신평이씨 족보가 더 신빙성이 높다고 보았다.[2]
조선 중기 팔문장계[편집]
문장에 뛰어나 이이, 송익필, 최립, 최경창, 백광훈, 이산해, 하응림 등과 함께 팔문장계로 불렸다.
주요 작품
- 《습수요(拾穗謠)》
- 《산사(山寺)》
- 《예맥요(刈麥謠)》
- 《별이예장(別李禮長)》
- 《제총요(祭塚謠)》
주요 저서
- 《손곡시집(蓀谷詩集)》
참고 문헌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
- 『학산초담(鶴山樵談)』
- 『제호시화(霽湖詩話)』
- 『손곡집(蓀谷集)』
- 『국역손곡집(蓀谷集)』(허경진, 보고사, 2006)
- <손곡 이달의 생애> 허경진,『손곡이달 연구』원주학술총서 제3권(2006)
- 『손곡이달시선(蓀谷李達詩選)』(허경진, 평민사, 1991 증보판)
- 『조선문인이 걸어온 길』(이종호, 한길사, 2004)
각주
[출처-위키백과 이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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