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溪暮泛 -날 저문 남쪽 시내에 배 띄우고
- 宋翼弼
迷花歸棹晩 (미화귀도만) 꽃에 넋 뺏겨 돌아가는 뱃길 늦었고
待月下灘遲 (대월하탄지) 달 뜨기 기다리느라 여울로 내려가기 더디었다
醉裏猶垂釣 (취리유수조) 술에 취해서 낚싯대 드리우니
舟移夢不移 (주이몽불이) 배는 움직이나 꿈은 그대로 있구나
송익필 [宋翼弼] 조선 선조 때의 학자(1534~1599).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운장(雲長), 호는 구봉(龜峯)·현승(玄繩). 할아버지는 직장 송인(宋璘)이고, 아버지는 판관 송사련(宋祀連)이다. 어머니는 연일 정씨(延日鄭氏)이다. 할머니가 천첩 소생이라 신분이 미천하였으나 아버지 송사련이 공신에 책봉되고 당상관에 올라 유복한 환경에서 교육을 받았다.
시를 잘 지어 어릴 때부터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25세 되던 해에 아우와 함께 대과(大科)에 응시하였다가 얼손(蘖孫)이라는 신분적 제약으로 과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33세가 되던 1566년(명종 21) 고향인 경기도 고양군에 있는 심악산 구봉(龜峰) 아래에 은거하면서 학문에 전념하는 한편 후진 양성에 매진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유능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는데, 송시열(宋時烈)의 스승으로 도봉 서원에 배향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도 문하에 있었다. 김장생은 송익필의 예학(禮學)을 계승해서 조선 예학의 태두가 되었다.
송익필은 도봉 서원을 자주 출입하면서, 도봉 서원의 학통[서인의 학통]을 계승한 이이(李珥)·성혼(成渾)과 긴밀히 교류하며 성리학을 심화하였다. 이이가 죽은 뒤 당쟁이 심화되면서 송익필은 서인의 배후로 지목되었다. 1586년(선조 19) 동인이 사주하고 안윤이 송사를 일으켜 구속되었다가 곧 광주(光州)로 피신하였다.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己丑獄事)로 동인이 제거되자 송익필과 그의 형제들 신분이 회복하였다. 그러나 1591년(선조 24) 건저 문제(建儲問題)로 정철(鄭澈) 등 서인 다수가 파면된 후 송익필은 광주 등지에서 숨어 지내다 관청에 나와 조사를 받고 희천(熙川)[현 평안북도 희천군]에 유배되었다. 1593년(선조 26) 해배(解配)되어 풀려났으나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돌다가, 1596년(선조 29) 마양촌(馬羊村)[현 충청남도 당진군 송산면 매곡리]에 머물면서 찾아오는 많은 학자를 지도하다가 일생을 마감하였다.
[학문과 저술]
송익필은 학문과 시와 문장이 모두 뛰어났지만 신분상의 급격한 변동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삶이 험난하였으나 학자로서 그리고 문인으로서 충실하게 살았다. 송익필의 시는 자연성을 강조하는데, 이러한 인식은 그가 겪었던 현실적 고통의 심정을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문집인 『구봉집(龜峯集)』은 1822년(순조 22) 김장생의 7세손인 김상성(金相聖)에 의해 11권 5책으로 간행되었다.
[묘소]
문인들이 당진현 북면 원당동[현 충청남도 당진군 당진읍 원당리]에 송익필을 장사지냈다.
[상훈과 추모]
사후 문인과 후학들의 신원소(伸寃疎)가 몇 차례 올라갔지만 윤허를 얻지 못하다가 홍계희(洪啓禧)의 끈질긴 노력으로 사후 153년 만인 1752년(영조 28) 통덕랑 행사헌부지평에 추증되고, 이로부터 158년 뒤인 1910년(순종 4)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참고문헌]
『구봉집(龜峯集)』
강구율, 「구봉 송익필의 생애와 시세계의 한 국면」(『동방 한문학』19, 동방 한문 학회, 2000)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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