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프랑스 주식시장의 붕괴로 고갱의 직업은 불안해졌다. 이때 고갱은 화가가 되기 위해 피사로와 의논하게 되고, 피사로의 소개로 폴 세잔, 아르망 기요맹 등과 친교를 맺으면서 확실하게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35세가 되던 1883년부터는 증권거래소를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하였고, 생활비가 저렴한 루앙으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생활은 점점 어려워지게 되고 그의 처가가 있는 덴마크 코펜하겐에 갔다.
그러나, 결국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파리로 혼자 돌아온 이후로는 한동안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파리 생활은 여전히 가난의 연속이었고 고갱은 벽보 붙이는 일을 하며 연명해갔다. 1886년의 제8회 마지막 인상파전에 고갱은 무려 열아홉 점의 작품을 출품했지만, 불행하게도 조르주 쇠라의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등 신인상주의 화가들의 빛에 가려 주목을 받지 못했다.
도시생활에 지친 그는 1886년 6월, 브르타뉴(Bretagne)의 퐁타방(Pont-Aven)으로 이사하여 그림에 전념하였다.
퐁타방의 주민들은 프랑스 전통 의상을 즐겨 입었으며 화가의 모델이 되는 것을 좋아하여, 많은 외국인 화가들이 퐁타방을 즐겨 찾았다. 이곳에서 고갱은 종래 인상파풍의 외광묘사를 버리고 차차 특유의 장식적이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토속적인 토기류 제작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작품은 나중에 폴 세뤼지에, 모리스 드니, 피에르 보나르 등의 나비파(Nabis)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토기에서 비롯된 그의 원시적인 관심은 1887년 남대서양의 마르티니크 섬으로 향하게 한다.
빈센트 반 고흐와의 만남
고갱은 퐁타방에서 알게 된 샤를 라발(Charles Laval)과 함께 파나마를 거쳐 마르티니크 섬에 갔다가, 이듬해 파리로 돌아왔다. 짧은 여행 기간 동안 흑인들의 집에 거주하고 그들의 일상을 지켜본 고갱은 즐겁게 지냈지만, 그곳의 여름은 너무나 더웠고 거주지는 비에 젖어 기울어졌으며 설사병과 열 때문에 매우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이때 제작된 약 10여 점의 원시주의적 미술 작품들은 파리에서 주목을 받게 된다.
특히 화상(畵商)인 빈센트 반 고흐의 동생 테오는 고갱의 작품에 큰 감동을 하여 고갱과의 거래를 시작했다. 테오와의 만남을 통해 작품에 대한 자신감이라는 수확을 얻은 고갱은 더 이상 자연을 미화하며 재현하는 따위의 그림은 그리지 않고, 사물을 자기 방식대로 단순화시키며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고갱은 파리에서 지내며 고흐와 툴루즈 로트렉 등을 알게 되었고, 특히 고흐와의 우정은 특별했다. 테오의 주선으로 고흐가 머물고 있는 아를(Arles)의 ‘노란 집’에서 같이 지내면서 그림을 그렸다. 당시 고흐는 브르타뉴에서 화가들이 모여 그림을 그리는 것을 매우 부러워하고 있었고, 화가들은 함께 모여서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여 남프랑스의 아를에 노란 집을 만들어 화가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테오로부터 생활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을 약속받아 아를로 행한 고갱은 고흐와의 그림에 대한 견해 차이로 갈등과 대립을 겪었고, 급기야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둘은 헤어졌다.
고갱은 다시 브르타뉴 퐁타방으로 가서 [황색의 그리스도],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등의 작품을 제작하였고, 조각, 판화, 도기 제작에도 전념하였다. 고갱은 에밀 베르나르, 샤를 라발(Charles Laval) 등 다른 작가들과 함께 퐁타방을 더욱 빈번히 왕래하였고, 이때 퐁타방파라고 불리는 강한 순색의 사용과 그림에 주제를 선택하는 상징주의적인 그림을 그리는 화파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그는 퐁타방 또한 매우 번잡하게 느껴 더욱 한적한 바닷가의 작은 마을인 르풀뤼로 이주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