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세잔
1870년 7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하자 세잔은 연인 마리-오르탕스 피케(Maire-Hortense Fiquet)와 함께 마르세유 인근의 에스타크(L'Estaque)로 떠난다. 1871년에 전쟁이 끝나고 파리로 돌아온 세잔과 마리는 이듬해 아들 폴을 출산하지만, 아버지로부터 매달 100프랑의 지원을 받고 있던 세잔은 아버지에게는 마리와 폴에 대해 비밀로 한다. 1878년 무렵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화를 내며 일시적으로 지원을 끊었다가도, 이후 매달 400프랑의 생활비를 보내주었으며 유산으로는 400,000프랑을 남겨주어 세잔으로 하여금 평생 경제적인 걱정을 하지 않도록 도움을 줬다.
폴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잔은 인상주의 화가 카미유 피사로의 초대를 받아 가족과 함께 우아즈 강 유역에 있는 퐁투아즈에서 생활한다. 여기서 세잔은 피사로와 함께 풍경화를 그리며 자연에서 받는 느낌을 표현하고자 했다. 세잔은 자신의 예민한 성격을 참고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유일한 사람인 피사로를 '신이자 아버지'라고 언급하기도 했으며, 자신을 피사로의 학생이라고 표현했다. 피사로의 영향으로 세잔의 작품들은 한층 밝아졌으며, 세잔은 인상주의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배우기 시작했다. 인상파 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하고, 빛의 영향과 반사에 대한 수많은 관찰과 연구를 진행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색채나 색조의 순간적 효과를 이용하여 관찰한 세계를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인상파의 방식에 만족하지 않았다. 세잔은 사물의 순간적인 변화보다는 사물의 변하지 않는 측면을 표현하려 했던 것이다. 이 시기의 가장 유명한 그림인 [목맨 사람의 집](1872~73)은 이러한 특징들을 뚜렷하게 나타내고 있다.
세잔은 마르세유에 오르탕스를 남겨둔 채, 파리와 프로방스를 오가며 첫번째(1874)와 세 번째(1877) 인상파 전에 참여했다. 이를 통해 수집가 빅토르 쇼케(Victor Chocquet)의 관심을 끌어 작품을 팔게 되었지만 동시에 신랄한 비평을 받는다. 한 비평가(Louis Leroy)는 세잔의 작품 [쇼케의 초상화]에 대해 "이상하게 생긴 머리와 색깔은 임산부에게 충격을 줄 수 있고 태아에게는 황열병을 옮길 것이다."라며 혹평했다.
세잔은 1882년까지 꾸준히 전람회에 작품을 제출했으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시할 수 있었던 작품은 강하고 굴복할 줄 모르는 남자의 모습을 표현한 [화가의 아버지]이다. 작품 속 인물은 신문을 보고 있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가 보는 보수적 성향의 신문을 친구 에밀 졸라가 쓴 진보적인 에벤느망(L'Événement)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이 시기의 또 다른 작품인 [현대적인 올랭피아]는 의사 가셰가 마네의 [올랭피아]에 대해 칭찬한 것을 듣고 그린 작품이다. 마네의 [올랭피아]에서의 검은 고양이는 강아지로 바뀌었고, [현대적인 올랭피아]에 새롭게 등장한 남자는 올랭피아를 올려보고 있다. 이 작품은 색채와 터치가 다분히 인상주의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 왼편의 분홍색 커튼과 오른쪽의 꽃병을 통해 가운데 여인에게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으며, 흑인 하녀와 배경의 엷은 녹색은 전경의 짙은 녹색, 원탁의 붉은색과 강한 대비를 이루어 매우 경쾌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프랑스 남부 에스타크에서 새롭게 형성된 작품세계
1880년대 초부터 약 10년간 프로방스에만 머물면서 작품활동을 이어간 세잔은, 이 시기에 보다 성숙한 작품세계를 완성해나갔다. 파리 중심의 인상주의자들에게서 벗어나 그만의 새로운 세계를 형성한 것이다. 오르탕스의 남동생이 소유한 에스타크(L'Estaque)의 생트 빅투아르 산이 보이는 집에 머물면서 그린 그림들에는 깊은 공간과 평면적인 구도를 동시에 표현한, 새롭고 흥미로운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1886년은 세잔과 그의 가족에게 전환점이 되는 해였는데, 이 해에 오르탕스와 결혼한 세잔은 아버지가 사망하며 물려준 유산으로 넉넉한 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친구 에밀 졸라가 그의 소설 [작품(L'oeuvre)]에서 자신을 실패한 화가로 묘사한 데에 분개하여 오랜 우정을 끊어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