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文學) 마당 ♣/- 戰後 출생 작가

하성란의 『그 여름의 수사 (修辭)』

Bawoo 2017. 5. 16. 22:27

 

 하성란의 『그 여름의 수사 (修辭)』

[소감] 열한 살짜리 소녀를 화자로 내세워 한 가족의 이야기를 '할머니가 죽었다'는 문장을 시작으로 풀어나간다.

주로 단문으로 쓰인 이 작품은  화자인 주인공 나이에 맞는 목소리로 낭독해주어서인지 아주 맛깔나게 들었고 그런 작품으로 생각되었다. 작가의 '여름의 맛'이라는 작품을 들으면서 평범한 소재를 가지고 참 잘도 맛깔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 작품 역시 그랬다. 단편 수작.

-위 제목 을 누르면 듣기를 할 수 있습니다.]

 

[작품 전문]

그해 여름 음력 7월 12일에 할머니가 죽었다. 전보가 왔을 때 엄마는 여름 배추로 김치를 담그던 중이었다. 전보는 때를 고르고 골라 꼭 이럴 때 온다며 엄마는 붉은 양념이 묻은 두 손을 내밀었다. 이크, 혹시라도 유니폼에 고추 양념이라도 튈까, 집배원 청년이 뒤로 무러섰다. 집배원은 엄마 몸을 훑으면서 손을 대신해 전보문을 끼울 만한 틈새를 찾았고 엄마는 어디 받아 들 데가 없나 두 겨드랑이를 차례로 들썩거렸다가 다시 조금 입을 벌려보았다. 집배원이 엄마의 겨드랑이 쪽에 전보 쪽지를 내밀었지만 엄마는 턱을 치켜들며 입을 벌렸다. 에크, 이번에는 엄마가 겨드랑이를 벌렸지만 집배원은 엄마 입 쪽으로 손을 뻗었다. 이크, 마치 둘은 태켠이라고 하는 듯 보였다. 굼실굼실. 능청능청. 사람 몸속에는 저마다의 사명감이라는 것이 있듯 리듬감이라는 것이 있다고 했다. 훗날 누군가에서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 내 리듬은 톡톡토토톡, 빠른 열 박자였다. 연일 30도를넘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양력 날짜는 잊었고 음력 날짜로만 기억되는 한여름 어느 날이었다.  

아차, 한참 손아래인 조카뻘 되는 사내지만 그래도 내외는 해야 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을 때, 그제야 이심전심 마음이 통한 집배원 청년은 두 귀까지 발갛게 얼굴이 달아 올랐다. 엄마는 양념 묻은 손으로 전보를 받아 들었다. 모친금일새벽사망. 엄마는 간을 보듯 입맛을 다시고는 딱 두 마디만 했다. “각중에…… 복중에……” 느닷없는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충격과 임종을 지키지 못한 안타까움이 ‘각중에’, 푹푹 찌는 찜통 더위 속에서 치러야 할 초상 걱정이 ‘복중에’란 말에 담겨 있었다.

동(洞)을 통틀어 한두 대 구경할까 말까 했던 백색 전화기 대신 보급형 검정 전화기가 의 네다섯 집에 한 대 꼴로 개통되던 때였다. 그런대도 여전히 학기 초마다 학교에서 실시하던 가정환경조사서에 피아노, 냉장고 항목 다음으로 전화기가 자리 잡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전화가 개통된 지 반년 가까이 지났지만 한 번도 전화벨이 울리지 않는 날이 허다했다. 그러니 육지의 끝에서 다시 배로 세 시간 남짓 들어가야 하는 섬에서 전화란 여전히 귀하디귀한 물건이었을 것이다. 바다에 공깃돌처럼 점점이 흩어진 섬들과 서울을 잇는 유일한 통신 수단은 우편이었다. 다급한 소식은 전보로 오갔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고릿적 말이 그래서 아직까지 효력을 발휘하던 때이기도 했다.

경부, 호남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전국이 일일생활권 안으로 좁혀졌다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심증적으로 그 섬은 내게 시차가 나는 타국처럼 멀었다. 섬에 다녀올 때마다 나는 2,3일씩 시차적응에 힘들어하는 여행자처럼 낮에 자고 새벽에 말똥말똥 깨어 있었다.

나는 살아생전의 할머니를 너덧 번밖에 보지 못했다. 고작 두어 번 할머니를 봤을 뿐인 둘째는 콧물이 흐르는 것처럼 몇 번 훌쩍이더니 금방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놀러 나갔다. “할머니 오늘 새벽 사망 부산항에서 내일 열 시에 만납시다.” 신문지 한 귀퉁이에 엄마의 말을 받아 적었다. 손구구를 해보지 않아도 열 자가 넘었다. 아버지가 있는 D시에도 전화가 보급되기 시작했지만 아버지는 무슨 연유에선지 전화를 놓지 않았다. 전화는 쌍방향 통신 도구였다. 한마디로 우리 집 전화기는 무용지물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관계가, 아버지와 엄마의 관계가 꼭 우리 집 전화기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그 누구에게도 벨은 울리지 않았다.

엄마는 필요한 용건들이 있으면 아버지에게 종종 편지를 썼다. 편지를 쓰다 급작스레 부레가 끓어오르면 편지를 구겨 던지고 어깃장을 놓듯 전보를 쳤다. 엄마가 하고 싶은 말을 퍼붓듯 다 쏟아놓으면 그것이 몇 자 건에 나는 그걸 열 자로 요약했다. 전보는 열 자까지 기본요금을 받았다. 엄마는 양념 묻은 ‘스댕 다라이’를 소라 나게 행궈 수돗가에 비스듬히 엎어놓고 동생들 씻길 물을 ‘양은 바케쓰’에 받아 곤로에 안쳤다. 심지가 닳은 곤로는 쉽게 불이 붙지 않고 거무스레한 연기만 피웠다.

