野 興
-高尙顔
門前稻熟堪爲飯(문전도숙감위반) 문 앞엔 벼 익어 먹을 만하고
舍後綿開可作衣(사후면개가작의) 집 뒤엔 목화 피어 옷 지을만 하구나
午睡正甘風榻上(오수정감풍탑상) 낮잠 들자 바로 기분 좋은 바람 평상 위로 불어오고
兒童忽報打魚歸(아동홀보타어귀) 아이는 문득 물고기 잡아 돌아왔다 알린다
榻 걸상 탑 ① 걸상 ② 베의 이름 ③ 임금의 의자 ④ 길고 좁게 만든 평상
1553년(명종 8)∼1623년(인조 1). 조선 중기의 학자.
| 개설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사물(思勿), 호는 태촌(泰村). 할아버지는 충순위증판결사고극공(高克恭)이며, 아버지는 증 한성우윤고천우(高天佑)다. 어머니는 신천 강씨(信川康氏) 습독 강희언(康希彦)의 딸이다.
서사 기록(書事記錄)도 남긴 바 있다. 그 뒤 울산판관을 지낸 후, 벼슬을 그만두고 전원 생활을 하였다.생애 및 활동사항
1573년(선조 6) 진사가 되고, 1576년(선조 9)에 문과에 올라 함창현감·풍기군수 등을 지냈다. 40세 되던 해인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침입하자, 향리인 상주 함창에서 의병 대장으로 추대되어 큰 공을 세웠다.
49세인 1601년(선조 34) 이후지례현감·함양군수를 지냈고, 이덕형(李德馨)·이순신(李舜臣) 등과의
문집으로 1898년(고종 15)에 간행한 목판본 6권 3책이 전한다. 그 가운데 행장(行狀)에 보면 농사에 밝고 문장이 능하며, 농군을 가르치고 농사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하여 학계에서는 현전하는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를 그의 작품이라 추측하고 있다.
이는 문집인 『태촌집(泰村集)』에 「농가월령」이라는 기록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벼슬에서 물러난 이후 농경 생활을 했다는 내용이 문집의 행장에 기록되어있어, 「농가월령가」는 고상안과 관련이 깊으리라는 짐작에서 연유된 것이다.
그 밖에 그의 문집에는 총화(叢話)·여화(餘話)에 해당되는 「효빈잡기(効嬪雜記)」를 비롯하여, 임진왜란 때 유성룡(柳成龍)에게 올린 팔책(八策)과 유합(類合), 『해동운부군옥(海東韻府群玉)』에 대한 기록과 풍속·전설에 관한 기록 등이 전해지고 있어 일반 문집에 비해 이색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점을 종합하여 볼 때, 「농가월령가」의 나타난 계절 감각, 영농 내용 등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 까닭에, 학계에서는 그가 「농가월령가」의 작자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문집으로 『태촌집』이 있다.
참고문헌
「농가월령가해제」(박성의, 『한국고전문학대계』7, 민중서관, 1974)
「농가월령고」(홍재휴, 『동양문화』6·7합병호, 영남대학교, 1968)
태촌집독태촌집후」(방종현, 『한글』101, 1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