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寺
―白湖 林 悌
半夜林僧宿 (반야임승숙) 한밤중 숲엔 스님 잠들어 있고
重雲濕草衣 (중운습초의) 겹구름은 은자의 옷 적시는데
岩扉開晩日 (암비개만일) 날 저물어 굴 삽짝문 여노라니
棲鳥始驚飛 (서조시경비) 쉬고 있던 새 놀라 날아간다
半夜 [bànyè] ① 반야 ② 한밤중 ③ 반밤 ④ 심야(深夜)
草衣 :어지러운 세상을 버리고 숨어사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隠者いんじゃの衣服
岩:굴 / 棲 ① 살다 ② 집 ③ 쉬다 ④ 잠자리
임제는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자유분방해 스승이 없었다. 20세가 넘어서야 성운(成運)에게 배웠다. 1570년(선조 3) 22세 되던 겨울날 충청도를 거쳐 서울로 가는 길에 쓴 시가 성운에게 전해진 것이 계기가 되어 성운을 스승으로 모셨다고 한다.
젊어서는 얽매임을 싫어하여 기녀와 술자리를 즐기며 살았다. 1571년(선조 4) 23세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이때에 잠시 동안 술을 끊고 글공부에 뜻을 두었다. 과거에 몇 번 응시했으나 번번이 떨어졌다. 그로부터 계속 학업에 정진했으며 『중용』을 800번이나 읽은 일은 유명한 일화이다.
1576년(선조 9) 28세에 속리산에서 성운을 하직하고, 생원·진사에 합격했다. 이듬해에 알성시에 급제한 뒤 흥양현감(興陽縣監)·서북도 병마평사(西北道兵馬評事)·관서 도사(關西都事)·예조정랑(禮曹正郞)을 거쳐 홍문관지제교(弘文館知製敎)를 지냈다. 그러나 성격이 호방하고 얽매임을 싫어해 벼슬길에 대한 마음이 차차 없어졌으며 관리들이 서로를 비방 질시하며 편을 가르는 현실에 깊은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관직에 뜻을 잃은 이후에 이리저리 유람하다 고향인 회진리에서 1587년(선조 20)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여러 아들에게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오직 우리나라만은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못난 나라에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너희들은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고 한 뒤에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검(劍)과 피리를 좋아했고 술 마시고 방랑하며 여인과 친구를 사귄 짧은 삶이었다.
벼슬에 환멸을 느껴 유람을 시작했으며 가는 곳마다 많은 일화를 남겼다. 서북도 병마평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시조 한 수를 짓고 제사지냈던 일과 기생 한우(寒雨)와 시조를 주고받은 일, 평양기생과 평양감사에 얽힌 일화도 유명하다. 이러한 일화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평가하길 기이한 인물이라고 했으며 또 한편에서는 법도에 어긋난 사람이라 했다. 그러나 당시의 상반된 평가와는 상관없이 그의 글은 높이 평가됐다.
「수성지(愁城誌)」·「화사(花史)」·「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등 3편의 한문소설을 남겼으며 문집으로는 『임백호집(林白湖集)』 4권이 있다. 한편, 한문소설은 그의 작품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백호집(白湖集)』
- 「임제론」(소재영,『한국문학작가론』, 형설출판사, 1980)
- 「임제의 초기시에 대하여」(심호택, 『백강서수생박사화갑기념논총 한국시가연구,형설출판사,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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