전보를 치려면 송수신기가 설치된 대형 우체국까지 가야 햇다. 버스 의자에 앉아 전문을 쓰윽 훑어보았다. 전보를 받아볼 아버지 입장에서 보자면 할머니, 란 호칭부터가 잘못이었다. 이상하게도 엄마들은 아이를 낳는 그 순간부터 모든 인척 관계를 아이의 입장에서 재정리해버린다. 급기야 언제부턴가 엄마는 남편을 ‘아빠’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영화도 한몫했다. 여주인공 역할의 엄앵란이란 배우가 남편 역을 맡은 남자 주인공을 배웅하면서 “아빠, 바이 바이, 일찍 돌아오셔야 돼요”라고 콧소리를 한 것이 엄마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졌다. 엄마가 아버지를 아빠, 라고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버지는 엄마를 “한나야” 하고 내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할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아버지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 할머니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다. 아버지에게는 할머니, 하면 떠오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결핍이라 결핍이지.” 언젠가 아버지가 말했다. 엄마가 옆에서 거들었다. “상처면 상처고.” 엄만 일찍 아버지를 여의였다. 아버지, 하면 떠오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할머니를 생각하면 시간 모자라 못 푼 마지막 문제 같어. 이십 점짜리 주관식 문제.” 엄마는 무릎을 쳤다. “하, 그거 미치지, 미쳐.” 그러다 엄마는 핏, 웃었다. “그 문제 답만 적어 냈으면 백점 만점을 받았을 거고?” 엄마와 아버지는 딱 10분이 문제였다. 10분까지는 서로 잘 맞았다. 엄마의 말처럼 마지막 한 문제의 답만 적어 냈더라면, 아버지의 삶은 백 점 만점이었을까. 삼십대 중반에 교직을 그만둔 뒤로 아버지는 손대는 일마다 족족 낭패를 겪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우리 할머니는 너덧 번밖에는 만나지 못했지만, 매번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몇 장의 사진 속에서 가장 강렬한 것은 역시 그 모습이다. 시골 변소라는 것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어른 송장이라도 묻을 만한 커다란 독을 땅에 묻고 그 위에 널빤지 두 개를 얹어 두었다. 들고나는 구멍 정도만 있을 뿐 걸쇠가 달린 문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할머니는 인기척도 없이 그 널빤지 위에 앉아 있었다. 두 개의 널빤지 위에 고르게 힘을 분배하며 굽어 있는 청동빛 두 다리가 하관이 빤 할머니의 역삼각형 얼굴을 받혀주고 있었다. 흡사 박물관에서 보았던 빗살무늬토기와 그 받침대 같았다. 역시 인기척도 없이 나를 보고도 할머니는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움찔하지도 않았다. 나는 할머니의 두 다리가 만들어내는 예각에서 검고 축 늘어진 성깃성깃 털 몇 가닥 남지 않은 할머니의 거기를 다 보고 말았다. 할머니는 놀란 내 시선을 따라가 자기 것을 남의 것 들여다보듯 요모조모 뜯어보더니 낄낄 웃었다. “니 아배도 고모덜도 다 이 구녕에서 뽑았다 아이가.” 그 뒤로 나는 할머니, 하면 악다구니를 쓰며 이웃집 여자와 머리끄덩이를 잡은 채 먼지 나는 길 위를 구르던 모습이나 물 좋은 생선을 받기 위해 고무 다라이를 들고 억척스럽게 어시장을 향해 뛰던 모습 다 제쳐두고 할머니의 거기가 떠올랐다. 할머니의 거기서 아버지와 고모들이 국수 면발처럼 뽑아지고 있었다.

우체국은 버스 정거장 맞은편 대로, 인도와 인도가 만나는 길모퉁이에 비스듬히 서 있었다. 얼마 전 그곳 앞을 지나다가 그 건물을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30년이 지났는데 그 자리에 여전히 우체국인 채로 남아 있었다. 달라진 건 그땐 그 건물이 가장 컸었는데 지금은 고층 빌딩에 둘러싸여 가장 작은 건물이 되었단 것뿐이었다. 그 건물 앞으로 나 있는 육교는, 육교는 사라지고 없었다. 우체국으로 건너가지 못하도록 정말 육교가 없어졌으면, 바라던 때도 있었다. 어떤 전문이냐에 따라 육교는 짧게도 길게도 느껴졌다. 나는 육교를 건너가 엄마의 시끄러운 마음을 열 자로 요약해 전보를 치곤 했다.

우체국의 전보 전신환 창구의 여직원은 내가 우체국 문을 열고 들어설 때부터 단박에 날 알아봤다. 나는 왼쪽 뺨으로 여직원의 시선을 받아내면서 소포 끈을 묶고 우표를 붙이는 사람들 사이에 낀 채 전보 문구를 고쳤다. 우선 ‘할머니’는 ‘어머니’로 바꿨다가 다시 ‘모친’으로 고쳤다. 최대한 줄이거나 뺄 수 있는 말을 빼야 했다. ‘오늘 새벽’도 지웠다. 할머니가 언제 돌아가셨는지는 내일 부산항에서 만나면 차차 알아지게 될 일이었다. 반년 가까이 만나지 못한 엄마와 아버지가 말문을뗄 화제도 남겨둬야 했다. 요령부득인 것도 다 요령이 있었다. 쳐내고 쳐내니 딱 모친사망부산항낼열시.라는 문장이 가지치기한 정원수처럼 날씬하게 서 있었다.

우체국 직원이 날 기억하는 것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열한 살짜리 계집애가 혼자 와서 ‘아이들위독급상경하시오’라는 전보를 쳐 달라고 했으니 은연중에 내 얼굴을 흘끝 보았을 것이다. 게다가 열한 자 글자를 바득바득 열 자가 가격에 해주면 안 되겠느냐고 우겨댔으니 눈 코 입까지 조목조목 따져보았을 것이다. 신출내기 여직원은 호기심을 참지 못했다. “아이들 다 위독한 것 같은데, 넌 대체 누구니?” 마음 같아선 그 여직원 앞에서 고개를 처박고 딱 죽고 싶었다. 여직원은 무슨 사정인지 말 안 해도 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깊게 두어번 끄덕이더니 선ㄴ심 쓰듯 ‘하시오’를 ‘바람’으로 고쳐 열 자를 맞춰주었다. 창구 앞에 서 있으면 안쪽에 난 방이 들여다보였다. 머리가 귀밑까지 벗겨진 중년 사내가 앉아 이런저런 장비를 만지작거리면서 전보를 받거나 전보를 쳤다. 사내는 다른 가볍고 날렵한 장음ㅁ과 모음들이 뿔뿔이 날아가 D시의 우체국 수신부를 기준점으로 ‘헤쳐 모엿!’ 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아이들이 위독하다는 전보에도 아버지는 상경하지 않았다. 대신 ‘때 이르게 핀 벚꽃 이파리들이 마당 가득 분분히 날렸소’로 시작되는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를 읽을 때 엄마는 수줍어했다. 그래서 달콤한 문장들 사이에 숨은, 여유가 있으면 돈 좀 부쳐달라는 부탁에도 화내지 않았다. 달이 차고 기울 듯 엄마의 심경도 차고 기울기를 반복했다. 매번 통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전보를 쳐대는 엄마를 보면 언ㄴ젠가 봤던 사마귀가 떠올랐다. 어쩌다 길 한복판에 나와 선 사마귀를 자전거 바퀴가 밟고 지나갔다. 사마귀는 배 아래쪽이 납작 눌렸다. 어찌어찌 겨우 일어선 사마귀는 성했던 방금 전의 모습대로 돌아가기 위해 낫처럼ㅁ 생긴 앞다리를 들어 올리려 안ㄴ간힘을 썼다. 또 누군가 밟고 지나갔다. 이번엔 아예 일어서지 못한 채 바닥에 납작 눌러 붙었다. 눌려 조금씩 죽어가면서도 사마귀는 서 있을 때처럼 앞다릴 낫처럼 세우려 눈에 띌 듯 말 듯 움직였다. 그 포즈만에 진정 자신을 사마귀답게 한다는 듯, 엄마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속뜻이 전달되지도 않을 전보를 쳤다. 언제부턴가 전보 창구의 여직원과 나 사이에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이 생겼다. 마구 지워지고 뭉개진 글자 투성이의 쪽지를 창구 안으로 내밀었다. 전보 문구를 한눈에 훑어본 여직원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쪽지가 창구 밖으로 다시 밀려나왔다. 나는 틀린 답안지를 받아 오답을 고치는 심정으로 또박또박 글씨를 썼다. 그 모습이 흡족한 듯 쩝, 여직원은 입맛을 다셨다. 전문을 받아든 중년 사내는 D시를 향해 타전했다. 골똘히 부호를 보내고 있는 그의 옆모습이 쳐낼 말을 너무 쳐낸 아홉 글자의 전보문처럼 조금은 헐벗은 듯 보였다. 모친사망부산항낼열시. 나는 아까부터 여직원의 눈꼬리에 달려 있던 질문에 대한 답을 그제야 할 수 있었다. “기예요.” 정말? 여직원이 눈꼬리를 치켜떴다. 버선목이면뒤집어보여. “기예요. 긴데 왜 아니래요?”

