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 피아노 소나타 3번 Piano Sonata No.3 in B minor, Op.58 Frdric Franois Chopin 1810∼1849
<조르주 상드의 초상 >
쇼팽의 소나타는 모두 세 곡인데. 그 중 소나타로서의 바른 형식을 갖고 있는 것은 c단조 작품4번 뿐이고, 다른 두 곡은 각 악장을 모두 아무 연결 없이 만들어 후에 가서 정리한 듯 하여, 각 악장을 독립곡으로 보면 훌륭하지만, 소나타의 형식에서 보면 불완전한 악곡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제1번 c단조는 오늘날 거의 연주되지 않는다.
그 무렵부터 폐결핵을 앓고 지중해의 진주로 불리는 아름다운 휴양지 마요르카섬에서 극진한 상드의 간호와 모성애 같은 사랑으로 많은 작품을 썼다. 피아노 소나타 제 3번 작품 58는 1884년 노안의 조르쥬 상드 집에서 그녀와 함께 지낼 때 작곡된 곡이다. 전체적인 규모가 웅대하며 쇼팽의 천부적인 각종요소가 이 곡에 포함되어 있다. 쇼팽의 전 작품 중에서 이보다 더 넓고 장대한 느낌의 것도 없을 것이다.
제 1악장 : 알레그로 마메스토소 Allegro maestoso 제1주제는 행진곡풍의 화음에 떠 받쳐져 묵직하게 연주되며 ,제 2주제는 애무하는 듯한 칸타빌레의 선율을 유도한다, 제시부의 최후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회고적이다.그 센티멘탈한 개운치 않음은 우리들의 가슴에 와 닿는다,.
제 2악장 : 스케르쪼 몰토 비바체 Scherzo. Molto vivace 우아하고 경쾌한 자제력이 있는 스케르초. 아름답고 빠른 8분음표가 상하 좌우로 쉬는 일 없이 진행된다.감미로운 악장이다. 노안의 상드의 조용한 거실에서 상드와 쇼팽 두 사람이 조용하게 달콤한 사랑을 이야기 하고 행복에 취해 있는 듯하다.꿈 꾸는 듯한 곳에서 눈을 뜨고 자기의 용모에 황홀해 하는 작곡자가 상기된다. 화려하고 정열적이다.쇼팽이 작곡한 곡중에서 가장 당당하고 가장 위대한 음악이다. 1810년 3월 1일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가 세례를 받은 날은 2월 22일로 기록되어 있어 실제 출생일은 7일이 앞선다.
아버지는 바르샤바 육군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친 프랑스인 니콜라스 쇼팽이고 어머니는 폴란드의 명문 귀족 출신인 유스티나 크지노프스카이다.
어려서부터 집에서 피아노를 배우고, 1816년 정식으로 보이치에흐 지브니에게 피아노를 사사했는데, 1818년 공개 연주회에서 기로베츠의 협주곡을 연주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스승 지브니는 쇼팽에게 더이상 가르칠게 없다면서 스스로 그만두었다. 1822년부터는 바르샤바음악원 창설자인 J.엘스너에게 화성법과 대위법을 배우고, 중학 재학 중에 러시아 황제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 칭송을 들었다. 또 시골에서 여름방학을 보내며 폴란드의 민속음악을 접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1826년 음악원에 입학하여 피아노소나타와 변주곡 등을 작곡하고, 또 이 무렵 J.N.후멜과 사귀게 됨으로써 창작하는 데 있어서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830년 11월 쇼팽은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 중이었는데, 이때 폴란드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 그후 그는 후멜, 탈베르크, K.체르니 같은 피아니스트와 교류를 가졌고, 1831년 9월 빈을 떠나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하여, 러시아군에 의해 폴란드혁명이 진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혁명에 큰 기대를 걸었던 쇼팽의 실망은 컸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이 혁명 실패의 소식을 듣고 작곡한 것이 오늘날 《혁명 에튀드(작품 10의 12)》로 불리는 작품이다.
1831년 9월 중순 파리로 나온 쇼팽은 당시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C.칼크브레너에게 피아노를 가르침을 받기로 하였으나, 그의 개성이 상실될 것을 염려한 친구 F.리스트와 F.힐러의 만류로 이를 포기하고 말았다. 1832년 그는 파리에서의 최초의 연주회를 개최하여 호평을 받고, 그뒤 폴란드 귀족의 소개로 파리 사교계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또 이 무렵부터 창작활동도 활발하였다.
1836년 드레스덴에서 바르샤바 시절의 여자친구인 M.보진스카를 다시 만났고, 이듬해에는 약혼으로까지 진전되었으나, 이때 쇼팽은 이미 폐결핵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주위의 반대도 많아 결국 파혼하게 되었다. 이무렵 마리 다구 백작부인이 주최한 파티에 참석하여 한 여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여류문학가인 조르주 상드였다. 남성의 기능을 상실한 쇼팽보다 6세나 연상인 그녀는 쇼팽의 지병에 신경을 쓰며 모성애적 애정으로 그를 돌보아줌으로써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약 10년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1846년 가정불화와 쇼팽의 건강악화가 원인이 되어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그후 쇼팽의 건강상태는 악화일로를 거듭하였지만,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1848년 영국으로 건너가 연주회와 개인적 모임 등에서 피아노를 계속 연주하였다. 파리로 돌아온 후 그의 건강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개인교수 이외의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이듬해 가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장례식은 2주 후인 10월 30일에 거행되었는데, 그가 바르샤바를 떠날 때 선물로 받은 폴란드의 흙이 그의 유해 위에 뿌려졌다.
쇼팽의 작품에는 가곡과 첼로소나타, 피아노삼중주곡 등도 있으나, 중요한 것은 약 200곡에 이르는 피아노곡이다. 그리고 협주곡 2곡, 소나타 3곡 이외에 전주곡·연습곡·발라드·야상곡·즉흥곡·왈츠·폴로네즈·마주르카 등의 낭만파적인 소품이 압도적으로 많은 점이 특징이다. 작품에는 후멜과 J.필드의 영향이 다소 엿보이기는 하지만, 그의 양식은 거의 독립하여 형성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개성적이다.
작품의 특징은 부드러운 선율에 의한 호모포니[單旋律]한 구성에 있으며, 선율의 움직임에 자유스러움을 주기 위하여, 반주 쪽을 화음적 패턴으로 함으로써 움직임을 억제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리듬이나 프레이징에서도 당시로서는 상당히 자유로운 구조를 쓰고 있으며, 또 화음에서도 불협화음의 사용과 반음계적 취향을 구사함으로써 시대를 앞서가고 있다. 한편 마주르카 같은 민속음악의 형식을 쓴 것에서는 폴란드 민속음악에서 볼 수 있는 드로운 바스와 교회선법(敎會旋法)이 사용되고 있다. 피아노 연주에서는 쇼팽은 페달의 사용에 의해 음색의 종류를 늘렸으며, 또 약박(弱拍)을 악보에 기보(記譜)된 형보다도 약간 인접한 강박(强拍)에 접근시키는 연주법(tempo rubato:奏法)을 사용하여, 후세의 피아노 연주법에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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