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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남성관련 漢字를 통해 본 고대 중국 남성의 사회적 지위

Bawoo 2017. 3. 16.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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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관련 漢字를 통해 본 고대 중국 남성의 사회적 지위

 

이 인 경


<목 차>

1. 서론
2. 血緣 그리고 가정을 대표하는 남성관련 漢字를 통해 본 남성의 사회적 지위
   2.1 血族의 뿌리 어머니의 유산 ‘姓’에 대한 아버지의 유산 ‘氏’
   2.2 남성생식기 숭배의 ‘且’에서 할아버지의 ‘祖’
   2.3 돌도끼를 든 성인남성 ‘父’에서 가정의 위엄 있는 아버지 ‘父’
   2.4 성인남성 ‘夫’ 에서 권위의 남편 ‘夫’
3. 男尊 그리고 권위를 대표하는 남성관련 漢字를 통해 본 남성의 사회적 지위
   3.1 힘쓰는 남성일꾼 그리고 ‘女’에 대한 ‘男’
   3.2 권위와 존중 그리고 남성의 美稱 ‘君’과 ‘士’
4. 결론



1. 서론

 

古文字는 옛 문화의 화석으로 그것은 풍부한 역사문화 정보를 담고 있다.
특히 表意文字인 漢字는 문자자체가 중국민족의 오랜 역사와 문화를 대변해주는 문화 전달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한자를 통해 고대 중국 사회의 발전과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1)

때문에 본고에서는 남성관련 漢字를 통해 고대 중국사회의 모습과 이에 따른 남성의 사회적 지위를 살펴보고자 한다.

 

漢字와 문화 관계에 대한 관심이 1980년대 이래 꾸준히 증가되면서 漢字와 여성의 사회적 지위 및 그 문화적 함의에 대한 연구가 우선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성과 역시 비교적 다양하게 도출되었다.2) 반면 남성관련 漢字를 통한 남성의 사회적 지위 및 그 문화적 함의에 대한 연구는 여성과 漢字에 대한 연구에 비해 활발한 편은 아니었다. 고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남성에 대한 인식이나 이에 따른 사회적 지위를 생각한다면 남녀 관련 漢字와 문화에 대한 연구 비율은 오히려 상반되는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연구의 불균형은 초기 漢字 중 수치상으로 볼 때 남성 전용 漢字가 여성 전용 漢字보다 적었던 것과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른다. 남성을 대표하는 男을 부수로 한 글자는 적지만, 여성을 대표하는 女를 부수로 한 글자들은 비교적 많기 때문이다.3)

여성관련 漢字는 주로 부수 女를 중심으로 글자 무리를 이루고 있어서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할 수 있었지만 남성관련 漢字는 男을 중심으로 무리를 이루고 있지 않다 보니 이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적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성관련 漢字와 문화에 대한 연구의 경우 여성관련 漢字를 연구할 때 그 상대 문자로 ‘男’, ‘夫’ 등의 漢字를 함께 설명하고 간단한 해석을 덧붙이거나 丈夫처럼 남성과 관련된 호칭과 그 문화를 살펴본 것들이 대부분이다.4) 하지만 남성 관련 漢字가 여성 관련 漢字보다 적고, 남성관련 漢字와 문화에 관한 연구 횟수와 그 전개방향이 여성관련 漢字의 연구보다 부족하거나 다양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여성을 남성보다 중요시 여겼다고는 볼 수 없다. 오랜 역사를 통해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고 인식된 문화가 오히려 일반화되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남성관련 漢字와 남성의 사회적 지위를 살펴 정리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기존의 연구를 참고하여 남성관련 漢字 氏, 祖, 父, 夫, 男, 君과 士를 통해 고대 중국사회모습과 이에 따른 남성의 사회적 지위를 살펴보고자 한다. 여성관련 漢字와 달리 남성관련 漢字는 男을 중심으로 한 무리를 이루는 것도, 글자를 분류할 어떤 기준이 분명히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본인의 선행 연구를 참고하여 대표적 여성관련 漢字의 상대자에 해당되는 남성관련 漢字를 위주로 선택하여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 선별한 남성관련 漢字는 甲骨文과 金文 등의 字形과 ≪說文解字≫ 등의 자료 및 관련된 여성漢字와의 비교를 통해 漢字의 本義 및 引伸된 語義를 살펴봄으로써 고대 중국사회의 모습과 남성의 사회적 지위를 이해해보도록 한다.

 

1) 王寧 外, 김은희 역, ≪설문해자와 중국고대문화≫, 서울, 學古房, 2010. 24쪽과 402쪽.

한자가 문화정보를 담아낼 수 있는 것 곧 문화 전달체라 할 수 있는 이유는 한자의 表意 특징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한다. 한자에는 역사문화와 造字 시기의 고대인의 관념의 흔적이 남아있고, 이것은 表意특징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역사와 문화는 하나 혹은 한 무리의 한자 구성의 근거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드러날 수 있다. 그러나 글자는 동일한 시기에 생성되는 것이 아니며 자형구조와 語義의 발전에 따라 변화한다. 따라서 한자 자형의 의미를 나타내는 表意 성분 역시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이다.

2) 吳世雄, <關于漢語女部字的思考>, ≪語文建設≫ 香港, 1997, 唐雷, <說文⋅女部>字的女性 主義解析, ≪太原師範學院學報≫ 第4卷 第3期, 2005, 郝繼東, 周丹, <從“女神”、“女人”、“女奴”--由漢字看古代女性地位的變化>, ≪語言學硏究≫ 第5期 第31卷, 2007, 邢燕萍⋅李玉芬, <中國古代女性社會地位變遷的漢字文化考察>, ≪楚雄師範學院學報≫ 第27卷
第1期, 2012, 이인경, <여성관련 漢字를 통해 본 중국의 혼인제도와 이에 따른 여성의 지위변화> ≪중국학연구≫ 제61집, 2012.
3) 張艶艶, <“男” “女”漢字失衡現象的文化意蘊分析>, ≪民族論壇≫, 2009, 48쪽. 許愼의 ≪說文解字≫에는 男을 부수로 한 한자가 ‘舅’와 ‘甥’뿐이며, ≪現代漢語詞典≫에는 女를 부수로 한 것은 209字인데, 男을 부수로 한 것은 없으며 男이 단지 글자구성의 한 부분으로 된 것도 ‘舅’와 ‘甥’, ‘嬲’뿐이다. 이와 같은 결과에 대해 女를 부수로 한 한자들은 친족 호칭, 용모묘사, 성명, 일부 여성무리의 칭호, 여성과 관련된 활동 등의 몇 가지 유형별로 글자가 구성되었지만 남성과 관련된 한자에는 男을 부수로 하거나 구성 부분으로 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현대 한어의 글자 구성과 규율 측면에서 사람을 가리키는 명사에는 男을 습관적으로 덧붙이지 않아서라고 설명하였다.

4) 張素鳳, <漢字⋅男女⋅婚姻>, ≪漢字文化≫ 第2期, 2001, 岑澤麗, <漢字形體結構與中國古代姓氏名字文化>, <中國西部科技> 36期, 2006, 沈懷興, <婚⋅娶⋅妻⋅丈夫>, ≪漢字文化≫, 第1期, 2000 등.



2. 血緣 그리고 가정을 대표하는 남성관련 漢字를 통해 본 남성의 사회적 지위

 

上古時代 母系에서 父系로의 발전은 많은 사회적 변화를 동반하였다. 아버지 존재에 대한 확신이 분명하지 않았던 모계사회의 남성은 혈통계승에 있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한 상고시대 사람들의 인식은 姓과 氏에 반영되었다. 모계에서 부계로 이어지는 사회의 변화는 당시 사람들의 인식과 생활 등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세대를 구분하는 호칭 母와 父, 妣와 祖를 탄생시켰다. 그러므로 이들 漢字에는 혈연에 관계된 남녀에 대한 인식이 반영되어 이를 통해 남녀의 사회적 지위를 살펴볼 수 있다.

다음에서는 이와 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남성관련 漢字 ‘氏’, ‘祖’, ‘父’, ‘夫’에 대한 분석과 여성관련 漢字와의 비교를 통해 남성의 사회적 지위를 살펴보도록 한다.


2.1 血族의 뿌리 어머니의 유산 ‘姓’에 대한 아버지의 유산 ‘氏’

 

만약 누군가에게 “당신의 姓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李氏입니다” 혹은 “李家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누군가에게 姓을 물어보면 氏나 家로 대답하지만 姓을 氏로 묻지는 않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우는 다른 사람의 姓을 “你姓什么?”라고 물으면 “我姓李”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중국의 경우도 우리처럼 성씨를 氏로 묻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현재 혼용되거나 한 단어처럼 사용되고 있는 姓과 氏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造字 초기에도 혼용되었을까?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성씨를 가지고 있고, 그 성씨는 일반적으로 아버지의 혈통으로 계승된다. 곧 성씨란 다른 가정과 구별되게 하는 한 개인 혈통의 중요한 지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아버지의 혈통으로 계승되어 온 姓의 字形은 아버지 즉 남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男과 生의 결합이 아니라 女와 生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선 姓의 本義를 알아보기 위해 ≪說文解字≫의 풀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姓은 사람이 태어난 바를 나타낸 것이다. 옛날의 神聖母들은 하늘에 감응되어 자식을 낳았기 때문에 그들을 天子라 칭하였다.5)"

5) 臧克和 外 校訂, ≪說文解字新訂≫, 北京, 中華書局, 2002. ≪說文解字⋅女部≫,

“姓, 人所生也。古之神聖母, 感天而生子, 故稱天子。”

 

이것은 姓과 사람의 출생이 연관된 것이니 한 개인의 姓은 자신을 낳아준 여성의 緣故에 의해 정해졌음을 말한 것이다. 甲骨文에서도 姓은 女+生이 결합된 모습인데, 이때의 ‘生’은 원래 땅 위에서 싹이 돋아나는 모양으로 ‘아이를 낳다’는 뜻으로 끌어다 쓴 것이라 하였다.6)

그러니까 姓의 本義는 ‘사람이 태어난 바’를 설명하는 것이며, ‘혈통의 지표’임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左傳⋅隱公八年≫에서는 “천자가 덕을 세우면 태어난 바에 의해 姓을 받게 된다”라 하였고,7) 중국 感生神話의 많은 神聖인물들은 하늘이나 사물에 感應되어 어머니로 인해 태어났으니,8) 姓은 분명히 여성의 연고와 관계된 어머니의 유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고대 씨족사회 姓의 대부분은 姜, 姬, 姚, 姒 등처럼 女를 부수로 한 것들이 많았던 것이다.