 

꿈도 없는 짧은 잠에서 불현 듯 깨어 둘러보면 여전히 밤이었다. 조도를 낮춘 객실은 어둑했다. 모두들 곯아떨어졌는지 의자 등받이 위로 보이는 뒤퉁수는 몇 되지 않았다. 등이 배길 때마다 자세를 바꿀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둘째는 인상만 썼다. 고개를 돌리자 복도 건너 옆자리에 앉은 엄마의 얼굴이 들어왔다. 엄마는 자면서도 인상을 쓰고 있었다. 아버지 꿈을 꾸는 게 분명했다. 규칙적인 기차의 리듬감 때문인지 밤이면 깨서 울어대던 막내는 한 번도 깨지 않았다.

종착역인 부산역에 내렸을 때는 정년 오지 않을 것 같던 아침이 밝아 있었다. 자기 키만 한 빗자루를 든 청소부가 플렛폼의 잠에서 덜 깬 얼굴로 쓰레기를 모으고 있었다. 무박이나 다름없는 밤기차에서의 하룻밤에 뒤통수가 납작 눌리거나 눈이 퉁퉁 부은 사람들이 와르르 출구로 몰렸다. 엄마는 칭얼대는 막내를 업고 보폭이 좁은 둘째는 앞서 걸리고, 가볍지만 부피가 큰 가방은 내게 들린 채 부산항으로 갔다. 아버지를 기다리는 동안 여객선 개찰구 앞의 돼지국밥집에서 아침 요기를 했다. 둘째와 내가 국밥 그릇 하나에 머리통을 부딪히며 밥보다는 장난에 골몰할 때 엄마는 국밥 국물을 막내 입에 떠 넣을 뿐 자신은 한 숟가락도 입에 대지 않았다.

여객선 터미널은 사람들로 부산했다. 엄마 손을 놓치고 겁에 질린 아이가 사방을 둘러보며 울었다. 행상들이 사람들 틈을 비집고 다니면서 목청을 높였다. 알아들을 수 없는 사투리들이 떠다녔다. 혹시 아버지가 우리를 알아보지 못할까봐 우리는 개찰구 바로 앞에 선 채 쏟아지는 땡볕을 머리통으로 다 받아내고 있었다. 일곱 살인 둘째는 아버지처럼 생긴 남자의 뒷모습만 보면 “아빠다!” 하고 외쳤다. 처음 몇 번은 둘째 말에 이 남자 저 남자 뒤를 쫓았지만 나중에는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었다. 10시가 되자 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피서객들과 베 한복을 입은 촌부와 촌로들을 태운 여객선이 항구를 떠났다. 갈매기 떼가 일시에 날아올라 뱃전에 따라붙었다. 엄마는 재우쳐 물었다. “열 시, 분명히 열 시라고 했냐?” 아버지는 이번 전보 또한 앞의 무수한 전보들처럼 엄마의 엄포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겨버린 듯했다. 엄마는 내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았다는 듯 칫. 혼자 웃었다. “칫, 사람 꼴 우습게 되는 거 한 순간이네. 지 새끼 셋을 내 맡으로 뺀ㄴ놓고도 그렇게 날 몰라? 어떤 미친년이 사람 목숨 갖고 장난을 쳐? 아따우습네왜날몰라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엄마야말로 1년에도 두어 번 자식들의 목숨을 경각에 놨다 내려놨다 하는 인물이었다.

엄마는 다시 막내를 들쳐 업었다. 둘째를 앞서 걸리고, 뒤처지는 내게 빽 성질을 내면서 버스 터미널로 가 D시로 가는 버스를 탔다. 정오가 되자 해는 버스 천장 위에 떠서 버스를 양은 냄비처럼 달궈놓고 있었다. 창문은 다 열려 있었지만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나무 이파리들은 정물화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의자의 비닐 시트가 가장 먼저 뜨거워졌다. 시트와 닿은 맨살에 금방 땀이 고여 흘렀다. 물까지 데워 씻긴 공도 없이 동생들은 땟국이 좔좔 흘렀다. 터미널에서 사 멋인 복숭아 과즙이 얼굴에 끈끈하게 묻어 버스 안으로 날아든 파리가 자꾸 달려들었다. 버스 뒤 칸에 일렬로 앉은 우리는 목에 스프링을 댄 인형처럼 버스의 리듬에 맞춰 고개를 까딱거리며 D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애써 온 길을 다시 한 시간 반가량 뒤로 물리는 셈이었다. 등받이 위로 드러난 각양각색의 뒤퉁수들도 끄덕끄덕 움직였다. 엄마는 막내를 안고 졸다가도 버스가 돌을 밟고 튀거나 별안간 급정거를 해 고개가 끄으덕 떨어지면 어김없이 문을 떠 새삼스럽다는 듯 창밖 풍경을 훑어보곤 했다. 어젯밤 바른 분은 땀이 흐른 자리를 따라 얼룩덜룩 골이 팼다. 골속으로 기미가 낀 맨 살이 보였다.

폭이 좁은 강이 D시를 양분한 채 흐르고 있었다. 자동차 생산 공장의 유니폼을 입은 수십 명의 직원들이 한꺼번에 자전거 요령을 울리며 다리를 지나갔다. 담이 높아 집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고급 주택가를 지났다. 한여름에도 대중목욕탕을 다녀오는지 샴푸와 비누 등속이 담긴 플라스틱 바구니를 든 아가씨 둘이 슬리퍼를 질질 끌며 지나갔다. 바구니에서 흐른 물이 점점이 그 뒤를 따라갔다. 마른 하천을 건넜다. 길 가던 사람에게 주h를 보여주었다. 우리가 지나친 길에 아버지의 집이 있었다.

빠리 의상실. 다른 곳보다 돌출된 쇼윈도 안에는 얼굴과 사지가 생략된 상반신 마네킹이 전라 상태로 놓여 있었다. 넓지 않은 점방은 이사 간 그대로 치우지 않았는지 실패와 천 조각들이 굴러다녔다. 가개 안쪽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분명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곤로에 감자를 찌고 있었다. 보지 못한 반년 사이 깡말라 두 눈이 움푹 꺼져 있었다. 왜 텅 빈 의상실에 앉아 이 시간에 감자나 삶고 있는 건지 아버지 자신도 모르는 듯했다. 점방 어디에서도 마당 가득 분분히 날린다는 벚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새것 같은 양은 냄비는 밑바닥만 검게 그을려 있었다. 뚜껑이 들썩이며 김이 올랐다. 아버지는 조심조심 뚜껑을 열고 쇠젓가락 끝으로 감자를 쑤셔보았다. 미싱을 들어낸 듯한 구멍 뚫린 탁자 위에 정백당이 수북이 담긴 작은 접시가 놓여 있었다.

