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시(漢詩) 마당 ♣/- 우리 漢詩

矗石樓 - 權應仁

Bawoo 2018. 9. 12. 23:08


                                     矗石樓

                                                                                - 權應仁


漏雲微月照平波(누운미월조평파) 구름 사이로 비치는 희미한 달빛 잔잔한 물결 비추고

宿鷺低飛下岸沙(숙로저비하안사) 잠자려는 해오라기 언덕 아래 모랫벌로 낮게 날아든다

江閣掩簾人倚柱(강각엄렴인의주) 발 드리운 강가 누각 기둥엔 기대어 있는 이 있고

渡頭鳴櫓夜聞多(도두명로야문다) 밤이라 그헌지 나루터의 노 젓는 소리 더욱 많이 들린다




  •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인. 

  •  [ 개설 ]

  • 16세기 초에서 임진왜란 직전까지 활약한 인물로 추정된다. 자는 사원(士元). 호는 송계(松溪). 참판권응정(權應挺)의 서제(庶弟)이다. 퇴계(退溪)이황(李滉)의 제자로 시문에 능하였다.

  • [생애 및 활동사항 ]

    권응인은 서류 출신인 탓에 서얼금고(서얼 출신은 벼슬에 재한을 두는 것)에 얽혀 벼슬은 겨우 한리학관(漢吏學官)에 머물고 말았다. 당대의 명문장가이다. 1562년(명종 17)에 일본 국왕의 사신이 나온다고 했을 때에 누구를 선위사(宣慰使)로 하여 응접케 하느냐 하는 문제가 일어났다.


  • 조정에서 “전 한리학관권응인은 글을 잘하여 그에게 필적할 만한 사람이 드물다. 지금 본도에 있으니 청컨대 관찰사에게 글을 보내어 그로 하여금 역마로 달려 선위사의 행차에 끼어 좌우에서 일을 도와 급한 일을 구하는 자격으로 보냈으면 한다.”라는 의견이 나왔다. 그리고 임금이 이것을 윤허하였을 정도였다.

    권응인은 송대의 시풍이 유행하던 당시의 문단에서 그는 만당(晩唐)의 시풍을 받아들여 큰 전환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는 시평에도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시에 있어 국내에서는 남명(南冥)조식(曺植)을 당대 제일이라 하였고, 중국에서는 소동파(蘇東坡)의 시를 가장 높이 숭상하였다.


  • 권응인의 문명은 후일 영조 즉위년인 1725년(영조 1)에 정진교(鄭震僑)가 올린 상소문에서 조선조에 걸출했던 서얼출신 문인을 열거하는 가운데에 박지화(朴枝華)·어숙권(魚叔權)·조신(曺伸)·이달(李達)·정화(鄭和)·임기(林芑)·양대박(梁大樸)·김근공(金謹恭)·송익필(宋翼弼)형제·이산겸(李山謙)·홍계남(洪季男)·유극량(劉克良)·권정길(權井吉) 등과 함께 거론될 정도였다.

    『어우야담(於于野談)』·『기문총화(記聞叢話)』·『자해필담(紫海筆談)』 등에 그와 청천(聽天)심수경(沈守慶)에 관한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권응인의 문집으로는 『송계집』이 있으며, 그밖에 저서로는 1588년(선조 21)경에 지은 『송계만록』 상하 2권이 있다. 『송계만록』의 상권에는 시화, 하권에는 시화 및 잡기·설화 등이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송계만록(松溪漫錄)』
  • 『송계집(松溪集)』
  • 『영조실록(英祖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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