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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爲 - 李彦迪

Bawoo 2016. 12. 3. 20:56


無爲

                                                 李彦迪

 

萬物變遷無定態(만물변천무정태) 만물은 변천하여 정해진 모양이 없으니

一身閑適自隨時(일신한적자수시) 이 한 몸 한적하여 스스로 때를 따르네

年來漸省經營力(년래점성경영력) 근래 점점 작위(作爲)의 힘이 줄어드니

長對靑山不賦詩(장대청산불부시) 오래 청산을 대하고도 시를 짓지 못하네 


 

[서예 습작]

〈감상〉

이 시는 도학자(道學者) 이언적의 학자적인 모습을 잘 보여 주는 시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정해진 형태가 없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으니, 이 한 몸 역시 변화 속에 있는 것이므로 한적하게 지내며 때의 변천을 따르련다. 근래 들어 점점 경영하는 힘, 즉 작위(作爲)의 힘이 줄어드니(작위(作爲)는 출세나 명예를 탐하는 것, 글을 꾸미는 것 등등을 의미함), 오래 청산을 마주하고도 작위(作爲)의 힘이 줄어들어 시를 짓지 못하고 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이 시에 대해, “회재 선생의 시에 ······라고 했는데, 말의 뜻이 매우 높아 구구한 시를 짓는 사람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晦齋先生詩曰(회재선생시왈) 萬物變遷無定態(만물변천무정태) 一身閑適自隨時(일신한적자수시) 年來漸省經營力(년래점성경영력) 長對靑山不賦詩(장대청산불부시) 語意甚高(어의심고) 非區區作詩者所能及也(비구구작시자소능급야)).”라 평하고 있다.

 

[각주]

1 이언적(李彦迪, 1491, 성종 22~1553, 명종 8): 본관은 여주(驪州). 초명은 적(迪). 자는 부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의 도움으로 생활하며 그에게 배웠다.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경주 주학교관(州學敎官)이 되었다. 이후 성균관전적·인동현감·사헌부지평·이조정랑·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했다. 1530년 사간(司諫)으로 있을 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그들 일당에 의해 몰려 향리인 경주 자옥산(紫玉山)에 은거하며 학문에 열중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몰락하자 종부시첨정으로 시강관에 겸직 발령되고, 교리·응교 등을 거쳐, 1539년에 전주부윤이 되었다. 이후 이조·예조·병조의 판서를 거쳐 경상도관찰사·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인종이 죽자 좌찬성으로 원상(院相)이 되어 국사를 관장했고, 명종이 즉위하자 「서계십조(書啓十條)」를 올렸다. 이해 윤원형(尹元衡)이 주도한 을사사화의 추관(推官)으로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과 이기(李芑) 일파가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어 죽었다.


[출처: 시 정보-책;한국한시진보/수집-cafe.daum.net/jangdalsoo/d2Zk/43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