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斷想, 閑談]/<단상, 한담>

세월(歲月)

Bawoo 2017. 12. 12. 09:18


세월(歲月)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다가

이제 그만 쉬어야 해, 더 이상 하다간 다쳐라고

몸에서 신호를 보내주면

마지못해 붓을 놓고 시간을 보며

갈수록 작업 시간이 줄어들고 있구나

흐르는 세월을 몸은 도저히 못 이기는구나라고 탄식을 하며

거실로 나와 TV를 켠다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인 취침자세를 하고서

잠시 보는 가 하다가

이내 깊은 단잠에 빠져들기 위하여


군 복무 시절 하사관 학교에서

20킬로 완전군장을 하고

100리를 야간행군해서 유격장 갈 때

1시간을 걷고 10분간 돌아온 휴식 시간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달콤한 잠

그땐 그 10분간의 잠이

이 세상에 부러운 거 아무것도 없을 만큼 소중하고 행복했었지라는

그 기억을 이따금 떠올리면서

내 맘대로 눕고 싶을 때 아무 때나 누울 수 있는 지금은

얼마나 행복한가라는 생각도 하면서.


근데 이 놈의 TV는 왜 이 모양인가?

내 살아낸 세월 탓이겠지만

이젠 어지간한 일은 다 시큰둥해지는 

내일모레면 70인 나이 탓이겠지만

봐달라고 유혹하는 곳은 엄청 많아졌는데 

정작 볼 곳은 왜 이리 마땅한 데가 없는지.


마치 젊은 시절 호기심에

술도 마실 줄 모르면서 기웃거렸던

붉은 등들이 쭈욱 늘어서있는 골목길 술집을

순례하듯 한 바퀴 돌아만 나오던 마음일 때와 똑같은 심정이다

어쩌다 TV를 켤 때마다 늘.


그래도 행여 잠시라도 볼 곳이 있을까 싶은 마음에

여기저기 돌려본다

손가락으로 리모컨을 까닥까닥 눌러서

혹여 눈에 번쩍 뜨이는 아가씨라도 있을까 싶어

어쩌다 한 번씩 기웃거리던 골목길 붉은 등 켜진 집들을 스쳐 지나가듯

이젠 리모컨 숫자판 누르는 것조차 귀찮지만

잠이 들 때까지 수면제 역할 해 줄 곳을 찾기 위해서  


문득 한 음악프로그램이 잠깐 눈에 들어온다

 서른이 되어있는 늦동이 내 아들보다 훨씬 젊어보이는

세 명의 남녀가 사회를 보고 있는 모습이.


그 모습에

내 젊은 시절 즐겨봤던 음악프로그램 사회자의 모습이 겹쳐보인다

임**하고 이**였었지 아마,

그들은 내가 누군지 알 턱이 없지만

알고 싶어하지도 않을 테지만

나 역시 이젠

그들에 대해 뭐 별 의미를 부여 안 하는 삶을 살고 있으니

남들이야 어떻게 보고 생각하건

나는 내게 주어진 삶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냈으니 그걸로 되었다라는 생각에

그리 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들의 나만큼 늙어있는 모습을 지금도 보면서

나 힘들었던 젊은 시절엔

이미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 그들을 보며

부러운 마음과 함께 더욱 힘을 내어

낙오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었지라는 추억에 젖어들기도 한다.


지금 저 젊은 사회자들을 보며

내 젊은 시절처럼 그러고 있을

이름모를 수많은 젊은이들

자기에게 주어진 삶

열심히 살아내려 애쓰고 있을 젊은이들


이 젊은이들


나 이세상  뜨고도  세월 한참 흐른 뒤

내 지금 나이만큼 늙어져 있는 때가 되면

그들도 지금 나처럼

TV에 혹 나올지도 모를 이 젊은 사회자들을 보며

나하고 똑같은 생각을 하겠지 아마,

내 젊은 시절엔 그랬었지

세월은 참 무상하기도 하구먼이라고...



2017. 12.11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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