문소리가 나자 아버지는 문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말했다. “빠리 의상실, 영업 안 합니다.” 빠리의상실영업은그만. 분이 뽀얗게 오른 하지감자 하나를 막 쇠젓가락으로 들어 올리는 아버지의 눈에 만족감이 가득했다. 감자 끝에 살짝 정백당을 묻히려는 순간 아버지의 눈이 점방에 들어선 엄마의 눈과 마주쳤다. 아버지는 쇠젓가락에 덴 듯 화들짝 놀라며 감자를 떨어뜨렸다. 엄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이 셋과 함께 부산으로 다시 D시로 이어진 여정이 너무 힘겨워서 엄마는 아랫입술을 꼭 물었다. 엄마가 아버지에게 득달같이 달려들며 소리쳤다. “아빠, 지금 제 정신이야? 왜 지금 이 시간에 여기 있냐고?” 니가제정신이게말이돼?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아버지가 엉거주춤 일어섰다. “각중에 뭔 일이고?” 아버지가 떨어뜨린 하지감자가 엄마의 발에 밟혀 으깨졌다. 아버지는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이기 뭔 일이고. 왜 하필 어무이고, 와?” 엄마는 아버지를 다그쳤다. “아빠, 정말 왜 이래? 내가 무슨 잘못을 했어? 난 아빠와 결혼해서 애 셋 낳은 죄밖에 없어. 그런데 나한테 왜 이래?” 애셋낳은죄난잘못없어. 갑자기 엄마 등에서 떨어져 사방을 두리번대던 막내가 바락바락 울어대기 시작했다. 엄마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루 동안 참았던 무더위와 갈증과 피로감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엄마의 발에 챈 곤로가 기우뚱 기울면서 양은 냄비가 엎어졌다. 감자들이 데굴데굴 굴러 점방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아버지는 어리벙벙해서 이 모든 상황을 꿈인 듯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아버지가 바라던 삶은 뽀얀 하지감자를 삶을 때의 고요함인지도 모른다. 감자의 아린 맛과 섞인 정백당을 맛보는 아주 짧은 시간의 단맛인지도 모른다. 흙투성이가 되어 뭉개진 감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평화는 깨졌다. 엄마는 떼쟁이 아이처럼 두 다리를 바동거리면서 울었다. “물어내. 다 물어내. 물어내란 말이야.” 이러니좋아다때려치워. 아버지는 이참에 아이 버릇을 고치려 매정한 체하는 아버지처럼 보고도 못 본 척 엄마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엄마는 한 번도 아버지 앞에서 저렇게 울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남겼다는 유품들을 안아도 보고 냄새도 맡아봤지만 아버지의 얼굴 대신 역삼각형의 도형만 그려졌다. 외할머니와 만나면 엄마는 늘 할아버지에 대해 물었다. 할아버지는 군인이었다. “어린 게 뭘 안다고 울다가도 아버지만 보면 울음을 딱 그쳤지.” “모자만 쓰면 울어 젖히는 통에 네 아버진 네 앞에서 모자를 벗었어. 누구 앞에서도 안 벗는 모잔데.” 엄마는 엉엉 울었다. 어떻게든 우리에겐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남겨주겠다는 듯 엄마는 아기처럼 발버둥질을 치고 있었다.

가게는 두 평 남짓한 방과 붙어 있고 방은 그 방의 반만 한 부엌으로 이어졌다. 부엌문을 열면 바로 주인집 마당과 통했다. 부뚜막에는 하지감자 박스만 덜렁 놓여 있고 쌀이나 다른 양념병은 보이지 않았다. 연탄을 때지 않는 아궁이에는 아버지가 마신 빈 소주병들이 거꾸로 박혀 수정 결정체처럼 삐죽빼죽 솟아 있었다. 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미친 년 궁둥이’만 한 부엌이었다. 여름 들어 내내 감자만 삶아 먹었는지 박스 안의 감자는 벌써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막내는 아버지가 손뼉을 치고 부를 때마다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 등에 매달렸다. 엄마가 궁둥이를 돌릴 수도 없는 부엌에서 막내를 업고 이른 저녁을 차리는 동안 우리는 데면데면 아버지와 점방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가 낯선 건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긴 방학이 끝나고 개학 첫날 마주친 담임선생님 같았다.

아버지는 밤 9시가 되자 가게 문을 닫았다. 함석판으로 된 문 덮개를 번호대로 끼우자 출입구 쪽의 마지막 함석판에 몸을 굽히고 간신히 드나들 수 있는 쪽문이 생겼다. “아부지, 우리 저기로 나가봐도 돼요?” 절로나갈래대단히심심. 둘째가 선생님에게 질문하듯 물었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우리는 진작부터 신기했던 쪽문을 들락거리면서 웃고 떠들었다. 함석판의 숫자들은 하나같이 페인트가 줄줄 흘러내린 채로 말라 있었다. 함석판 다음에는 곧바로 5가 이어졌다. 죽을 4자와 동음이라 부러 4자를 쓰지 않는 듯했다. 죽은 할머니가 생각났다. 어제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을 할머니. 할머니도 4 자라면 끔찍이 싫어했다. 뱃사람의 아내에게는 금기 사항이 너무 많았다. 하지 않을 말을 입에 올리면 할머니는 땅에 대고 침을 세 번 뱉었다. 이젠 말할 수도 밥 먹을 수도 무엇보다 아무에게 욕을 내뱉고 어디 한 번 해보자고 대거리를 할 수 없다. 죽은 할머니. 그러자 같이 죽었을 할머니의 거기가 떠올랐다.

 