 

남성의 혈통으로 계승되는 姓이 어머니를 연고로 결정되고 계승되었다는 점으로부터 漢字 姓의 생성 당시 사회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다. 상고시대 중국사회는 부계이전에 모계씨족사회가 존재했었다고 하는데, 姓에는 바로 이 모계씨족사회 사람들의 인식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모르고 어머니만을 알았던 그 시절 사람들은 어머니를 중심으로 생활하며 群婚雜交를 통해 혈족을 유지하다가 세대 간 남녀의 性交를 제한하는 血親雜交로, 그리고 이것은 다시 다른 혈족끼리 혼인을 맺는 族外群婚制로 변화되었기에 ‘同姓不婚’이라 하였다.9)

혈족의 뿌리를 상징하는 姓은 어머니를 따랐으며, 이때의 姓은 씨족을 식별하는 지표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姓에는 고대 중국 모계사회의 흔적과 여성에 대한 원시 고대인의 인식이 그대로 담겨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6) 신영자, ≪갑골문의 비밀-갑골문과 무정왕, 그리고 부호 왕비≫, 서울, 도서출판 문,2011, 118쪽.
7) 李學勤 主編, ≪春秋左傳正義≫, 北京, 北京大學出版社, 1999. ≪左傳⋅隱公八年≫, “天子建德, 因生以賜姓。”
8) (淸)朱駿聲, ≪說文通訓定聲≫, 北京, 中華書局, 1998. “天子가 덕을 세울 때는 그 태어난 바를 따라서 姓을 받았다. 神農의 어머니는 姜水에서 살았고, 黃帝의 어머니는 姬水에서 살았으며, 舜의 어머니는 姚墟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어머니가 살았던 곳의 연고를 따라서 그들의 姓을 삼은 것이다.

(天子建德, 因生以賜姓。按神農母居姜水, 黃帝母居姬水, 舜母居姚虛, 因以爲姓。)”

9) 이인경, <여성관련 漢字를 통해 본 중국의 혼인제도와 이에 따른 여성의 지위변화>, ≪중국학연구≫ 제61집, 2012, 375-377쪽 참조. ≪左傳⋅僖公二十三年≫, “男女同姓, 其生不蕃。”


姓이 여성 곧 어머니의 유산이라면 氏는 아버지의 유산에 속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舜은 그 姓이 姚였지만 고대 전적에서는 그를 姚舜 혹은 虞舜으로 지칭하였으며, 姓이 姒인 禹는 姒禹라 지칭하지 않고 夏禹라 지칭하였다. 왜 그랬을까?


袁枚(1716-1797)는 ≪隨園隨筆≫에서 姓과 氏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천자는 姓을 내려 주고 氏도 내려 준다. 제후는 氏는 내려 줄 수 있지만, 姓은 내려주지 못한다.

氏를 가진 사람은 신분이 귀한 사람이고, 신분이 천한 사람은 氏가 없다. 남자는 氏로 호칭하고, 여자는 姓으로 호칭한다. 姓이란 백세까지도 혈통을 붙들어 매어 통괄하는 영원히 변할 수 없는 것이다.

氏는 경우에 따라 자손들에 의하여 별도로 생겨날 수 있는 것으로서, 어느 순간에는 변할 수도 있는 것이다.10)"

10) 袁枚, ≪隨園隨筆≫,

“禮疏云, 天子賜姓賜氏, 諸侯賜氏不賜姓,

貴有氏, 賤無氏, 男稱氏, 女稱姓. 姓者所以統繫百世而不變者也.

氏者所以別子孫所自出, 一轉而變者也。”


여기에서 氏는 남성을 호칭할 때 사용된 것으로 신분이 귀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상고시대 사회적 특징과 관계있을 것이다. 모계에서 부계로 사회가 발전하면서 생산이나 부족 간의 분쟁에 있어 남성의 역할은 점차 커져갔다. 생리적으로 여성보다 힘이 센 남성은 부족 간의 분쟁이 생기면 분쟁의 중심에서 자신들의 힘을 드러냈고 이로 인해 주종의 관계나 신분의 차이가 점차 강화되어갔다.

부족이 커지고 분쟁이 잦아지면서 큰 부족 안에 다시 새로운 집단이 형성되었고, 그런 집단의 수장은 대부분 남성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는 호칭 氏가 부여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氏는 신분이 귀한 남성이 가질 수 있다고 하였다.11)

하지만 제후의 경우는 姓은 하사할 수 없고 천자만이 姓을 하사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姓은 氏보다는 상위개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원래 姓이란 혈족의 뿌리, 곧 혈통을 총괄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자손 대대로 변할 수 없는 것이지만 氏는 姓에 대한 그 하위 개념으로서 하나의 姓 안에 별도로 시작되는 계통의 種別을 표시하는 호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姓의 기원은 모계사회를 암시하며 혼인을 구분하기 위한 지표였지만, 氏는 同姓의 사람들이 다시 분화된 칭호로서 그것은 貴賤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 것이다.12)

 

결국 姓이 姚와 姒였던 舜과 禹는 어머니의 연고에 의해 주어진 姓이 있었지만 그들을 각각 虞舜, 夏禹라 호칭한 것은 바로 姓과 氏에 대한 구분 때문이었던 것이다.

舜은 姚라는 姓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氏가 有虞 곧 虞였기 때문이며, 禹는 姓이 姒였지만 그의 氏가 有夏 곧 夏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대 氏를 가진 남성은 비록 姓을 가지고 있을 지라도 氏로 호칭한 반면 姓을 가진 여자는 비록 氏를 가지고 있을 지라도 姓으로 호칭하였다. 뿐만 아니라 氏는 이름의 앞에 붙여서 호칭하였으며, 姓은 이름 뒤에 붙여서 호칭하였으므로 舜을 虞舜으로 禹를 夏禹라 칭한 것이다.13)

 

11) 岑澤麗, <漢字形體結構與中國古代姓氏名字文化>, <中國西部科技> 36期, 2006, 50쪽.
氏는 姓의 分支이므로 동일한 姓의 사람 중 공덕, 권위가 있거나 부족을 나가 독립적으로 창업의 능력이 있는 남성의 지표가 바로 氏였다고 한다.
12) 劉志成, ≪文化文字學≫, 成都, 巴蜀書社, 2003, 178쪽. 여기에서 氏는 周나라가 되어서야 同姓에서 분화된 칭호이며, 그 기원이 매우 복잡하여, 제후국명, 봉읍명, 관직명, 거주지명 등에 따라 氏가 탄생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姓은 혼인의 분별로, 氏는 귀천의 분별에 사용되었다 하였다.
13) 여성의 경우는 姓과 氏의 사용이 남성과 달랐다. 盧 桓公의 아내는 ‘文姜’, 莊王의 아내는 ‘哀姜’이라 불렀는데 이들은 모두 姓이 ‘姜’이었다. 그러니까 그녀들에 대한 호칭 文姜과 哀姜에서 文과 哀는 각각 그녀들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또 殷나라 妲己와 周나라 褒姒의 경우도 뒤쪽 ‘己’와 ‘姒’가 그녀들의 姓이고, ‘妲’과 ‘褒’는 그녀들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후대로 오면서 姓과 氏의 구분은 차츰 모호해지다가 漢代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그 구분이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14) 秦나라의 姓은 ‘嬴’이었고, 漢나라의 姓은 ‘劉’였는데, 司馬遷은 ≪史記≫에서

 

"진시황제는 … 名을 政이라 하고, 姓을 趙氏라 하고 字는 季이다.15)
(한)고조는 姓을 劉氏라 한다.16)"

 

라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姓을 묻고 氏나 家로 답하는 우리처럼 姓과 氏를 혼용하고 있는 모습으로, 姓과 氏의 구분이 漢代에 이미 사라져 혼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을 호칭할 때 姓과 氏로 구분해 사용했던 것과는 달리 이름 앞에 姓을 붙여 사용한 것은 氏를 이름 앞에 붙여 사용하던 남성의 호칭관습에서 연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어머니의 유산 姓에 대한 종별표시였던 아버지의 유산 氏는 고대사회로 발전하면서 끊임없는 발전을 거듭하여 신분을 구분하고 귀천을 분별하는 지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성 호칭관습으로 성씨가 혼용되었을 뿐 아니라 可變되는 氏로 귀천을 구분하였다는 것은 곧 고대 중국사회 남성들의 신분지위의 변화를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아버지의 유산 氏는 원래 어머니의 유산 姓에 대한 종별표시였으나 사회가 부계사회로 발전함에 따라 남성의 지위를 대변해주는 지표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4) 劉志成, 앞 책, 178쪽. 氏는 귀천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귀족과 서민은 氏의 有無로 구분되었다 한다. 戰國時代 이후 姓과 氏는 결합하여 성씨가 되었고 漢代에는 姓으로 통칭되었다 한다. 하지만 이때의 통칭은 아버지 호칭관습에 따른 남성의 혈통 계승을 중심으로 한 것이므로 남성의 사회적 지위변화가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15) 司馬遷, ≪史記≫, 北京, 中華書局, 1999. ≪史記⋅秦始皇本紀≫, “秦始皇帝者, …名爲政, 姓趙氏.”
16) ≪史記⋅高祖本紀≫“高祖…姓劉氏, 字季.”

 


2.2 남성생식기 숭배의 ‘且’에서 할아버지의 ‘祖’

 

조상을 나타내는 祖는 示와 且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글자다. 그러나 조상 혹은 할아버지를 뜻하는 이 글자의 本字는 원래 ‘且’였다.

