田家樂
-高聖謙
晩秋新雨百忙犁(만추신우백망려) 늦가을에 비 내리니 밭 갈기 바빠
掃送全家饁水西(소송전가엽수서) 온 식구 모두 들에서 밥 먹네
盡日柴扉人不見(진일시비인불견) 종일토록 사립문에 사람 보이지 않는데
一鳩啼歇一鳩啼(일구제헐일구제) 한 비둘기 울다 그치니 다른 비둘기가 운다
백망 [百忙] 매우 바쁨
犂 쟁기 려, 얼룩소 리, 떨 류(다른 표현: 밭 갈 리, 밭 갈 려)
饁 들밥 ① 들밥 ② 들밥 내 가다 ③ 들에서 먹는 밥 ④ 들에 밥을 내 감
1810(순조 10)∼1886(고종 23). 조선 후기의 학자.
| 개설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치희(穉希), 호는 녹리(甪里). 아버지는 고몽찬(高夢贊)이며,
어머니는 청주정씨(淸州鄭氏)로 정내성(鄭來成)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44년(헌종 10)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정필규(鄭必奎)의 수제자였던 아버지로부터 가학(家學)을 이어받아 사서오경은 물론, 음양·성력(星曆)·하락(河洛)·율려(律呂) 등에까지 통달하였다. 1850년(철종 1) 청량정사강회(淸凉精舍講會)에 나가 재사의 이름을 얻었다.
1855년이휘병(李彙炳)과 함께 상경하여 장헌세자(莊憲世子)의 추존을 청하는 소를 올렸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조신(朝臣)들이 국문(鞫問)할 것을 주장하자 수천 명의 소유(疏儒)들이 사태가 위급함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혼자 굳건한 기상을 보여 세인의 기림을 받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나라의 정세가 날로 기울어져 가자, 향리인 경상도 상주에 은거한 채 선대의 유집 등을 간행하면서 지냈다. 경사(經史)에 두루 해박하고, 특히 악부체 시가에 능하였다.
「한성악부(漢城樂府)」 28장을 비롯하여 그가 남긴 수많은 악부사(樂府詞)는 모두 우리 나라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들이다. 저서로 『녹리문집(甪里文集)』 14권 7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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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녹리문집(甪里文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