부두를 따라 크고 작은 배들이 묶여 있었다. 배들은 묶여서도 물결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선착장에서는 상한 꼬막무침 냄새가 났다. 꼬막무침에 체한 적이 있던 둘째는 배를 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얼굴이 노래져서는 엄마 등에 기대 서 있었다. 부두에는 온갖 부유물들이 둥둥 떠 있었다. 바닷물은 흘수선을 넘을 듯 다가왔다. 피서객들이 객실을 다 차지했다. 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피서객들 틈에 잠깐 육지에 일보러 나왔던 섬사람들이 모로 누워 잠을 청했다. 바닷바람과 햇볕에 그을린 피부가 기름에 전 창호지 같았다. 여기저기서 피서객들의 짐이 툭툭 발에 차였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은 갑판 위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낡은 여객선에서는 질 낮은 벙커시유냄새가 났다. 선착장을 벗어난 배는 방파제 끝에 정박된 원양어선들 아래를 지나갔다. 컨테이너 박스들이 쌓인 항구를 벗어나자 멀리 오밀조밀 건물들이 들어선 부산이 보였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둘째는 배에 탄 순간부터 먹을 것을 질금대고 있었다. 곳곳에 뚜껑을 딴 분유 깡통들이 놓여 있었다. 둘째가 헛구역질을 할라치면 엄마는 재빨리 둘째의 턱밑에 분유 깡통을 들이댔다. 비닐 장판은 끈끈해서 살갗이 달라붙었다. 갑판 위로 올라갔다. 선미 쪽에 기름에 전 창호지 같ㅌ은 낯빛의 촌부들이 배의 쇠난간을 붙들고 일렬로 서 있었다. 허리가 앞으로 꺾일 때마다 입에서 뿜어져 나온 토사물이 바다로 떨어졌다. 나는 갑판에 벌렁 드러누웠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발치 위에 있었다. 구름 떼가 천천히 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어질어질했다. 밑도 끝도 없이 갈릴레이 생각이 났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여덟 글자였다. 그래도 지구는 돕니다. 그래도 지구는 도는구나. 나는 엿가락 늘이듯 글자를 열 자로 늘여가면서 지구의 자전 방향을 거슬러 걸었다. 배에도 리듬이 있었다. 나는 간신히 계단을 내려가 선미 쪽으로 다가갔다. 비슷비슷한 삼베 한복을 입은 촌부들은 누가 누군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한 사람이 객실로 내려가면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채우는 듯했다. 뒷모습만 보니 그들은 똑같은 한복을 맞춰 입은 어머니 중창단처럼 보였다. 어머니 중창단들이 차례로 허리를 구부렸다. 나는 뜨겁게 단 쇠난간을 움켜쥐었다. 울컥 속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쳤다. 배에 타기 전 녹아 흘러내릴까봐 허겁지겁 핥아먹었던 누가바의 바닐라 향이 역겨웠다.

4년 만의 귀향. 아버지는 4년 전 여름에 가족을 데리고 섬으로 들어왔었다. 피서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할아버지를 구슬러 가산정리하려는 속셈이었다. 한때는 서너 척의 배가 있었다지만 내가 태어났을 때는 작은 발동선 한 척이 전부였다. 할머니가 옥수수나 고추를 길러 뽑아 먹는 산 밑의 밭 몇 뙈기는 안중에도 없었다. 아버지는 해수욕장 길목에 자리잡은 할아버지의 집에 더 눈독을 들였다. 일일생화권으로 섬까지의 교통이 편리해지면 서울에서도 피서객들이 몰려들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바다에 흩어진 비경들은 여름이 아닌 다른 계절에도 관광 상품이 될 만했다. 할아버지는 말도 꺼내기 전에 발끈했다. 내가 태어났을 무렵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서울 행차를 했던 할머니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가고 싶었다. 할머니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넌 잠자코 있으라며 아버지에게 눈짓을 보냈다. 결국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싸움으로 번지고 말았다. 바락바락 대드는 할머니의 머리채를 할아버지는 그물 걷듯 휘어잡았다. 그물이 올라오듯 할머니의 몸이 할아버지 손에 끌려 올라왔다. 그날 밤 배도 끊기고 통행금지마저 내린 그 시커먼 밤에 아버지는 우리를 데리고 할아버지 집을 나왔다.

불과 4년 사이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 아버지의 예상은 적중했다. 관광객 수는 해마다 늘고 있었다. 해안가를 따라 난 길만 아니었다면 집으로 가는 길조차 찾지 못할 뻔했다. 주점과 다방, 여관, 음식점들이 해수욕장 길목을 따라 즐비하게 늘어섰다. 배가 들어오면 동네 여인들이 고무 다라이를 들고 배를 반기러 나오던 길이 어느새 유흥지로 변해 있었다. 뱃사람 가운데 절반이 배에서 내렸다. 힘든 뱃일 대신에 한 철 벌어 1년 나는 장사로 눈을 돌렸다. 비좁은 길은 피서객들과 호객을 하는 상인들로 붐벼 발 떼기도 힘들었다. 누군가 아버지에게 다가서며 알은체를 했다. “어? 옥이 아이가?” 아버지는 비좁은 길에 우리를 세운 채 서둘러 초등학교 동창과 악수를 나눴다. “말도 마라. 니가 안 와가 발인도 몬하고……” 동창은 가게에 대고 소리를 높였다. “퍼뜩 이리 와 봐라.” 가게 밖으로 키가 작고 통통한 여자가 쪼르르 튀어나왔다. “내 얘기했제? 이형옥이 서울서 선생하는.” 여자가 아, 반색하더니 고개를 숙였다. 아주 오래 전에 아버지가 교직을 그만둔 사실을 동창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골목을 따라가는 동안 몇 사람이 아버지를 알아봤고 아버지는 서둘러 악수를 나누었다.

그물이 걸린 돌담에 조등이 달려 있었다. 비좁은 마당은 동네 사람들로 북적였다. 광대뼈가 도드라진 검게 그을린 얼굴과 오종종한 키 때문에 사람들은 일가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말다툼이라도 하듯 소리 높여 떠들어댔다. 부엌이나 변소 쪽에서 요란하게 웃으며 할머니가 뛰쳐나올 것 같았다. 툇마루 아래 할머니의 것으로 보이는 슬리퍼가 엎어져 있었다. 신을이없는쓰레빠두짝.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무리 사이에서 딱따구리처럼 도드라진 목소리들이 튀어나오며 아버지의 양팔에 매달렸다. “오빠아! 와 이제 오십니꺼!” “오빠, 어메가 죽었습니더!” “새이야, 먼 길 오느라 욕봤다.” 먼길이면다욕이나먹어. 아버지는 가까스로 중심을 잡으며 고모들을 떼어놓았다. “알았다, 알았어. 우선 아버지 좀 보고.” 어두운 방구석에 틀어박혀 강소주만 들이켜던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보자마자 불같이 화부터 냈다. 발인 날짜 하나 맞추지 못한 아들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어려서 죽은 두 아들을 떠올렸다. 놓친 고기가 커 보이는 법이었다. 발인을 하러 왔다가 주저앉은 사내들은 이미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큰고모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아버지의 귀에 대고 소곤댔다. 부르르 떨던 아버지가 구두를 던지듯 벗어두고 할아버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더니 문을 닫았다. “뭐라 캐쌌노?” 할아버지의 호통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일가 같던 마을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눈빛을 교환했다. “뭔데? 뭔데?”둘째가 끼어들려는데 누군가 둘째의 머리통을 밀어냈다. “어무이 어디 계시노? 불쌍한 우리 어무이 어디 계시노, 어?” 아버지가 뛰쳐나와 마당 이곳저곳을 살폈다.

아들을 기다리다 못해 염을 하고 입관한 뒤였다. 마당 한 구석 그나마 햇빛이 들지 않는 그늘 쪽에 병풍을 치고 시신을 모셔 두는데 11시도 되지 않아 마당은 다글다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겅둥거리면서 병풍 뒤로 뛰어갔다. 관을 붙들고 아버지는 오열했다.