 


그런데 且는 고대 남성생식기 숭배와 관계가 있다고 한다.17)

위 맨 오른쪽에 보이는 그림은 실제 출토된 고대 중국의 男根 상징물 石祖인데, 이것이 갑골문과 금문 且의 자형과 그 모습이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石祖 이외에 출토된 銅祖, 玉祖 등도 고대 중국의 생식숭배와 관계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상고시대 사람들에게 있어 생식기는 음란한 것이 아니라 씨족의 번성과 존속을 위해 숭배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돌, 청동과 옥 등으로 그들의 생식신을 만들었던 것이다.18)

모계사회 生育과 관련된 공적이 모두 여성에게 귀속되었던 상황과는 달리 모계사회 말기 그리고 부계사회로 발전하면서 남성은 사회에서 점차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로 인해 남성이 生育에 있어 또 다른 구심점이 되면서 남근을 본 딴 石祖, 銅祖 등이 만들어져 숭배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생식신의 숭배는 生育과 남성의 관계를 인식한 이후에야 행해진 것이어서 이에 대한 숭배는 모계사회 말기를 전후하여 발생하였다고 한다. 위 且의 자형에도 生育과 관련된 남성에 대한 인식이 나타난 것이라

볼 수 있으므로 자형 且의 출현 역시 이와 비슷한 시기였을 것이라 보고 있다.19)

그러니까 자손 번성의 공적과 남성 선조가 관계있다는 인식이 남성 조상에 대한 숭배로 이어져 남근에 대한 숭배로 나타난 것이고, 이런 그들의 생각이 且에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7) 李玲璞 外, ≪古漢字與中國文化史≫, 貴陽, 貴州人民出版社, 1997, 175쪽. 郭沫若이 且의 갑골 자형이 남성생식기 형상이라고 말한 이래 이런 관점은 많은 학자들에게 받아들여졌고 仰韶文化, 馬家窯文化 유적지 등에서 출토된 남근 형상의 유물을 통해서도 이 견해는 많은 학자들에게 지지를 얻고 있다고 한다.
18) 許進雄, 洪熹 역, ≪중국고대사회-文字와 人類學의 透視≫, 서울, 동문선, 1991, 383쪽.
생물계에서 번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으므로 원시 고대인들은 생식기는 음란한 것이 아니라 숭배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겼다. 때문에 씨족의 번성을 위해 여성 소상의 경우 가슴, 배, 엉덩이 등을 강조해 만들었다. 위 銅祖, 玉祖 등의 남성 생식기를 본 딴 것들 역시 이와 같은 이유로 볼 수 있다.
19) 劉志成, 앞 책, 196-197쪽.


 

또 이 且의 자형을 고대 제사의식에 사용되었던 도마와 비슷한 祭器  ‘俎’ 이거나, 혹은 나무를 깎아 만든 神主位牌로 보기도 한다. 부족에서는 남성 선조를 위해 且(祖)를 모방해 신주위패에 제사를 지냈는데, 이 때 제사를 위해 고기를 가지런히 진열하였던 도마가 俎로 이것 역시 나무를 깎아 만들었기 때문에 갑골문에서 비슷한 형태인 且(祖)와 俎가 혼용되었다는 것이다.20)

그리고 이때의 신주위패는 그 외형이 남근 형상과 흡사하였다고 하니, 이것은 남성생식기 숭배가 부계사회에서 남성 조상이나 신주에 대한 제사로 변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대인들의 이와 같은 인식은 且에 示가 더해진 祖를 탄생시켰다. 이것은 사람들이 神 혹은 이미 죽은 선조들에 대해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이다.

且에 덧붙인 示를 ≪說文解字⋅示部≫에서는 “하늘이 象을 드러내 사람들에게 吉凶을 보여주는 것이다.

示는 二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로 三(세 줄)이 내려진 것은 (바로) 태양, 달과 별을 나타낸다. (이로부터) 天文을 보고 시간의 변화를 살폈으니, 示는 神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라 하였다.21)
그러므로 示+且에서의 示는 제사나 숭배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22) 또 示는 神主 모양을 그린 것으로, 이것은 원래 조상을 대표하는 靈牌였기 때문에 引伸하여 神을 가리키게 된 것이라고도 하였으니,23) 示에는 神事 곧 神에 대한 숭배 혹은 제사와 관련된 생각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20) 劉志成, 위 책, 196-197쪽.
21) ≪說文解字⋅示部≫, “示, 天垂象, 見吉凶, 所以示人也。從二。三垂, 日月星也。觀乎天文, 以察時變。示, 神事也。”
22) 한감당 편저, 문준혜 역, ≪한자문화≫, 서울, 역락, 2013, 220쪽. 또 여기에서는 示는 옛날 조상의 위패를 놓아둔 제단이었는데, 이것은 상고시기 靈石 숭배에서 기원하였을 것이라 하였다.
23) 劉志成, 앞 책, 335쪽.


 

남성생식기 형상에서 비롯된 상고시대 사람들의 조상에 대한 인식은 자손 번성에 대한 공로에서 시작되어 남성 조상에 대한 숭배로 변화되었다. 바로 이런 관념의 변화가 且와 示에 반영되어 조상으로 대표되는 祖로 引伸된 것이다. ≪說文解字⋅示部≫에서 祖를 “始廟”로 풀이한 것을 보더라도 祖의 本義가 종묘임을 설명한 것이니,24) 祖는 ‘조상’, ‘조상에 대한 제사’의 뜻으로 引伸된 것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의 제사는 우선적으로 남성 조상을 위주로 행해졌기 때문에 祖에는 당시 남성 조상에 대한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이것은 곧 부계사회 남성의 권력과 지위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할아버지로 대표되는 친족호칭으로서의 祖는 사회와 혼인형식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생되었다.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짧았던 상고시대에는 가정의 구성원도 복잡하지 않았으며, 3대가 함께 생활하는 상황도 쉽지 않았다. 따라서 商代에는 2세대 이상 되는 남자를 가리켜 祖라 하였다고 한다.25)

그러니까 혈족간의 호칭으로 사용될 때 祖는 祖父 세대 이상의 모든 남성을 일컫는 통칭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때의 祖는 현재 자신을 기준으로 두 세대 위 직계를 지칭하는 것과는 달리 직계의 여부를 떠나 3대 이상이기만 하면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祖로 지칭하였던 것이다. 族外群婚制 시기 씨족 내 性交가 금지되면서 두 세대 이상의 친족에 대한 호칭의 구분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조부 세대 이상을 통칭하는 남성 祖와 여성 妣가 생성되었던 것이다.

 

妣의 갑골문 자형은 양손을 받들고 단정하게 앉아있는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니, 妣는 나이 든 여성을 설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모계사회에서 이런 모습으로 앉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씨족 구성원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으로 나이든 여성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26) 곧 妣의 本義는 모계사회 나이 든 여성에 대한 호칭으로 볼 수 있으며, 이후 이것은 祖에 상대되는 조부 세대 이상 여성을 통칭하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24) 劉志成, 위 책, 335쪽. 유지성은 ≪說文解字⋅示部≫에서 “祖, 始廟也。”라 한 것과 관련하여 祖의 本義를 宗廟라고 하였다.
25) 許進雄, 洪熹 역, 앞 책, 382쪽.
26) 妣의 양손을 앞으로 모으고 단정히 앉은 모습은 씨족 구성원들의 존경을 받는 나이 든 여성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였다. 상고시대 단정히 앉을 수 있었다는 것은 구성원들 중 어른을 나타낸 것이기에 단정과 순종의 의미를 나타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劉潔, <漢字視野下的中國婚姻文化>, ≪語文知識≫ 1期, 2009, 53-54쪽). 갑골문에서 양 손을 모으고 단정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것을 고귀한 자태를 형상한 것으로 본다면 이것은 生育의 주체로서 존경 받았던 모습과 관계있다고 볼 수 있다.(이인경, 앞 논문, 383쪽)


 

生育과 무관하게 인식했던 모계사회 남성의 역할과 지위는 여성보다 우월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모계시대 말기 남성과 生育의 관계를 인식하게 되면서 남성성을 상징하는 남성생식기는 사람들에게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그들의 생각은 祖의 本字인 且에 그대로 투사되었다. 혈통이 아버지 즉 남성으로 계승되는 사회로 발전하면서 조상에 대한 제사는 곧 남성조상에 대한 숭배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이런 관념은 남성생식기 혹은 남성조상을 나타내는 且에 신이나 조상에 제사를 나타내는 示가 첨가된 祖에 반영되었다. 또 모계 族外群婚制 시기 祖에 대한 친족 호칭의 발생은 조부 세대 이상의 남성에 대한 통칭으로 이것은 부계사회로 나아가는 사회적 상황과 남성의 지위 향상을 설명해주는 예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씨족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던 나이 든 여성 妣에 상대되는 같은 세대 남성의 호칭이 祖였을 뿐 아니라 여기에는 생육과 관련하여 씨족 내 위 세대 어른이라는 인식도 함께 담겨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남성생식기 숭배에서 비롯된 祖는 모계에서 부계로 이어지는 사회에서 두 세대 위 성인남성에 대한 통칭 祖로 그 語義가 변화되었고, 이것은 다시 자신의 직계 혈통에 대한 조상에 대한 호칭으로 변화되었다. 결국 祖의 語義변화에는 변화된 남성의 권위와 이에 따른 고대 중국인들의 인식이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2.3 돌도끼를 든 성인남성 ‘父’에서 가정의 위엄 있는 아버지 ‘父’

 

아버지를 나타내는 父의 갑골문은 도끼와 같은 무기를 손으로 쥐고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즉 父란 원래 도끼를 가리키는 象形文字로 우리가 도끼의 의미로 사용하는 ‘斧’와 통용되었다.


 

郭末若은 갑골문 父의 자형을 “石器시대 남자들은 돌도끼를 들고서 일을 하였기 때문에 이로부터 낳고 기르는 부모의 父가 생긴 것이다.”라고 하였다.27)
석기시대 도끼는 중요한 생산도구였고 이 도구를 주로 사용했던 사람이 여성보다 힘이 센 남성이었기 때문에 도끼를 들고 있는 모습을 남성과 관련지었을 것이다. 중국 新石器 시대 유물의 경우에도 돌도끼는 남성의 묘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에 돌도끼 등의 무기는 주로 남성과 관련 있으며 이를 근거로 위 父의 자형도 돌도끼의 형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父의 本義는 ‘돌도끼 들고 있는 모습’ 혹은 ‘돌도끼를 들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렇다면 남성은 돌도끼를 들고 무엇을 하였을까? 신석기시대부터 남녀의 일은 구분되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거처의 안팎 중 어느 쪽에서 일을 하는 지 그리고 어떤 도구를 사용하는지가 남녀 분업의 기준이었다고 한다.28) 또 일을 한다는 것은 성인이 된 경우에만 해당되기 때문에 남녀의 구분에 앞서 누군가가 일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성인임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父의 자형이 돌도끼를 형상화한 것이라면 이것은 곧 이 도구를 사용해 일을 하였던 ‘성인 남성’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상고시대 성인남성은 거처 밖에서 생산노동에 종사하였을 뿐 아니라 유사시 부족을 지키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그러니까 이때 그들이 사용한 돌도끼는 생산도구이자 부족을 지킨 무기였을 것이기 때문에 성인남성과 돌도끼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父는 돌도끼를 들고 있는 모습에서 ‘성인남성’이라는 뜻으로 引伸된 것이다.

