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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근대회화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폴 세잔

Bawoo 2014. 1. 13. 23:57

폴 세잔

 

 

 

20세기 근대 회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폴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은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과 더불어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고흐와 고갱이 표현주의상징주의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작가들이라면 세잔은 입체주의와 대상의 객관적 진실을 표현하려는 현대미학의 뿌리를 제시하였고, 인상주의 이후 많은 젊은 작가들에게 새로운 실험의 장을 마련해준 작가이다. 피카소를 중심으로 한 입체파의 전개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의 작품을 시기적으로 구분해보면 [목맨 사람의 집]이 그의 인상주의 전기작품 중에서 수작으로 꼽히며,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은 성숙기의 작품으로 그의 강한 건축적 특성을 드러내는 작품이고, [목욕하는 여인들], [생트 빅투아르 산]은 후기 작품으로 대상의 진실을 구현하기 위한 끊임없는 분석과 노력의 결실로 이루어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풍요로웠던 어린 시절과 초기 작품들

1839년 프랑스 남부의 엑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난 세잔은 은행가였던 아버지(Louis-Auguste Cezanne) 덕에 평생을 풍요롭게 지낼 수 있었다. 10살이 되던 무렵 세인트 조셉 학교에서 그림을 배운 세잔은 14살에는 부르봉 학교(Collège Bourbon, 현재 Collège Mignet)에 들어갔고 여기서 에밀 졸라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6년여를 보낸 이후 아버지의 바람대로 엑상프로방스의 법과대학에 들어가 2년 동안 공부를 했다.

 

법대를 다니면서도 드로잉 수업을 계속 받아온 세잔은 1861년에 그림 공부를 위해 파리로 떠나게 된다.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으나 어머니의 지지와 이미 파리에 살고 있던 에밀 졸라의 영향을 받아 마음을 굳힐 수가 있었다. 이렇듯 힘들게 미술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지만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기교가 뛰어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심한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

 

문학, 예술 활동이 매우 활발했던 1860년대 초 파리의 미술 아카데미에서 매년 열리는 전람회에서는 전통적인 신고전주의나 낭만주의 양식을 따르지 않는 그림들을 거절해왔다. 이 때문에 작가들의 반발이 일자 나폴레옹 3세는 1863년에 낙선(洛選)한 작가들을 중심으로 낙선전(살롱 데 르퓌제, salon de Refusés)을 개최하도록 했다. 세잔은 바로 이 낙선전을 통해 처음 전시를 할 수 있었고 인상주의 작품들이 포함된 낙선전은 가히 혁명적이라 여겨졌으나, 비평가들의 반응은 비난 일색이었다.

 

 이를 계기로 세잔은 인상주의 작가들과 알게 되어 그들의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무례하고 수줍은 성격 탓에 친밀해지지는 않았다. 이 시기 세잔의 작품은 이전의 수채화나 스케치들과는 매우 다른 양식의 어둡고 무거운 색조가 주를 이룬다. [옷 입는 여인], [강간], [살인자] 등이 이 시기의 작품으로, 세잔 초기의 작품에서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다.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세잔

1870년 7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하자 세잔은 연인 마리-오르탕스 피케(Maire-Hortense Fiquet)와 함께 마르세유 인근의 에스타크(L'Estaque)로 떠난다. 1871년에 전쟁이 끝나고 파리로 돌아온 세잔과 마리는 이듬해 아들 폴을 출산하지만, 아버지로부터 매달 100프랑의 지원을 받고 있던 세잔은 아버지에게는 마리와 폴에 대해 비밀로 한다. 1878년 무렵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화를 내며 일시적으로 지원을 끊었다가도, 이후 매달 400프랑의 생활비를 보내주었으며 유산으로는 400,000프랑을 남겨주어 세잔으로 하여금 평생 경제적인 걱정을 하지 않도록 도움을 줬다.

 

폴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잔은 인상주의 화가 카미유 피사로의 초대를 받아 가족과 함께 우아즈 강 유역에 있는 퐁투아즈에서 생활한다. 여기서 세잔은 피사로와 함께 풍경화를 그리며 자연에서 받는 느낌을 표현하고자 했다. 세잔은 자신의 예민한 성격을 참고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유일한 사람인 피사로를 '신이자 아버지'라고 언급하기도 했으며, 자신을 피사로의 학생이라고 표현했다. 피사로의 영향으로 세잔의 작품들은 한층 밝아졌으며, 세잔은 인상주의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배우기 시작했다. 인상파 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하고, 빛의 영향과 반사에 대한 수많은 관찰과 연구를 진행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색채나 색조의 순간적 효과를 이용하여 관찰한 세계를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인상파의 방식에 만족하지 않았다. 세잔은 사물의 순간적인 변화보다는 사물의 변하지 않는 측면을 표현하려 했던 것이다. 이 시기의 가장 유명한 그림인 [목맨 사람의 집](1872~73)은 이러한 특징들을 뚜렷하게 나타내고 있다.