제상의 음식들은 반나절도 가지 못해 쉰내를 풍기기 시작했다. 과일들은 곯았다. 연신 나물과 국을 갈아 올리고 과일들도 새로 바꿔 얹었다. 새로 부친 나물에서도 갓 지은 밥에서도 꼬막무침 냄새가 난다며 둘째가 징징거렸다. 상복으로 갈아입은 엄마와 아버지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문상객들을 맞았다. 상복에 쓸린 목덜미가 벌겋게 부풀었다. 엄마와 고모들은 사람들이 안 보인다 싶으면 어디서나 치마를 벌렁벌렁 들어 올렸다. 발인 날짜가 늦춰지면서 오일장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소주를 마시던 노인이 말했다. “우짜긌노, 아들이 몬 왔는데……”-아들못와도오알장은좀. “그럼 가정이례준칙에 위배되는 거 아이가?”-준칙위반해그것은안돼. 마당 한편의 수쳇구멍에는 상한 음식들이 쌓여갔다. 파리 떼가 꼬여 들고 금방 구더기가 슬었다. 하루 종일 갗이 붙어 있는 통에 엄마와 아버지는 별일 아닌 일에도 티격태격했다. 메를 푸는 엄마에게 한 노인이 혀를 찼다. “하이고, 아낄 걸 아끼라. 메를 좀 더 올리라마. 먼 길 가는 사람 배 안 곯쿠로.” 노인 말을 고분고분 따라 고봉밥 푸듯 푸면 될 일을 엄마는 똑 쏘아붙였다. “우리 고향에선 이렇게 풉니다.” 다른 노인 둘이 유심히 보고 있다가 거들었다. “그기 어디 풍십이고?” 노인들의 이 말에 엄마는 심사가 완전히 뒤틀려버렸다. “네네, 이러면 됐나요?” 우리는그래니네가알아? 엄마는 노인들 보란 듯 메를 쌓아올렸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끼어들었다. “정말 학을 떼겠네. 어디서 또깡또깡 말대답이야?” “대체 아빤 누누 편이야? 내 편이야? 저기 노인네들 편이야?” 아빤누구편내편노인편? “난 착한 편이다, 왜?” 사사건건 아버지와 엄마는 부딪쳤다. 언젠가 만나면 싸우기만 하는데 어떻게 우릴 만들었느냐고 물었는데 엄마가 웃으며 말했다. “십 분은 괜찮잖아. 십 분이면 충분하거든.” 아버지는 고모들과 한통속이 되어 엄마의 부아를 돋우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렇지 않아도 물불 안 가리고 냅뜨고 보는 할머니가 병풍 뒤에서 벌떡 일어나 “뭐라카노!” 소리칠 것만 같았다.

마을 사람들은 볼일을 보러 오가던 중에 들러 잠시 다리를 쉬고 갔다. 고모들은 평소 할머니와 친분이 두터웠던 할머니들이 오면 부르르 끓어 넘치는 국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숨을 쉬지 못할 듯이 울다가도 정색을 하고 부엌에서 일을 돕는 마을 여자를 향해 외쳤다. “야야, 불 좀 줄여라, 국 다 졸아붙는다!” 불좀팍줄여국물다졸아. “탕에 넣을 두부캉 안 a자라나?” 나는 종종 연폿국에 넣을 두부나 동생에게 먹일 과자를 사 나르는 잔심부름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피서객들이 몰려 들어 배는 두 편이나 증편되었다. 수많은 피서객들이 떠나가면 또 다른 피서객들이 몰려들어 깊은 밤까지 해변은 소란스러웠다.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사건 사고도 많아졌다. 지서장과 순경 둘뿐인 지서도 바빠졌다.

할아버지는 그곳 사내들이 그렇듯 성격이 급했다. 바다까지 몇 미터 돌아 나가는 것이 귀찮아 아예 담장 한쪽에 개구멍을 냈다. 개구멍 밖으로 끝깐데 없이 바다가 펼쳐졌다. 아침부터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 사람들은 점심때가 되기도 전에 해변에 가득 찼다. 원색 수영복 차림의 아가씨들이 지나가면 남자들이 꼬리 긴 휘파람을 불어댔다. 몇몇 사람들은 안전 요원의 호르라기를 불어댔다. 할머니 생각에 부르르 울던 고모들도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면 울음을 딱 멈추고 담장 밖을 흘깃거렸다.

이른 아침, 피서객들이 사라진 해변 곳곳에 쓰레기가 널렸다. 둘째와 나는 아침마다 어떤 물건들이 떨어졌는지 살피러 모래밭을 돌아다녔다. 알 빠진 선글라스를 끼고 둘째가 웃어댔다. 바람 빠진 튜브에 바람을 불어보았다. 어디가 새는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 바지를 벗어놓고 가기도 했다. 그렇게 해안가를 따라 가다 보면 멸치 밭이 나왔다. 해수욕장이 유명해지기 훨씬 전부터 섬의 마른멸치는 전국 각지로 팔려 나갔다. 피서객들이 들어오지 않는 해수욕장 끝에서 섬 아이들이 모여 놀았다. 아이들은 멱을 감다 배가 고프면 모래밭으로 올라와 꾸덕꾸덕 말라가는 멸치의 살점을 발라 먹었다.

미역에 엉켜 파도에 온 수영모자는 그날의 최고 수확물 중 하나였다.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꽃이 박힌 수영모였다. 막대기로 건져내려는데 쏜살같이 달려온 웬 계집애가 모자를 확 채 갔다. 뒤따라가 잡으려 했지만 모래밭에서는 뛰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담장 안과는 너무나 다른 세상이었다. 밤이 되면 개구멍 밖의 바다부터 어두워졌다. 파도가 밀려올 때면 어둠 가운데에서 반짝 면도날처럼 하얀 날이 섰다. 문상객들이 돌아가고 나면 고모들과 엄마는 툇마루에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흥지 쪽의 불빛이 밤 깊도록 꺼질 줄 몰랐다. 빠른 박자의 노랫소리가 쿵쿵 울렸다. 해가 져도 숙소로 돌아가지 않은 젊은이들이 모래밭에 둘러앉아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술상을 놓고 있었다. 술을 따르면서 아버지는 넌지시 할아버지의 의중을 떠보았다. “이제 어떡하실랍니까? 어무이도 안 계시니 조석도 걱정이고……” “밤같이 까만 눈동자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나의 별, 부분에서 엄마가 작은 소리로 화음을 넣었다. 잠시 뒤에 고모들도 합세했다. 고만고만 또래들인 네 명의 여자들에게서 고만고만한 또래였었을 계집애들의 모습이 보였다.

“난 널 아껴. 그건 너두 알 거여.” 담장 밖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뒤에 여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것 놔. 등이 아프단 말여. 알았으니께 놓고 말혀.” 남자가 여자의 몸을 할아버지 집 담장으로 밀어붙인 모양이었다. “말 듣기 전엔 못 놔. 그러니 너두 말혀. 너도 내가 맘에 있잖여. 안 그려?” 작은고모가 쿡쿡 웃었다. “어디 것들이고? 충청도가? 아따 멀리도 왔네.” 큰고모가 조용하라며 눈을 찡긋거렸다. 우리는 숨죽이고 연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문득 우리 사이 어딘가에 끼어 할머니도 듣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애가 다는 모양이었다. “어떡하면 내 말을 믿을겨? 혈서를 쓰까? 못할 것도 읎어. 니가 하라면 시방이라도 할겨.” 혈서라는 말에 여자가 감동한 듯했다. 뜸을 들인 여자가 말했다. “무섭게 왜 이려? 나는 싫여, 무슨 혈서…… 꼭 말로 혀야 알어? 꼭 글로 써야 알……” 여자의 말은 무언가에 눌려 이어지지 않았다. 작은고모가 아고고, 간지럽다는 듯 웃었다.