 

27) 劉志成, 앞 책, 194-195쪽 재인용. 郭末若, ≪甲骨文中所見之殷代社會≫, “石器時代男子持石斧以事操作, 故孳乳為父母之父。”
28) 張艶艶, 앞 논문, 48쪽. 男과 女에 대해 字解書 등의 풀이를 근거하였을 때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는 관건은 집을 기준으로 어느 쪽에 일을 하느냐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은 상고시대로부터 각각 맡은 일이 나뉘어져 있었는데, 이런 노동의 구분은 차별적 개념에 의한 것이 아닌 주로 생물학적 특징에 의한 것이었다 한다. 생육의 중심이었던 여성은 거처를 중심으로 그 가까이에서 행하는 일을, 힘이 있는 남성은 수렵과 같은 비교적 거처에서 떨어진 곳에서 일을 하는 것으로 서로의 일을 분화하여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성인남성의 父는 사회의 필요에 의해 다시 한 세대 위 남성에 대한 통칭으로 語義가 확장되었다. 아버지를 분명하게 알 수 없었던 모계사회에서는 어머니의 여러 배우자나 형제들을 모두 父로 불렀다 한다. 하지만 같은 세대끼리 혼인하는 사회로 발전하면서 세대 간을 구분할 호칭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父는 같은 세대 여성들의 배우자이며 한 세대 아래 자녀들의 아버지에 대한 호칭이 되었다.

이제 父는 자녀 세대 보다 한 세대 위 성인남성에 대한 통칭이 되었던 것이다. 위 친족호칭과 관련된 祖의 경우처럼 씨족의 아버지로서의 父의 경우도 자녀가 친생인지의 여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父라는 호칭으로 자녀 세대에 대해 ‘한 세대 위 성인남성’임이 분명해 진 것이니 혈연관계에 있어서도 남성의 위치가 이전보다 분명히 향상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또 父에 상대되는 자신보다 한 세대 위인 여성을 母라 호칭하였다.
母의 자형은 풍만한 가슴이 드러난 모습으로 젖을 먹여 아이를 기르는 여성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이때 母라는 호칭 역시 친생모친만을 가리킨 것이 아니다. 母 역시 젖을 먹여 아이를 기를 수 있는 성숙한 여성 즉 ‘성인여성’을 나타내었다가 이 후 어머니 세대 모든 여성들에 대한 통칭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당시 자녀세대에 대한 한 세대 위 여성과 남성을 가리키는 母와 父에 담긴 의미는 다소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生育을 무엇보다 중요시했던 모계사회에서 자녀를 키우는 성인여성은 씨족에서 존경받는 대상이었지만 성인 남성의 경우는 밖에서 일을 하는 씨족 구성원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형이 비슷한 母와 女가 甲骨文에서 종종 공용되면서도 女는 母로 대체될 수 없었는데, 이것은 母에는 女에 없는 존중의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29) 하지만 母는 父와 마찬가지로 자녀 세대에 대한 한 세대 위 성인을 지칭한 점에서 父에 대한 母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9) 양동숙, ≪갑골문과 옛문화≫, 서울, 차이나하우스, 2009, 189쪽. 이런 이유로 인해 母는 女로 쓸 수 있지만, 女는 반드시 母라고 할 수는 없는데, 이것은 母와 女의 자형에서는 구별할 수 없지만 문장의 해석상에서 가능한 것이라 하였다.



 

父는 이처럼 引伸되어 혈연관계와 관련된 한 세대 위 성인남성에 대한 호칭이 되었다가 다시 누군가의 아버지라는 의미로 변화되었다. 나아가 여기에는 권위까지 더해져 친생부친의 父는 ‘가정의 위엄 있는 아버지’라는 뜻으로 語義가 변화된다.

 

그래서 ≪說文解字⋅又部≫에서 父를

 

"矩이다. 가장으로 통솔해 가르치는 자이다. 又와 결합되어 있으며 지팡이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라 한 것이다.30)

30) ≪說文解字⋅又部≫, “父, 矩也, 家長, 率敎者, 從又擧杖。”

 

여기서 지팡이는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率敎하는 사람이란 어떤 이들을 통솔하며 훈계하는 주체를 설명한 것이니, 父란 ‘손에 지팡이를 들고 사람들을 통솔해 다스리는 사람을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곱자 矩를 父로 풀이하였으니 권위 있는 통치자를 父로 풀이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矩는 원래 캠퍼스, 곱자, 수평을 재는 것과 길이를 재는 도구 規矩準繩 중 하나로 이것은 생활의 규범의 뜻으로 사용된다.

특히 規矩는 중국신화의 伏羲와 女媧가 들고 있던 도구로서 준칙 혹은 법이라는 의미이며 통치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許愼은 아버지 父를 규범이 될 만한 사람, 가정에서 사람들을 통솔하는 권위 있는 위치의 사람으로 설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父가 지팡이를 들고 있는 사람이라는 이와 같은 견해는 父의 갑골문에 대한 풀이에서도 언급된 적이 있다. 갑골문 父 자형이 손으로 丨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보고 이때의 丨이 지팡이라고 설명한 경우이다. 하지만 이럴 경우 丨이 나타내는 바가 무엇인지에 따라 의견이 달라질 수 있다.31) 대체로 丨을 무기의 일종이나 어떤 도구 혹은 지팡이로 보고 있으나 이것이 어떤 상형자와 결합되는지에 따라 갑골문의 풀이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丨을 지팡이라고 본 갑골문 풀이와 ≪說文解字≫의 설명만을 연계해 父의 本義를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돌도끼는 성인남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이에 근거해 父의 자형을 돌도끼로 풀이하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최초의 그 本義가 무엇이든 父에는 남성의 지위와 권위가 반영되어 있다.
돌도끼를 사용해 생산뿐 아니라 씨족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던 남성은 씨족이 확대되면서 그 권위가 향상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도끼와 같은 남성의 도구가 힘 있고 권위 있는 남성의 상징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통솔하는 지위의 사람임을 나타내기 위해 丨을 굳이 지팡이라고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32)

또 許愼은 봉건왕조체제 강화를 목적으로 ≪說文解字≫를 편찬한 것이므로 이와 같은 父의 풀이에는 당시 가부장사회의 모습이 당연히 반영되었을 것이다.33) 그러므로 許愼의 ‘지팡이를 들고 있는 통솔하는 지위의 사람’ 父는 ‘돌도끼를 든 사람’이라는 그 本義로부터 引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상고시대 사회모습과 고대인들의 생활을 근거로 하여 父를 분석하면 그 本義는 ‘돌도끼를 들고 일을 하는 성인남성’이고, 사회와 혼인형식의 발전에 따라 자녀세대에 대한 한 세대 위 성인남성에 대한 통칭 父로 引伸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가부장제가 확립된 고대 중국 봉건사회에서 父는 다시 가정의 권위적 위치에 있는 위엄 있는 아버지라는 의미로 그 語義가 변화된 것이다.

다시 말해 父는 혈통이 아버지로 계승되는 부계사회로의 발전에 따라 최초 本義인 성인남성에서 씨족의 아버지 父로 그리고 다시 위엄 있는 가장의 아버지로 그 語義가 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여기에는 남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이에 따른 지위변화가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31) 신영자, 앞 책, 113쪽. 父는 한 손에 丨을 들고 있는 모양으로, 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지만 권력이나 무기 혹은 도구의 일종으로 보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라고 하였다. 또 최근에는 손에 회초리를 들고 자식을 훈육하는 모양으로 보고 있다고 하였으니, 丨에 대한 풀이는 결국 어떤 사회적 단계와 이에 근거해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따라 서로 다른 견해가 나올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32) 穀衍奎, ≪漢字源流字典≫, 北京, 華夏出版社, 2006, 70쪽. 석기시대 도끼는 중요한 생산 도구이며 兵器로 이것은 권력의 상징이었다고 하였다.
33) 王寧 外, 김은희 역, 앞 책, 67-74쪽 참조. ≪說文解字≫의 王에 대한 풀이를 고대 왕권 사상과 관련하여 다른 전적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중앙집권적 봉건주의 제국을 건설하고자 하였던 漢나라라는 역사적인 배경은 허신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기 때문에 ≪說文解字≫의 한자 풀이에도 그런 시대적 특징은 반영되었을 것이라 하였다.


2.4 성인남성 ‘夫’ 에서 권위의 남편 ‘夫’

아내 妻에 대한 남편 夫의 갑골문은 성인이 된 남성이 머리를 빗어 상투를 튼 머리에 비녀를 꽂고 서있는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다.34)


위 夫 자형은 성인을 뜻하는 大에 비녀모양을 상징하는 一이 결합된 것이니 이것은 곧 어른이 되어 비녀를 꽂아 성년이 되었음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夫는 성인 大에 一이 결합된 글자로, 이것은 ‘키가 어느 정도에 달하는 성인이 된 남성’을 나타낸다고도 한다.35)

이럴 경우 남성은 전쟁이나 노동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夫를 성인남성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형과 관습 등을 근거로 하였을 때 夫의 本義는 ‘성인남성’이라고 할 수 있다.

34) 穀衍奎, ≪漢字源流字典≫, 43쪽 참조. 갑골문에서 머리에 비녀를 꽂고 있는 성인의 모습으로, 이것은 고대 남성에게 행해진 冠禮의 모습을 말하는 것으로 성인남성을 의미한다하였다.
35) 劉志成, 앞 책, 195쪽.


 

이와 관련하여 ≪說文解字≫에서도 夫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夫는 丈夫이다. 大에 따르며 一은 비녀를 형상화한 것이다. 周나라 제도에 의하면 8寸은 1尺이요 10尺은 1丈으로, 사람의 키는 8尺이기 때문에 丈夫라 하였다.36)"
36) ≪說文解字⋅夫部≫, “夫, 丈夫也。從大, 一以象簪也。周制以八寸爲尺, 十尺爲丈, 人長八尺, 故曰丈夫。”

이에 따르면 夫는 키가 약 180cm 정도가 되는 사람을 말한 것이라 한다.
漢代의 1尺은 23.2cm이니 1寸은 2.3cm, 때문에 8寸은 18.4cm로 이것이 周代의 1尺 곧 18.4cm를 말한다. 또 漢代 1尺이 23.2cm이므로 10尺은 232cm로 1丈인데, 사람이 8尺까지 자란다 하였으니 그 키는 약 185cm 정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37) 그리고 이로부터 夫에 길이 단위로 언급한 丈을 연용하여 丈夫라 한 것이니 許愼 역시 夫를 성인남성으로 풀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詩經⋅秦風⋅黃鳥≫에서도 “이 奄息이라는 자는, 100사람에 비견될만한 덕을 지닌 분이네.”라 하였고,38) ≪周易⋅隨≫에서는 “丈夫에 얽매이고 小子를 잃으니, 따르면 구해 얻는 것이 있으나 바르게 머물러야 이롭다.”라 하였다.39)
여기에서 夫와 丈夫는 모두 성인남성을 말하는 것이다. ≪詩經⋅黃鳥≫에서 百夫라 한 것은 많은 사람을 나타내는 말이니 夫는 단지 일반 남성의 뜻일 뿐이다.