 

세잔은 마르세유에 오르탕스를 남겨둔 채, 파리와 프로방스를 오가며 첫번째(1874)와 세 번째(1877) 인상파 전에 참여했다. 이를 통해 수집가 빅토르 쇼케(Victor Chocquet)의 관심을 끌어 작품을 팔게 되었지만 동시에 신랄한 비평을 받는다. 한 비평가(Louis Leroy)는 세잔의 작품 [쇼케의 초상화]에 대해 "이상하게 생긴 머리와 색깔은 임산부에게 충격을 줄 수 있고 태아에게는 황열병을 옮길 것이다."라며 혹평했다.

 

세잔은 1882년까지 꾸준히 전람회에 작품을 제출했으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시할 수 있었던 작품은 강하고 굴복할 줄 모르는 남자의 모습을 표현한 [화가의 아버지]이다. 작품 속 인물은 신문을 보고 있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가 보는 보수적 성향의 신문을 친구 에밀 졸라가 쓴 진보적인 에벤느망(L'Événement)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이 시기의 또 다른 작품인 [현대적인 올랭피아]는 의사 가셰마네의 [올랭피아]에 대해 칭찬한 것을 듣고 그린 작품이다. 마네의 [올랭피아]에서의 검은 고양이는 강아지로 바뀌었고, [현대적인 올랭피아]에 새롭게 등장한 남자는 올랭피아를 올려보고 있다. 이 작품은 색채와 터치가 다분히 인상주의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 왼편의 분홍색 커튼과 오른쪽의 꽃병을 통해 가운데 여인에게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으며, 흑인 하녀와 배경의 엷은 녹색은 전경의 짙은 녹색, 원탁의 붉은색과 강한 대비를 이루어 매우 경쾌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프랑스 남부 에스타크에서 새롭게 형성된 작품세계

1880년대 초부터 약 10년간 프로방스에만 머물면서 작품활동을 이어간 세잔은, 이 시기에 보다 성숙한 작품세계를 완성해나갔다. 파리 중심의 인상주의자들에게서 벗어나 그만의 새로운 세계를 형성한 것이다. 오르탕스의 남동생이 소유한 에스타크(L'Estaque)의 생트 빅투아르 산이 보이는 집에 머물면서 그린 그림들에는 깊은 공간과 평면적인 구도를 동시에 표현한, 새롭고 흥미로운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1886년은 세잔과 그의 가족에게 전환점이 되는 해였는데, 이 해에 오르탕스와 결혼한 세잔은 아버지가 사망하며 물려준 유산으로 넉넉한 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친구 에밀 졸라가 그의 소설 [작품(L'oeuvre)]에서 자신을 실패한 화가로 묘사한 데에 분개하여 오랜 우정을 끊어버렸다.

 

 

 

세잔에게 바치는 경의

1890년 이후 세잔은 죽을 때까지 크고 작은 사건들에 시달리며 당뇨병을 앓기 시작했고 작품에 더욱 몰두하여 가족과 친구들에게서도 멀어져 은둔자처럼 지냈다. 그의 작품들은 널리 알려지게 됐지만 실제 만나는 사람은 극소수였던 터라 마치 전설적인 인물처럼 표현되기도 했다. 가족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스위스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지만 결국 별거에 이르렀다.

1895년부터는 생트 빅투아르 산의 오두막집을 빌려 다양한 그림을 그려 나갔는데, 이 시기의 작품들은 입체파 양식에까지 영향을 준다. 또한 같은 해 파리에서 화상 볼라르(Ambroise Vollard)의 갤러리에서 생애 단 한 번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100여 점이 넘는 작품이 전시되었고 인상주의 특성을 가졌으면서도 지적이고 야성미 넘치는 작품을 그려낸 세잔은 많은 관심을 받았다.

1899년과 1900년의 전시회 참여 이후, 마침내 여러 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카유보트 컬렉션은 파리의 뤽상부르 미술관에서 세잔의 작품 2점을 전시했고, 베를린 국립미술관은 세잔의 풍경화 1점을 구입하기도 했다. 젊은 미술가들은 세잔을 존경하게 되었고, 상징파 화가였던 모리스 드니는 세잔의 정물화를 보면서 감탄하고 있는 미술가들을 주제로 한 [세잔에게 바치는 경의]를 그렸다. 풍경과 거대한 누드들을 성공적으로 결합한 뛰어난 연작 [수욕도(목욕하는 사람들)]는 20세기 화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어, 피카소는 이 작품을 본떠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렸다.

 

오랜 당뇨병이 악화된 세잔은 1906년 10월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소나기를 만나 심한 독감과 폐렴에 걸리게 된다.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며칠이 지나 사망한 세잔은 그의 고향 엑상프로방스에 묻혔다. 죽은 다음 해, 그의 작품들을 회고하는 대규모 전람회가 파리의 가을 살롱전에서 열려 많은 찬사를 받았다.

출처 : 장계인의 그림 이야기
글쓴이 : 백포화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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