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시(漢詩) 마당 ♣/- 우리 漢詩

山中秋雨―村隱 劉希慶

Bawoo 2018. 3. 26. 22:23




                       山中秋雨

                                                      ―村隱  劉希慶

白露下秋空 (백로하추공)  하얀 이슬 가을 하늘에서 내려오고

山中桂花發 (산중계화발)  산속엔  계수나무 꽃 피어 있길래
折得最高枝 (절득최고지)  가장 좋아 보이는 가지 하나 꺾어서  

歸來伴明月 (귀래반명월)  밝은 달 짝하여 돌아오네.






유희경(劉希)

조선 전기 도봉 서원 창건에 기여한 문인. | [가계] 본관은 강화. 자는 응길(應吉), 호는 촌은(村隱). 할아버지는 유도치(劉道致)이고, 아버지는 유업동(劉業仝)이다. 유희경(劉希)[1545~1636]은 천인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몽인(柳夢寅)[1559~1623]이 지은 「유희경전(柳希慶傳)」에 따르면 그를 정확히 노비라고 지칭하지는 않지만 ‘미천(微賤)’한 신분이라는 단어를 썼다. 그의 아버지 이름이 ‘업동’인 것으로 보아 노비 혹은 천인 신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처는 허씨(許氏)이다. 슬하에 아들 다섯을 두었으니 유순민(劉舜民)·유우민(劉禹民)·유성민(劉聖民)·유사민(劉士民)·유일민(劉逸民)이다.

유희경은 서울 대묘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종로구 원서동에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효자로 이름이 났으며, 13세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예(禮)를 다하자 이 소문을 들은 사대부 남언경(南彦經)이 유희경을 돌보고 가르치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유희경의 벼슬살이는 임진왜란 때에 의병으로 나가 싸운 공으로 선조로부터 포상과 교지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사신들의 잦은 왕래로 호조의 비용이 고갈되자 그가 계책을 내놓아 그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광해군 때에는 이이첨이 모후인 인목 왕후(仁穆王后)를 폐하기 위한 상소를 올리라고 협박하였지만 거절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절의를 인정받아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받았고, 80세가 되면서 가의대부(嘉義大夫)를 받았다.


평소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어짊을 흠모하였던 유희경은 남언경(南彦經)이 도봉 서원을 창건하는 데 도움을 주고는 실질적으로 서원을 다스려 나갔는데, 사람들은 유희경이 도봉의 산수(山水)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노년(老年)을 마칠 계책을 마련한 게 아닌가 생각하였다고 한다. 도봉 서원 앞 계곡에서 유희경이 읊은 시도 전해 온다.

이곳은 수석(水石)의 경치가 뛰어났으며, 바위와 바위 사이에 침류대(枕流臺)가 있고, 그 위에 누헌(樓軒)이 있어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루었다. 유희경은 84세 되던 1628년(인조 6) 경기 감사와 양주 목사 일행을 따라 도봉 서원에 왔다가 침류대 누상(樓上)에서 시를 짓기도 하였다. 또한 성해응(成海應)의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를 보면, “동구(洞口)에 들어가면서부터 수석문(水石門)의 승경이 많은데 유희경이 차지하고 있었다.”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때 이곳에 거처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학문과 저술]
유희경은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한시를 잘 지었다. 자신의 집 뒤쪽[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시냇가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어 침류대라고 하고 그곳에서 차천로(車天路)·이수광(李晬光)·신흠(申欽)·김현성(金玄成)·홍경신(洪慶臣)·임숙영(任叔英)·조우인(曺友仁)·성여학(成汝學) 등의 문인들과 시로써 화답하였으며, 이 시를 모아 『침류대 시첩(枕流臺詩帖)』을 만들었다. 그는 당시 같은 천인 신분으로 시에 능하였던 백대붕(白大鵬)과 함께 풍월 향도(風月香徒)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하였는데, 이 모임에는 박계강(朴繼姜)·정치(鄭致)·최기남(崔奇男) 등 중인 신분을 가진 시인들이 참여하였다.

그는 박순(朴淳)으로부터 당시(唐詩)를 배웠는데, 허균(許筠)의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그를 “천인으로 한시에 능통한 사람”으로 꼽고 있다. 그의 시는 한가롭고 담담하여 당시에 가깝다는 평을 듣는다. 또한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던 남언경에게 문공 가례(文公家禮)를 배워 상례에 특히 밝았으므로 국상이나 사대부가의 상(喪)에 집례하는 것으로 이름이 났다. 저서로 『촌은집(村隱集)』과 『상례초(喪禮抄)』가 전한다.


[묘소]
도봉 서원 아래에 부인과 함께 같이 장사지냈다 하였으나 현재 묘의 위치를 알 수 없다.


[상훈과 추모]
아들 유일민(柳逸民)의 원종훈(原從勳)으로 인하여 자헌대부 한성 판윤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촌은집(村隱集)』 
『도봉 구지』 (서울특별시 도봉구, 1999)
서신혜, 『조선의 승부사들』(역사의 아침, 2008)
곽정례, 「『승가수창록』과 위항 시사의 연원」(『어문 연구』33, 한국 어문 교육 연구회, 2005)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한시(漢詩) 마당 ♣ > - 우리 漢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過古寺―淸虛 休 靜  (0) 2018.04.01
山居―竹庵 許景胤  (0) 2018.03.30
聖心泉 -―忠齋 崔淑生  (0) 2018.03.25
題壁―猿亭 崔壽峸  (0) 2018.03.24
老馬 - 崔 澱  (0) 2018.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