아버지의 말들, 아버지도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버지의 말이 낮아졌다. “들으셨지예? 아버지도 들으셨지예? ” 아직까지 학생들을 가르치던 습관이 남아 있어 밑줄을 긋듯 꾹꾹 눌러 말을 했다. “참 멀리서들 오지예? 세상이 바뀌었어예. 일일생활권이 돼 가 하루면 몬 가는 데가 없어예.” 할아버지는 잔에 남은 술을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정확히는 아직 일일생활권이라고는 할 수 없지.” 엄마가 끼어들었다. 아버지는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부산에서 섬까지 세 시간, 아침 일찍 움직이면 서울에서도 하루면 되지, 와?” 고모들은 아버지 편을 들고 보았다. “맞아, 맞아. 일일생활ㄹ인가 뭔가.” 엄마는 물러서지 않았다. 손발안맞아딱딱못맞춰. 할아버지 집을 팔려는 아버지의 속셈을 엄마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까 일일생활권은 아직 아니라는 거야. ”그러니까 일일생활권은 아직 아니라는 거야. 서울에서 기차로 와서 배로 섬에 들어왔다 쳐. 그럼 그날로 서울까지 다시 갈 수 있느냔 말이지. 요는 그게 문제인 거지.”

요는 엄마입이 문제라는 듯 아버지는 술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고 할아버지는 쿵, 소리를 내며 자리에 누웠다. 담장 밖의 충청도에서 온 연인들은 돌아간 모양이었다. 간질간질한 말. 엄마와 아버지도 그런 말들을 주고받았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난 널 사랑해. 너두 그건 알잖아.” 아버지도 누군가의 집 담벼락에 엄마를 떠다밀며 뜨거운 입김을 쏟아 부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입에서 나는 술 냄새에 엄마는 얼굴을 돌린다. “앗, 아퍼. 등에 뭐가 배긴다구.”-“언제면 내 말을 믿을 거야? 혈서를 지금 쓸까?” 니가 하라면 지금이라도 쓸게.“ 엄마도 그 말에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엄마의 입에서 떨어질 말을 기다리며 서 있었을 것다. 엄마는 아버지의 두 눈을 말똥말똥 올려다보며 똑부러지게 말한다. “혈서는 싫어. 피는 색깔이 변해. 쓸 거면 잉크로 써줘.”

아버지는 슬리퍼를 요란하게 끌면서 밖으로 나갔다. “아빠! 어디 가?” 엄마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고모들에게 불평을 늘어놓는다. “저런 다니까요. 사람 말을 콧등으로도 안 듣는다니까요.” 젊은 남자가 바다에 대고 고함을 친다. “수정아! 사랑한다. 내 사랑 받아줘!”-사랑해수정나를받아줘. 대답은 바다가 아니라 엉뚱한 유원지 쪽에서 왔다. “이리 온나, 내 받아주께.” 사람들은 죄다 사랑을 하러 바다에 온 듯하다. 사랑을 하러 와서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고 싸움을 한다.

 

파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아이들은 일렬로 늘어서 손을 잡고는 파도가 오기를 기다렸다. 파도가 덮치려는 순간 한꺼번에 뛰어올랐다. 파도를 피하지 못하고 물을 먹은 아이들이 캑캑대며 욕설을 내뱉었다. 아버지도 섬에서 나고 자랐다. 닮았다면 누구와 닮았을까. 아이들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그 중에 수영 모자를 채간 그 계집애가 있었다. 나와 둘째는 금새 아이들에게 둘러싸였다. “이름이 뭐꼬?”-“한나, 이한나.” 하얀 이를 드러내고 아이들이 웃었다.-“한나? 그럼 야는 두나가?” 아이들이 놀리는 것도 모르고, 둘째는 덩달아 웃어댔다. 너희가 한나의 뜻을 알겠느냐. 은총이란 말을 알겠느냐. 분해 입술을 꼭 다물고 있는데 다른 머슴애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학교와 핵교의 차이점을 아나? 이번에도 아이들이 웃었다. “학교는 다니고 핵교는 댕긴다!” 계집애는 이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헤엄을 치는 연습에 몰두해 있었다. 가라앉을 듯하다가 물 위로 떠오르고 얼마 못 가 가라앉았다. 그럴 때마다 수영 모자를 쓴 계집애의 머리통만 보였다.

파출소 순경 둘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입관해놓은 관을 열었고 염습까지 한 시신을 보러 몰려든 사람들이 웅성댔다. 툇마루에서 선잠을 자고 있던 나는 불현 듯 잠에서 깼다. 병풍은 걷어졌고 마루에서 끌어간 전구가 마당을 밝히고 있었다. 관 뚜껑이 열리고 나는 미라처럼 관에서 벌떡 일어서는 할머니를 보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발인을 앞두고 아직 매장 허가도 못 받았으니 까딱하다간 오일장도 못 치르고 날짜를 넘길 게 뻔했다. 사사건건 충돌하는 아버지와 엄마, 지레 뒷짐 지고 있다가 토만 다는 동네 노인들, 길어진 초상에 동네 사람들 거둬 먹인 음식 값만 해도 적잖았다. 참고 누워 있자니 울화가 병이 되었을 것이다.

순경 중의 한 명은 아버지의 동창인 모양이었다. “이래꺼정 하는 내 마음도 알아도. 신고가 들어온 이상에는 우리도 벨 수 없다.” 할머니의 급작스런 죽음에 이런저런 소문이 들고 일어났다. 할아버지 집으로 오던 첫날, 모의를 하듯 중얼거리던 동네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날도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크게 싸웠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아고, 나 죽는다. 할머니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속이 상한 할머니는 부엌으로 들어가 할아버지가 먹던 소주병을 들고 나발을 불었다-그 다음날 할아버지가 깨어났을 때 곁에 누운 할머니는 죽어 있었다. 독살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할아버지가 지랄 같은 할머니의 잔소리를 견디다 못해 자는 할머니의 귀에 독약을 흘려 넣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모인 사람들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도대체 그게 말이나 됩니까! 이런 모함이 어디 있습니까? 야? 이거 리어 왕도 아니고!” 아버지의 말은 엄마의 말에 또 끊겼다. “리어 왕은 아니지, 햄릿이면 몰라도.”

한여름 무더위에 나흘이나 누워 있었을 할머니의 얼굴이 물크러진 수박 같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염포를 풀자 도드라진 광대뼈가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할머니의 얼굴을 잘 봐두려고 했는데 뒤에 서 있던 고모가 내 눈을 가렸다. 곧 이어 고모들이 오열했고 아버지가 어무이, 하면서 마당을 뒹굴었다. 그 무더위에도 할머니의 얼굴은 비교적 깨끗했다고 했다. 어른들 몰래 그 광경을 다 본 둘째가 말해주었다. 순경이 할머니 입을 벌리자 쌀알이 나왔다고 했다. 이상하게도 싸알이 꿈틀대더라고 했다. 할머니의 혀를 쭉 빼내 살펴보더라고 했다.