 ≪周易⋅隨≫에서의 丈夫는 小子 즉 소인에 대한 반대의 의미로 ≪詩經≫의 夫처럼 성인남성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40) 그러니까 현재 남편의 뜻으로 사용되는 夫와 丈夫의 語義는 원래 모두 성인남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夫는 이후 성인남성의 뜻 대신 남편의 뜻으로 引伸되었는데, 이것은 고대 중국 풍속과 관련이 있다. 고대 중국 풍속에 따르면 남녀를 구분하여 남성의 경우는 20세, 여성의 경우는 15세에 각각 冠禮와 笄禮를 행하였기 때문이다.41) 위 갑골문에서 夫와 妻는 비녀를 꽂은 모습으로 성인임을 형상화 한 것이라면 이후 관례 등의 의식을 통해 남녀가 성년이 되었음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혼인은 성인이 된 남녀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므로 夫는 아내에 상대되는 남편의 뜻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37) 염정삼, ≪설문해자주 부수자 역해≫,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3, 540쪽. 각주 107과 108참조.
38) 程俊英 撰, ≪詩經譯注≫,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1997. ≪詩經⋅秦風⋅黃鳥≫, “維此奄息, 百夫之特。”
39) ≪十三經注疏一 (周易尙書)≫(影印本), 中文出版社, ≪周易⋅隨≫, “系丈夫, 失小子。隨有求, 得, 利居貞。”
40) 沈懷興, <婚⋅娶⋅妻⋅丈夫>, ≪漢字文化≫ 第1期, 2000, 47쪽. ≪周易⋅隨≫에 丈夫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하였다. 왜냐하면 商代의 단어 중에서 丈夫라는 단어를 찾을 수 없을 뿐 아니라 丈이라는 길이 단위가 없었기에 丈夫로 연용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므로 丈夫를 한 단어로 등장하게 된 것은 周나라 때일 것이라 하였다. 또 ≪說文解字≫에서 夫를 丈夫라고 풀이한 것에 대해 許愼도 丈夫 단어의 등장시기가 周代임을 짐작하였기 때문에 丈夫의 뜻 역시 성인남성에 대한 통칭으로 보았던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41) 염정삼, 앞 책, 540-541쪽 재인용.≪太平御覽⋅人事部 二十三≫ 卷382 “관례 후에 비녀를 꽂는다. 사람은 20세가 되면 관례를 하는데 그 때부터 성인이 된다(冠而後簪, 人二十而冠, 成人也。)”

 


1) 남편은 짐을 짊어지고 아내는 짐을 인 채 자식을 이끌고 바다건너 섬으로 들어가네.42)

42) 郭慶藩 撰, ≪莊子集釋≫ 下, 北京, 中華書局, 2004.≪莊子⋅讓王≫, “于是夫負妻戴。”


2) 어찌 匹夫匹婦처럼 작은 신의에 얽매여 도랑에서 스스로 목매 죽어도 아는 사람이 없게 할 수 있으리오?43)

43) 金良年 撰, ≪論語譯注≫,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1998. ≪論語⋅憲問≫, “豈匹夫匹婦之爲諒也, 是自經于溝瀆而莫之知也。”

 

1)의 夫는 妻에 대한 상대자로 아내의 배우자인 남편을 뜻하며, 2)의 夫 역시 婦의 상대자로 일반 서민계층의 아내에 대한 남편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갑골문 자형을 살펴보더라도 妻는 성인이 된 여성이 머리를 빗어 올리고 그 머리에 笄를 꽂아 장식하고 있는 모습이고,44) 婦( )는 여성이 비(帚)를 들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45) 비녀를 꽂았다 하였으니 이 여성은 성인이 된 것이고, 상고시대 채집활동을 상징하는 帚를 들고 있다 했으니 이 여성 또한 노동이 가능한 성인이 되었음을 나타낸다.46) 결국 妻와 婦는 혼인이 가능한 혹은 이미 혼인을 한 여성의 뜻으로 혼인한 남성 夫의 배우자를 가리키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위 예에서 언급한 夫妻 혹은 夫婦에서의 夫는 妻와 婦에 상대자인 남편의 뜻으로 보아야 한다.

 

44) 穀衍奎, ≪漢字源流字典≫, 344쪽 참조. 甲骨文에서는 여성이 긴 머리를 가지런히 하여 상투처럼 하고 있는 모양이고, 金文에서는 머리를 상투처럼 하여 거기에 비녀를 꽂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것은 여성의 出嫁하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였다.
45) 穀衍奎, ≪漢字源流字典≫, 407쪽, 갑골문과 금문에서 帚는 모두 비를 형상화한 것이라하였다.
46) 劉志成, 앞 책, 201쪽. 갑골문에서는 帚로 婦의 의미를 나타내었다. 帚는 많은 나무 가지를 묶은 것으로 이것은 여성이 채집활동을 통해 얻은 것이다. 당시 채집활동의 중심은 성인 여성이었으므로 帚의 本義는 부녀자를 가리킨다. 이로부터 婦의 자형은 채집하는 여성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노동이 가능한 성인여성은 대부분 혼인하였기 때문에 婦는 이미 혼인한 여성의 의미로 파악할 수 있다 하였다.


성인남성의 丈夫도 夫처럼 妻와 婦의 상대자의 뜻으로 변화되었다.

≪戰國策⋅燕策一≫에서 “남편이 공무의 소임을 다하느라 3년간 돌아오지 않으니 그 아내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였다. 그 사람이 물었다. ‘그대의 남편이 돌아오면 어찌 할 것이오?’

그 아내가 말하였다. ‘걱정마시오. 나는 약주를 준비해 남편이 오기를 기다릴 겁니다.’ 남편이 돌아오니 아내는 첩에게 약주를 부어 들고 그를 맞이하라 하였다.”47)라 하였으니 이때의 丈夫 역시 아내 妻에 대한 남편의 뜻으로 사용된 것이다. 게다가 여기에서는 丈夫의 상대로 妻와 妾을 함께 언급하고 있어 가정 내 남편과 아내 그리고 첩의 지위도 짐작할 수 있다.

 

一夫一妻 혼인 형식이 확립되면서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가 분명해져 혈통의 父子 승계가 확실해질 수 있었다. 사회생산력을 주도하며 권력을 장악해가던 남성과 달리 여성은 점차 가정 안에서 생활하며 활동범위가 제한되었을 뿐 아니라 자녀 생산도 대를 잇는 일로 그 역할이 폄하되면서 남성에게 종속되는 지위로 변화되었다.

妻와 婦에 대한 許愼의 풀이에서도 이와 같은 사회모습이 반영되어 있다.48) 가정에서 아내는 비록 남편과 나란한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남편에게 복종하여야 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儀禮≫와 ≪白虎通≫에서는 남편을 “至尊의 위치의 사람”이고,49) “아내의 벼리가 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50) 이것은 곧 가정의 최고 권위가 남편에게 있으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에 따라 복종해야 함을 뜻한다. 다시 말해 가정의 모든 일을 통솔하는 사람이 남편 곧 夫(丈夫)라 한 것이니 여기에는 一夫一妻로 확립된 고대 중국 사회의 부계질서와 이에 따른 男尊女卑의 인식이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夫와 丈夫의 本義는 성인남성이었으나 引伸되어 여성의 배우자 즉 아내에 대한 남편의 뜻이 되었다. 고대로부터 성인이 되면 관례 등을 통하여 성년이 되었음을 축하했었는데 이와 같은 관습은 夫의 자형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었다. 丈夫는 夫보다 늦게 등장하였지만 이 역시 처음에는 성인남성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로부터 “夫는 丈夫이다”라고 풀이한 것이다. 성인이 된 남성과 여성은 혼인을 하고 가정을 이루게 되는데 이에 대한 인식이 妻, 婦, 夫에 반영되었다. 이때 성인남성 夫는 성인여성 妻나 婦의 배우자로 아내에 대한 남편의 뜻으로 볼 수 있다. 결국 고대 중국봉건사회의 가부장적인 모습은 가정 내 남편의 지위를 격상시켰고 이런 男尊의 개념은 夫에 반영되어 권위 있는 남편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47) (漢)劉向 編訂 明洁 輯評, ≪戰國策≫,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08. ≪戰國策⋅燕策一≫
“其丈夫官三年不歸, 其妻愛人。其所愛者曰, ‘子之丈夫來, 則且奈何乎?’

其妻曰, ‘勿憂也, 吾已爲藥酒而待其來矣。’ 已而其丈夫果來, 于是因令其妾酌藥酒而進之。”

48) ≪說文解字⋅女部≫, “妻란 남성과 가지런한 관계의 사람(妻, 婦與夫齊者也。)”, ≪說文解字≫,
“婦는 복종한다의 뜻이다. 여자가 비를 가지고 물청소를 하는 것이다(婦, 服也. 從女持帚灑埽也。)”
49) ≪儀禮⋅喪服≫, “夫, 至尊也。”
50) (淸)陳立 撰, ≪白虎通疏證≫ 上, 北京, 中華書局, 2007. ≪白虎通⋅三綱六紀≫, “夫爲妻綱。”



 

3. 男尊 그리고 권위를 대표하는 남성관련 漢字를 통해 본 남성의 사회적 지위

 

生育과 관련된 이유뿐 아니라 사회생산이나 집단 간 분쟁으로 인한 여성과 남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모계에서 부계로 사회 변화를 유도하였다. 농업은 이미 신석기 시대에 원시적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사회의 주된 생산원은 아니었다. 농업의 발전으로 사람들의 식생활은 안정되고 부족의 규모도 확대되면서 계급의 분화도 이루어졌다. 그리고 수확된 생산물을 지키고 거처를 수호하기 위해 부족 간의 분쟁은 점차 잦아지게 되었고 이를 통해 고대 중국사회는 발전을 이어나갔다.


이처럼 사회발전의 동력이 된 농업과 전쟁은 모두 남성이 주축이 된 활동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확산은 바로 남성의 사회적 지위와 권위를 향상시킨 직접적인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남성의 활동과 관련된 漢字에는 당시 사회모습 뿐 아니라 이에 따른 고대인들의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에서는 이와 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남성관련 漢字 ‘男’, ‘君’과 ‘士’에 대한 분석을 통해 남성의 사회적 지위를 살펴보도록 한다.


 

3.1 힘쓰는 남성일꾼 그리고 ‘女’에 대한 ‘男’

사회 생산력은 농경의 발전과 함께 큰 폭으로 향상되었다. 원시농경은 신석기 시대에 이미 시작되었지만 최초의 농경은 火田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음식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없었다. 하지만 원시적으로 행해졌던 농업재배가 밭을 일구는 경작 방식으로 바뀌면서 경작지는 점차 고정되었고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음식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소규모로 행해지던 농업이 경작지에서 대규모로 행해지면서 남성은 사회생산력의 주체로서 성장하였고 이런 사회 변화와 이에 따른 남성에 대한 인식은 漢字 男에 반영되었다.

≪說文解字⋅男部≫에서 男은 “丈夫이다. 이것은 田과 力이 결합된 것으로, 남자가 밭에서 힘을 쓰는 것이다.”라 풀이하였다.

(男의 갑골문)

위 자형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갑골문에서도 男은 田과 力의 결합된 형태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力은 許愼이 힘을 쓰는 것으로 풀이한 ‘用力’ 과는 다르다.

쟁기로 번역되는 ‘耒’와 ‘力’은 갑골문에서의 모양이 비슷하여 이 둘은 원래 통용되었기 때문에 위에서 田에 결합된 力도 用力의 의미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51)

갑골문과 금문에서 耒와 力은 모두 땅을 파고 뒤엎는 농기구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耒는 U자 모양의 쇠꼬챙이를 꽂고 있으며 손잡이 쪽은 굽어져 있는 나무 몽둥이 모양이고, 力은 굽은 나무 몽둥이에 이빨처럼 날카로운 횡목이 묶여있는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52)

쟁기는 원시 농업시대로부터 줄곧 그 재질이 돌, 구리, 금속 등으로 바뀌었을 뿐 땅을 파고 갈거나 뒤엎는 데 매우 요긴하게 사용되었던 농기구였다고 하니, 이것은 牛耕이전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더할 수 없이 중요한 도구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田에 결합된 力을 단순히 힘을 쓴다로 풀이하기 보다는 농기구 혹은 농기구를 들고 있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 그 本義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51) 徐中舒, ≪說文解字段注≫ 上冊, 成都, 成都古籍書店, 1981, 96쪽. “男은 力과 田으로 구성된 것이다. 力자는 耒자와 모양이 비슷할 뿐 아니라 이 둘은 그 뿌리가 같기 때문에 통용된 것이다(男, 從力從田, 力字卽像耒形。力、耒古同來母, 于事亦通。)”
52) 王瑾⋅王立軍, <漢字與古代農耕文化>, ≪中國敎師≫, 第17期, 2008, 57쪽. “‘耒’, 一種帶有兩個杈的木棒, 木棒上部是彎曲的柄, 下部是分叉的耒尖。”, “ ‘力’, ……是一種曲木棍上綁着踏脚橫木的單齒發土農具。”


 

그런데 농기구 모양의 力에 대해 ≪說文解字⋅力部≫에서는 “힘줄이다. 사람의 근육을 형상화한 것”이라 하였다.53) 위에서 언급한 갑골문 力에 대한 설명과는 관계없는 풀이다. 각각 도구와 근육을 형상화 한 것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力에 대한 이어진 풀이에서 許愼은 어떤 행위로 공을 세우는 것이 力이니 이를 통해 큰 재난을 막을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54)

다시 말해 力이란 단순히 근육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재난을 막을만한 힘과 그에 따른 공적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근육은 능력과 공적에 대한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풀이한다면 쟁기로 설명한 力도 달리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쟁기와 같은 농기구를 들고 일하는 것은 생산을 거두기 위한 것이니 力은 수확을 위한 능력이나 거둔 생산에 대한 공로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55)

牛耕이전 쟁기는 땅을 일구는데 절대적 힘을 발휘했을 것이므로 쟁기 모양 농기구로 표현된 力도 생산에 따른 능력이나 공로에 대한 상징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力은 쟁기 형상의 농기구라는 本義로부터 引伸되어 일에 대한 능력이나 공로의 의미가 된 것이며, 남성이 어떤 일에 힘을 썼는지에 따라 각각 농기구와 근육으로 형상화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男의 다른 부분 田으로부터 농경이 경작지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위에서 田의 모양은 얼핏 보기에도 네모난 토지와 그 모습이 비슷하다.
또 ≪說文解字⋅田部≫에서도 “田은 진열하는 곳이다. 곡식을 심는 곳을 田이라 한다.”고 하였다.56)

囗와 十이 결합된 모양의 田은 阡陌 제도를 말한 것이라 하였으니,57) 이것은 田을 밭두둑 阡陌의 가로, 세로를 형상화 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58)

원시농경시기에는 쟁기로 땅을 파 씨를 심더라도 심는 거리나 양의 정도가 고정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밭두둑이이라든지 토지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었다 한다. 하지만 농업이 발전되면서 사람들은 모종을 짐승들로부터 보호하고 씨족의 소유를 구분하기 위해 울타리를 치거나 도랑을 파 토지의 경계를 두게 되었는데 바로 이런 토지의 한계가 경작지의 모습 田에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59)

53) ≪說文解字⋅力部≫, “힘줄이다. 사람의 근육을 형상화한 것이다(力, 筋也。象人筋之形。)”
54) ≪說文解字⋅力部≫, “다스리는 데 공을 이루는 것을 力이라 하는데 그것으로 큰 재난을 막을 수 있다(治功曰力, 能禦大災。)”
55) ≪說文解字⋅力部≫의 풀이에 근거해 力이 쓰임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이 引伸되어 정신이 맡은 바 일을 이루어 내는 것을 力이라 하게 된 것이라 설명하였다.(염정삼, 앞 책, 664쪽 力의 설문해자 풀이에 대한 해제1)) 또 劉志成은 力이 쟁기라는 뜻에서 능력, 공로, 힘 혹은 힘을 다하다의 의미로 引伸된 것이라 하였다.(劉志成, 앞 책, 285쪽). 이와 같은 견해에 근거해 본문에서도 쟁기로 일을 해 성과를 이룰 수 있는 힘으로 보았다.
56) ≪說文解字⋅田部≫, “田, 陳也。樹穀曰田。”
57) ≪說文解字⋅田部≫, “口十, 阡陌之制也。”
58) 염정삼, 앞 책, 660쪽 田의 설문해자 풀이에 대한 해제4). 千百은 각 판본에서 阡陌이라 썼다고 하였다.
59) 劉志成, 앞 책, 289-290쪽.


 

소규모로 행해지던 초기농경과는 달리 경작지에서의 농경은 이전보다 노동의 강도가 훨씬 커져 남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고대 중국 사회에서 남성이 농업생산의 주력이 되었을 때, 田+力이 결합된 會意字男이 탄생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부계사회 확립이나 남성의 권위 신장과도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대규모로 시행된 경작 농업에서 남성의 역할은 이전보다 훨씬 중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농업을 기반으로 사회가 발전하였기 때문에 남성은 사회생산력의 핵심적 위치로 급부상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농업의 발전은 사회 변화뿐 아니라 남성의 지위변화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중국사회에서 남성의 권위 신장의 모습은 漢字 男의 사용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1) 사내아이를 낳으면 침상에 고이 누이고, 채색 옷 곱게 입혀 손에 구슬 들어 놀게 하고,

…… 여자아이를 낳으면 방바닥에 잠재우고, 포대기로 덮어두며, 실패를 주어 놀게 하리라.60)

60) ≪詩經⋅小雅⋅斯干≫, “乃生男子, 載寢之床, 載衣之裳, 載弄之璋。

……乃生女子, 載寢之地, 載衣之裼, 載弄之瓦…”


2)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도 사내아이를 낳으면 서로 축하하지만 여자아이를 낳으면 죽여 버린다.61)
61) (淸)王先愼 撰, ≪韓非子集解≫, 北京, 中華書局, 1998. ≪韓非子⋅六反≫,

“且父母之於子也, 産男則相賀, 産女則殺之。”

1)과 2)에서 살펴볼 수 있는 男과 女에 반영된 생각은 분명한 男尊女卑의 개념으로,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姓과 氏나 女와 母에 반영된 생각과는 분명히 다르다. 姓과 氏나 女와 母에는 生育자체를 중시 여겼던 상고시대 사람들의 여성과 남성에 대한 인식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계사회에서도 혈연과 관계된 여성의 역할과 지위는 여전하였지만 농업을 기반으로 하였던 고대 중국사회에서 남성의 역할과 지위는 여성의 지위를 점차 초월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인식은 男과 女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특히 위 예에서는 男과 女를 상반되는 의미로 동반 사용함으로써 고대 중국사회 男尊女卑의 개념을 더욱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男에는 농경의 주체로서의 남성 뿐 아니라 女에 대한 男 즉 男尊에 대한 인식도 함께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男의 本義는 경작지에서 수확을 위해 힘써 일하던 남성이었지만 농업을 기반으로 한 고대 중국사회는 남성을 권위 있는 존중의 대상으로 그 지위를 격상시켰고 이런 인식은 男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런 男尊女卑의 사회적 인식은 위 1)과 2)의 예에서도 살펴볼 수 있었다. 때문에 男에는 농경사회에서 힘써 일하는 남성의 모습 뿐 아니라 남성의 권위적 모습이 함께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3.2 권위와 존중 그리고 남성의 美稱 ‘君’과 ‘士’

 

고대 중국에서는 남성을 호칭할 때 君과 士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 君은 사람에 대한 존칭으로 남녀 구별 없이 사용되고 있지만 원래 제왕이나 제후를 君이라 지칭하였기 때문에 고대에는 주로 남성에 대한 尊稱 혹은 美稱으로 사용되었다. 또 女士, 勇士처럼 현재 남녀 구별 없이 사람에 대한 美稱으로 사용되고 있는 士도 고대에는 주로 남성에 대한 美稱으로 사용되었다.