“예. 됐습니다!” 순경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사람이 나서 시신을 수습했다. 관 뚜껑을 닫으려는데 그때까지도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던 엄마가 앙칼지게 외쳤다. “잠깐만요!” 시신의 머리 쪽에 있던 사내가 화들짝 놀랐다. “하이고 식겁이야!” 사람들의 눈이 모두 엄마에게로 몰려 자초지종을 대라고 캐묻고 있었다. “오른손이 아니냐구요!”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다. 엄마는 답답한지 가슴을 두어 번 쳤다. “그러니까 왼손 위에 오른손이 와야 되는 거 아니냐구요?” 뭔 소리고? 이번에도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엄마가 스스로 두 손을 활짝 펴서 배꼽 위에 왼손을 놓고 그 위에 오른손을 포갰다. “여자는 오른손이 위로 가야 하는 거 아니냐구요!” “왼손, 오른손 순서가 있나?” 막내고모가 물었다. 어른들이 다가가 시신을 살펴보았다. “오른손이 맞는데?” 이번에도 엄마는 가슴을 쳤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 말고 할머니 입장에서 봐야죠.” 누군가 뒤에서 말했다. “그기 어대 벱이고?” 엄마가 구시렁 댔다. “법, 법. 거참 법 되게 좋아하시네.” 왼손이다, 오른손이다, 의견이 분분ㄴ했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도리가 없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드디어 매장 허가가 떨어졌다.

아침부터 집 안은 염폿국 냄새가 진동했다. 마당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상여는 문밖에 대기하고 있었다. 새로 장만한 듯 상여의 단청이 선명했다. 색색의 연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상여꾼들이 서둘러 염폿국에 밥을 말아 먹었다. 잠에서 깬 피서객들이 발돋움을 해서 담 안을 엿보고 지나갔다. 하나둘 동네 노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관이 상여에 실렸다. 상여꾼들이 상여 곁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섰다. 그때였다. 개구멍으로 검게 탄 한 아이가 뛰어들었다. “아가 빠졌십니더!” 아이는 말을 못 잇고 손가락으로 바다만 가리켰다. 사람들이 우르르 개구멍 밖으로 나가 달렸다. 아버지는 상여와 바다를 번갈아 보며 손바닥만 비볐다. 뒤늦게 개구멍을 빠져나온 나와 둘째는 사람들 뒤를 따라 달렸다. 아이들이 모여 서 있었다. 몇몇 아이들이 바다로 들어가 자맥질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매번 혼자만 나왔다. 어른들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삼베옷이 물을 먹고 축 늘어졌다. 옷릏 벗어 던진 어른들이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1,2분이 길게 느껴졌다. “옆에 있었는데 잠깐 딴 데 본 새에 없어짓십니더.” 아이가 울고 있었다. 몇 번의 헛자맥질이 이어졌을까, 잠시 뒤 물속에서 솟구친 머리가 소리를 질렀다. 주위에 있던 어른들이 그쪽으로 몰렸다.

계집아이였다. 수영 모자를 썼던 그 계집아이였다. 얼굴이 파리했다. 어른들의 손이 다급하게 움직였다. 인정사정없이 가슴을 눌러댔다. 갈비뼈가 다 드러나는 앙상한 가슴이 덜컹 움직였다. 몇 분 흘렀을까 여자애가 입으로 물을 토해냈다. 켁켁, 두어 번 기침을 하더니 숨을 쉬기 시작했다. 다 큰 계집애가 입을 크게 벌리고 울었다.

 

할머니는 평생 총총 걸어 다니던 고샅을 상여 타고 마지막으로 돌았다. “아이고, 편테이!”상여 위에 앉아 동네를 천천히 둘러보며 웃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피서객들은 상여를 보자 움찟 물러섰다. 행렬은 꼬리를 물고 길어졌다. 돈을 꾸었거나 꿔줬거나 떼였거나 부침개를 나눠 먹었거나 물 좋은 고기를 가로챘거나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웠거나 동네 사람 누구 하나 할머니와 추억 하나 없는 사람이 없었다. 상여를 따라오던 노인들이 중얼거렸다. “까딱했으믄 육일장 될 쁜 했다.” “육일장? 육일장은 안 한다. 구일장이지.” 한 노인이 궁금하다는 듯 다시 물었다. “와 구일장일꼬. 삼 일 오 일이믄 다음은 칠 일이지.” “그 많은 객식을 우찌 다 알낏고.” “하, 구일장으로 했다간 위에 소리가 들어갈끼다. 가정이례위반으로다가.”

해안가로 상여가 들어섰다. 왜 곡을 안 하노, 했다. 아버지가 아고, 했다. 고모들이 따라 했다. 곡을 하던 엄마가 깨진 병 조각이라도 밟은 듯 어쿠, 했다. “또 뭐야? 제발 좀 가자!” 아버지의 지청구가 이어졌다. 엄마는 김치 생각을 했다. 담궈 놓고 입도 대지 못한, 지금은 촛국이 되었을 김치 생각을 하자, 이제 좀 살 만한 모양이라고 혼자 웃었다.

미역에 감겨 쓸려 갔다 다시 밀려오는 것은 꽃이 달린 수영 모자였다. 계집애가 물에 빠지면서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물속에서 수영 모자가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계집애는 사경을 헤매었을 것이다. 이젠내꺼야쓰는게임자. 나는 얼른 수영 모자를 썼다. 해안선 끝으로 흰옷 입은 사람들이 점점이 멀어졌다.

할아버지는 그 이듬해 집을 팔고 서울로 왔다. 서울 와서 뒷방 노인네가 됐다. 아버지는 그 집을 아내에게 소개했던 동창에게 팔았다. 선생이라 자랑스럽다는 그 친구는 아버지가 선생이라는 점을 악용했다. 학생들만 가르친 아버지는 세상 물정에 어두웠다. 할아버지의 그 집은 관광상품집이 되었다가 여관이 되었다가 러브호텔로 바뀌었다. 호텔 프런트에 앉아 있던 그 아저씨는 여자 혼자 투숙하겠다고 하자 의심스런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그 뒤로도 몇 번 나는 아버지에게 전보를 쳤다. 어느 날 엄마가 말한 내용을 찢어버리고 ‘당신이너무보고싶어요’라고 보냈다. 마치 그 말을 기다리느라 수년을 떠돈 사람처럼 아버지가 돌아왔다. 사명감과 함께 내 속의 열 박자 리듬감도 다른 박자로 옮겨 탔다. 상급생이 되면서 배운 수사법에 빠져든 탓도 있었다. 내 속의 문장은 만연체로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길고 또 길어졌다.

나는 멀어지는 상여를 보며 서 있었다. 나도 할머니처럼 거기로 국수 뽑듯 애 여섯쯤 낳고 나면 시원하게 빗장 풀 듯 두 다리를 열게 될까. 할머니가 알면 조금은 슬플 것 같았다. 이런저런 모습 다 두고 하필 거기로 할머닐 떠올리게 될 테니까. 그렇게 할머니는 마지막 길을 떠났다. 총총총총총총이만총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