君은 尹에 口가 결합된 會意字이다. 君의 本字는 원래 尹으로 君과 尹은 통용되었다.

 


                    (君의 갑골문)                                                   (尹의 갑골문)

위 자형에서도 알 수 있듯이 君과 尹은 거의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두 자형에는 막대기 모양의 丨이 공통적으로 들어있다. 丨 모양에 대해서는 앞의 父의 갑골문 풀이에서 언급하였듯이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위 자형에서의 丨은 지팡이 혹은 뾰족한 사물을 나타낸 것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62) 즉 尹의 자형을 손으로 지팡이나 뾰족한 사물을 잡고 있는 모습으로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丨에 대해 서로 다르게 이해하더라도 “다스리는 것”으로 풀이한 許愼의 설명과 모두 통하는 바가 있다.63) 丨을 지팡이로 보고 손으로 지팡이를 잡고 있는 모습을 尹이라 한다면 지팡이를 들고 부족민들을 통솔하던 상고시대 추장의 모습이 연상되며,64) 丨을 뾰족한 사물로 보고 이것을 잡고 있는 사람을 尹이라 본다면 사건을 기록하거나 龜甲을 뚫어 점을 치던 부족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이 연상되기 때문이다.65)

 丨이 무엇이든 결국 어떤 일을 관장하는 지위가 높은 사람을 尹이라 설명한 것이니, 許愼이 “다스리는 것”이라고 풀이한 尹의 설명에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說文解字⋅又部≫에서는 또 “일을 잡고 있는 사람”을 尹이라 하였으니,66) ‘통솔하다’ 혹은 ‘통솔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을 가리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연유에서인지 尹은 고대 중국에서 신을 섬기는 사람의 호칭으로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갑골문 기록에 의하면 商代 史官의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67)

그러니까 신을 섬기는 사람에 대한 호칭이나 고대 관직명으로서의 尹은 통솔할 수 있는 비교적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는 尹의 本義가 引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계급이 발생하고 남성이 부족을 다스렸던 부계사회의 모습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62) 丨에 대해서는 여전히 풀이하는 방식이 다르지만 尹이나 君에 대한 ≪說文解字≫의 풀이나 그 뜻에 비추어 볼 때 丨을 지팡이 등으로 설명하는 것이 당시 사회상황을 고려하더라도 부합되는 점이 많기 때문이다.
63) ≪說文解字⋅又部≫, “尹, 治也。”
64) 신영자, 앞 책, 114쪽. 여기에서는丨을 지팡이로 풀이하며 부족민들을 이끌었던 추장을 연상할 수 있다 하였다.
65) 劉志成, 앞 책, 307쪽. 부계씨족사회에서 부호로 사건을 기록한다든지 점을 칠 수 있는 사람은 그 씨족에서 지위가 비교적 높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尹은 丨 즉 뾰족한 사물을 잡고 사건을 기록한 씨족 내 지위가 높은 사람을 나타낸 것이라 하였다.
66) ≪說文解字⋅又部≫, “握事者也。”
67) 范毓周, <甲骨文的‘尹’與‘工’-殷代職官考異之一>, ≪史學月刊≫ 1期, 1995. 14쪽. 陳夢家가 일찍이 尹과 工은 은나라 관직명 중 하나였다고 논증한 이래 이 견해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 보편화되었다고 한다. 西周시기 尹의 지위는 왕을 보좌하는 위치에까지 높아졌고, 춘추전국시대에는 많은 벼슬아치들이 尹이라는 직명으로 지칭되었으며 이후 尹의 사용은 더욱 광범위해졌다고 한다.


君은 위 자형을 살펴보더라도 尹 아래 口 모양이 더해졌을 뿐이다. 그래서 君은 口 모양을 단순히 입으로 보았을 때와 그렇지 않을 경우로 구분하여 설명된다. 口를 입으로 보면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명령내리는 것 혹은 명령내리는 사람처럼 말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입으로 풀이될 수 있다.68)

하지만 口 모양을 단순히 입이 아니라 축문이나 신의 말씀을 나타낸 것으로 본다면 君은 신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 풀이될 수 있다.69) 그런데 입의 기능과 종교적 측면에서 풀이한 이 두 가지 견해는 모두 ≪說文解字⋅口部≫의 “君은 존귀한 위치의 사람”이라는 풀이와 의미상 상통하는 면이 있다.70)

입으로 명령을 전달할만한 지위의 사람은 정치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일 것이며, 신의 말씀을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종교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일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口에 대한 풀이에 따라 君은 입으로 명령을 내리는 정치적 군왕과 신의 말씀을 전달하는 종교적 제사장으로 각각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71) 따라서 君
이란 許愼의 풀이처럼 부족을 통솔하는 지위에서 명령 혹은 축문을 전달하는 ‘존귀한 지위의 사람’을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君에는 계급이 발생하고 남성이 부족의 수장으로 활약하였던 당시 사회모습뿐 아니라 이후 남성에 대한 인식이 반영되었다. ≪儀禮⋅喪服≫에서는 “君은 至尊이다”라 하여 君은 존귀한 사람임을 말하였다.72) 또 ≪白虎通⋅號≫에서는 君子를 덕을 갖춘 이에 대한 존칭이라 하며 “君이란 群 즉 무리 짓는 것을 말한다.

子는 성인남자의 통칭”이라고 풀이하였다.73) 여기서 君을 무리 짓는 것이라 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마음으로 따르게 됨을 설명한 것이다. 그래서 ≪孝經≫의 글을 인용해 “군자가 효도에 모범을 보여 (다른 이를) 가리키고 변화시켜 아비 된 자를 공경토록 한다.”라 한 것이다.74) 때문에 君에는 군왕과 관련된 권위 뿐 아니라 남성에 대한 존중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후 제왕이나 제후 등의 호칭뿐 아니라 일반 士大夫 이상 혹은 고상한 덕이 있는 남성을 君이라 호칭한 것이니 이 역시 남성의 권위와 그에 대한 존중의 의미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75)

 

68) ≪說文解字⋅口部≫, “尹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명령을 내리므로 口를 더해 결합한 것이다(從尹, 發號, 故從口。)”

69) 신영자, 앞 책, 114쪽.
70) ≪說文解字⋅口部≫, “君, 尊也。”
71) 신영자, 앞 책, 114쪽. 여기에서는 口를 축문 등으로 보고 신과 인간의 매개자 즉 종교적 제사장을 君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것을 정치적 군왕과 비교하며 君의 지위를 설명하였다. 상고시대 종교적 권위자 제사장은 군왕에 버금가는 지위와 권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72) ≪儀禮⋅喪服≫, “君, 至尊也。”
73) ≪白湖通⋅號⋅右論王者接上下之稱≫, “君之爲言群也。子者, 丈夫之通稱也。”
74) ≪白湖通⋅號⋅右論王者接上下之稱≫, “君子之敎以孝也, 所以敬天下之爲人父者也。”


 

士大夫, 學士, 戰士, 志士, 士兵 등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士를 ≪說文解字⋅士部≫에서는 “일을 맡는다”라 풀이하였다.76) 여기에서 事란 任事, 즉 일을 맡는다로 풀이된다.77)

許愼은 士를 一과 十의 會意字로 보고 “숫자 一에서 시작하여 十에서 끝난다. 孔子(B.C.551-B.C.479)는 ‘十을 一로 귀납하게 되면 士가 된다’ 하였다”로 풀이하였다.78)

그리고 ≪說文解字≫의 이와 같은 풀이는 다시 士란 광범위한 사항들을 하나로 귀납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석되었다. 즉 널리 배우고, 깊이 있는 질문을 하고, 신중히 생각하고, 분명하게 분별하고, 독실하게 행동하는 사람이라면 하나의 원리로 모든 것을 관통해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니 바로 이런 사람이 十으로 一을 귀납할 수 있는 士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79)

결국 만물의 종착점으로 광범위한 어떤 사항들을 나타내는 十을 만물의 근원 一로 귀납해 정리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士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80) 그러므로 士란 박학다식하여 다방면으로 능통할 뿐 아니라 행동이나 일을 수행하는 능력 또한 탁월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士의 자형도 이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을까?81)

 

75) ≪儀禮⋅喪服≫, 위에 대한 鄭玄 注, “토지를 가지고 있는 천자, 제후 및 경대부 등을 모두 君이라 한다(天子, 諸侯及卿大夫有地者, 皆曰君。)”,
76) ≪說文解字⋅士部≫, “士, 事也。”
77) ≪白虎通⋅爵⋅右論制爵五等三等之異≫, “士란 事 즉 일을 맡는 것 혹은 일을 맡은 사람의 뜻이다. 그러므로 傳에서 ‘고금을 통해 그러한 지 그러하지 못한가를 분별하는 이를 士라 부른다’고 하였다

(士者, 事也。任事之稱也。故傳曰, 通古今辯然否, 謂之士。)”
78) ≪說文解字⋅士部≫, “數始於一, 終於十。從一從十。孔子曰, ‘推十合一爲士’”.
79) 염정삼, 앞 책, 30쪽 해제3). 여기에서는 ≪廣韻≫과≪韻會≫의 설명과≪中庸≫ 등을 근거하여, 이 구절에 대하여 해제하였다.
80) ≪說文解字⋅一部≫, “一은 처음의 태극이다. 道는 오직 一을 바탕으로 천지를 나누고 만물을 이루었다(一, 惟初太極。道立於一, 造分天地, 化成萬物。)”, ≪說文解字⋅十部≫ “十은 수가 모두 갖추어지는 것이다(十, 數之具也。)”
81) 士의 갑골문 자형은 확실하지 않다고 하여 본고에서는 금문의 士 자형을 참고하였다.


      (士의 금문자)                                                                (王의 갑골문)

士의 자형은 王처럼 무기를 형상화한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손잡이가 있는 도끼 모양을 하고 있는 위 금문 형상은 거대한 도끼로 표현된 王의 갑골문과 그 모습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원시사회에서 무기는 다양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크기의 무기를 손에 들고 전쟁에 참여했는지가 사람의 신분의 차이였다고 한다.82)

따라서 상고시대 도끼 크기는 사람의 지위를 나타내주는 상징으로 볼 수 있다. 兵, 士, 王의 자형은 각각 다른 크기의 도끼가 형상화되어 그들의 신분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들이다.83) 兵은 작은 도끼를 들고 전쟁에 임한 병졸, 士는 큰 도끼를 들고 전쟁에 임한 높은 지위 장수, 王은 거대한 도끼를 들고 전쟁에 임한 수장을 나타내기 때문에 위에서 士의 자형은 큰 도끼를 들고 있는 상당한 지위에 있던 남성이라 볼 수 있다. 또 士의 금문은 王자와 비슷하여 王은 군주이고 士는 일을 맡아 처리하는 사람을 말한다 하였으니, 이 역시 자형에서 표현된 도끼를 근거하여 그것을 들고 있는 사람의 신분을 구분해 설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84)

士의 금문과 ≪說文解字≫ 풀이를 살펴보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士의 쓰임을 설명해 주는 면이 있다. 戰士나 士兵은 전쟁과 관련된 단어로 이것은 금문의 풀이에 가깝고, 學士와 志士는 지식과 행동에 있어 능력이 있는 사람이니 이것은 ≪說文解字≫ 풀이에 가깝기 때문이다.

士大夫는 宋代 세습귀족이 몰락하면서 새롭게 등장한 관료들을 일컫는 호칭이었는데 이들은 학문과 더불어 高雅한 취미를 숭상하는 무리로서 이때의 士 역시 ≪說文解字≫ 풀이에 가깝다. 그리고 士大夫, 上士, 下士 등의 호칭에는 고대 중국사회의 변화된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이것들은 사회가 안정된 국가체제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士의 引伸된 명칭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이 빈번했던 시기 士는 수장의 곁에 그 맡은 바 임무를 수행했던 높은 신분의 무사였겠지만 사회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그 역할은 상당히 줄어들었을 것이다. 반면 사회를 경영하는 이들의 역할은 나날이 중요해져 무사 계급의 士는 조정의 일을 담당했던 卿이나 大夫와 같은 새로운 권력과 혼합되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회의 중심축이었던 무사 士는 원래의 모습과는 다른 권위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때문에 士大夫, 上士와 下士에는 이런 사회의 변화된 인식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士는 君의 경우처럼 대부분 남성에 대한 존중이나 호감을 나타내는 美稱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論語⋅泰伯≫에서는 “선비는 뜻이 크고 굳세지 않으면 안 되니, 책임은 무겁고 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 라 하였고,85) ≪荀子⋅不苟≫에서는 “장단점을 꾸미는 일 없이 있는 상황 그대로 몸소 노력을 다한다. 이와 같다면 直士라 말할 수 있다.”라 하였다.86)

이때의 士 역시 모두 남성에 대한 존칭으로 사용된 것이다. 뜻이 크고 굳세며 행동함에 있어 꾸밈없이 노력하는 것이 士라 하였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戰士, 志士, 學士와 이 외 勇士, 武士, 烈士 등의 단어에서도 남성에 대한 존중과 호감이 반영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대 중국사회에서의 士 혹은 士의 호칭은 권위와 존중을 나타내는 남성에 대한 美稱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고대 중국사회에서 남성을 君과 士로 호칭한 것은 本義에서 비롯된 남성의 권위와 이에 따른 존중과 호감이 이후 남성에 대한 호칭에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으므로 君과 士에는 남성의 높아진 지위와 권위 그리고 남성을 존중하는 사회적 인식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82) http://www.vividict.com/Wordinfo.aspx?id, 士부분 참조.
83) http://www.vividict.com/Wordinfo.aspx?id, 士부분 참조.
84) 양동숙, ≪그림으로 배우는 중국문자학≫, 차이나하우스, 2006, 252쪽.
85) ≪論語⋅泰伯≫,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86) 熊公哲 註譯, ≪荀子今注今譯≫, 臺北, 臺灣商務印書館, 1977. ≪荀子⋅不苟≫, “長短不飾, 以情自竭, 若是則可謂直士矣。” 이외도 通士, 公士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通士란 사물에 정통한 人士로서 “사물에 닥치면 잘 대응하고 일이 생기면 잘 처리한다(物至而應, 事起而辨)”라 하였고, 公士란 모든 일에 있어 공정하고 올바른 人士로서 “사심을 가지고 공적인 일을 해치지 않는다(不以私害之)”고 하였다.


 

4. 결론

 

본고에서는 남성 관련 漢字를 통하여 고대 중국의 사회모습과 이에 따른 남성의 지위변화를 살펴보았다. 2장에서는 血緣과 가정을 대표하는 남성 관련 漢字 氏, 祖, 父 그리고 夫를 분석하여 남성의 지위를 살펴보았고, 3장에서는 男尊과 권위를 대표하는 남성 관련 漢字 男 그리고 君과 士를 분석하여 그 사회적 지위를 살펴보았다.

 

모계사회 혈통계승의 중심에 있었던 여성의 지위는 부계사회로 발전하면서 점차 추락하였고 姓과 氏로 구분하였던 남녀의 호칭 관습도 변화되었다. 어머니의 유산 姓에 대한 종별표시였던 아버지의 유산 氏는 고대사회로 발전하면서 姓과 혼용되어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신분을 구분하고 귀천을 분별하는 지표가 되었다. 그러므로 氏에는 사회발전에 따른 남성의 지위변화가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남성과 生育의 관계를 인식하게 되면서 남성성을 상징하는 남성생식기는 사람들에게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그들의 생각은 祖의 本字인 且에 반영되었다.
상고시대 조상에 대한 인식은 자손 번성에 대한 공로로부터 남성조상에 대한 숭배로 변화되었다. 그러므로 조상을 대표하는 글자 祖는 且에 숭배나 제사를 나타내는 示가 더해진 형태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사회와 혼인형식의 발전으로 祖는 조부 세대 이상의 남성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남성을 生育과 관련하여 위 세대 어른으로 여겼던 당시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므로 씨족의 아버지라는 祖 호칭으로부터 이전보다 향상된 남성의 사회적 지위를 짐작할 수 있다.

 

父의 本義는 돌도끼를 들고 일을 하는 성인남성이었다가 사회와 혼인형식의 발전으로 자녀세대에 대한 한 세대 위 성인남성에 대한 통칭으로 引伸되었다.
가부장 사회에서 父는 가정의 권위를 대표하는 위엄 있는 아버지라는 의미로 그 語義가 확장되었다. 다시 말해 혈통이 아버지로 계승되는 부계사회로의 발전에 따라 父의 本義는 성인남성에서 씨족의 아버지, 그리고 다시 위엄 있는 아버지로 그 의미가 변화되었으므로 여기에는 남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서 비롯된 남성의 사회적 지위가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夫의 本義는 성년이 되어 비녀를 꽂은 성인남성이었으나 引伸되어 남편의 뜻이 되었다. 성인이 된 남성과 여성은 혼인을 하고 가정을 이루게 되는데 이에 대한 인식이 妻나 婦의 배우자 夫에 반영되어 夫가 남편의 뜻으로 사용된 것이다. 고대 중국의 가부장 사회는 가정 내 남편의 지위를 확고히 해주었고 이런 男尊의 개념은 夫에 반영되어 순종하는 아내 妻(婦)에 대한 권위 있는 남편 夫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남성을 대표하는 漢字 男의 탄생은 고대 중국의 농업발전과 관련이 있다.
대규모로 시행된 경작 농업에서 남성의 역할은 이전보다 훨씬 중시되었기 때문에 경작지에서 쟁기를 들고 힘을 다하는 모습은 그대로 남성의 상징이 되어 경작지(田)+쟁기(力)의 형태 男으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男의 本義는 경작지에서 수확을 위해 힘써 일하던 남성이라 할 수 있다. 농업을 기반으로 발전한 고대 중국사회에서 남성은 나날이 존중의 대상으로 그 지위가 격상되었고 이에 대한 인식은 男에도 반영되어 폄하된 여성 女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고대 중국사회에서 남성을 君과 士로 호칭한 것은 本義에서 비롯된 남성에 대한 존중과 호감이 이후 호칭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君이란 부족을 통솔하는 지위에서 명령 혹은 축문을 전달하는 ‘존귀한 지위의 사람’을 말한 것이다. 이로부터 제왕이나 제후 등의 호칭뿐 아니라 고상한 덕이 있는 남성을 君이라 호칭한 것이니 이 역시 남성의 권위와 그에 대한 존중의 의미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士의 本義는 큰 도끼를 들고 전쟁에 임한 신분 높은 무사였지만 사회발전과 더불어 그 뜻이 관료의 명칭, 일을 맡아 처리할 수 있는 학식과 재능이 있는 사람으로 그 語義가 확장되었다. 이로부터 引伸된 士의 뜻 대부분도 남성에 대한 존중과 권위 그리고 호감이 담겨있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君과 士에는 남성의 높아진 지위와 권위 그리고 남성을 존중하는 사회적 인식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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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http://www.vividict.com/Wordinfo.aspx?id



<Abstract>

 

This article examined ancient China's social aspects and consequent change of male status through male-related characters.

As heritage of father ‘氏’ in contrast to ‘姓’ - heritage of mother- developed through the ancient society, it was used mixedly with ‘姓’ and also became an index to identify status as well as whether being noble or mean. Therefore, ‘氏’ may have reflected change of male status.

Chinese character ‘祖’, which adds ‘示’ meaning worship or ancestral rites on ‘且’ - appearance of phallic symbols - reflected worship for male ancestors arising from worship of phallic symbol. During the period when society changed from matriarchal on e to patrilineal on e, ‘祖’ was commonly used to represent males above the generations of grandfathers.

Original meaning of ‘父’ was an adult male working with a stone ax and turned into a common name for adult males on e generation older than children's generation in line with development of society and form of matrimony. Along the way, ‘父’ extended its meaning to refer to an authoritative father.

Original meaning of ‘夫’ was an adult male wearing an ornamental hairpin at the time of becoming an adult and later changed to mean a husband.

Patriarchal society in ancient China functioned to establish a firm position of husbands in families, and this concept of male domination was reflected in ‘夫’, eventually leading to mean an authoritative husband ‘夫’ in contrast to an obedient wife ‘妻(婦).

Original meaning of ‘男’ was a male working hard for the harvest in farm lands. In agriculture-based ancient Chinese society, authority and status of males continued to increase, which was reflected in letters of ‘男’ and ‘女’ as is.

Originally, ‘君’ meant an august man delivering orders or congratulatory messages with a position commanding the tribes, while ‘士’ meant a high-ranked warrior with a large ax in the battlefield. Meanings of ‘君’, ‘士’, and most of other names in ancient China, derived from this root, reflect respect, authority and good feelings for males.


Key words: Chinese Characters, Ancient, males, Original meaning, Social Status

 

게재확정 2014. 11. 14.
출간 2014. 11. 30.




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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