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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70년, 현대 일본을 말하다]사쿠라 진다:우치다 타츠루 외

Bawoo 2020. 8. 10. 21:34

 

[책소개 - 인터넷 교보문고]

일본의 지성 우치다 다쓰루, 행동하는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를 만나다.
폭주하는 일본을 통찰하는 일본 지성의 문제적 대담!
금기를 넘어 일본 사회의 밑바닥까지 파헤친다.

이 책은 일본의 사상가 우치다 다쓰루와 젊은 논객이자 정치사상가 시라이 사토시의 대담집이다. 대담의 계기는 지난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이다. 당시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가 쓰나미에 파괴되고 폭발하면서 방사능이 유출됐다. 인명 피해는 물론 일본 국토의 일부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시라이 사토시는 재난에 대처하는 정부의 무능과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으려는 일본 사회의 풍광을 목도하면서 패전 이후 70년을 지나온 일본의 전후 시대 마감을 예견했다. 시라이 사토시는 태평양 전쟁에서 패했으면서도 패전의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종전’이란 말로 ‘패전’을 부인하고 은폐하며, 미국에 한없이 종속되는 전후 통치 구조를 ‘영속패전 체제’라고 말한다.
한편, 한국에서도 30여종의 책이 번역 출간된 일본의 사상가 우치다 다쓰루는 시라이 사토시의 ‘영속패전론’에 크게 공감하면서 시라이 사토시와 전후 70년의 일본을 총괄하면서 현재 아베 정권이 향하고 있는 내셔널리즘과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 붓는다. 아울러 평화헌법 9조를 개헌하여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일본이 되고자 하는 아베 정권의 무모함과 아시아 국가 특히 한국과 중국에 대한 과거사를 부정하는 자세에 강한 일침을 놓는다. 그러면서도 일본인이 세계 시민으로서 거듭날 수 있어야 사쿠라 지듯이 파멸해가는 일본을 되살릴 수 있으리라 진단한다.

 

저자

우치다 타츠루 대학교수

1950년 도쿄 출생으로 도쿄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하였고 현재 코베(神戶)여학원대학 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프랑스 현대사상, 영화론, 무도론 등을 전공하였으며 《망설임의 윤리학》, 《아저씨적 사고》, 《사가판, 유대인 문화론》, 《선생님은 훌륭해》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목차

시작하며

1장 왜 지금 전후사를 다시 보아야 하는가

전후사를 다시 보는 움직임은 시대의 요청
일본의 뒤틀린 우경화
대미 종속이 살길이라고 믿는 사람들
일본 근대화가 실패한 이유
우경화와 돈벌이의 친화성
일본의 이데올로기 특수성
도쿄올림픽과 영토 문제
패전 인식이 희박한 일본인
역사를 파헤치고 새로운 언어를 찾을 때

2장 순화하는 영속패전 체제

진정한 민주주의가 없는 일본
대미 종속을 통한 대미 자립
냉전이 끝난 후에도 대미 종속이 계속되는 이유
일본에 퍼져 있는 ‘무사안일주의’
가망 없는 일본의 열화劣化
사쿠라 진다
대미 종속을 강화하는 아름다운 나라
자각하지 못하는 뒤틀림

3장 부인이라는 주술

올가미가 된 ‘패전의 부인’
부인해야 성립하는 국가
엘리트에게 잠재된 파괴 충동
지금, 정치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일본이 미국의 속국이란 사실을 일본인은 얼마나 받아들일까
지성에 대한 반발과 오타쿠 문화
아시아에서 고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
일본은 아직 ‘마케시로’가 있다

4장 일본인의 자멸 충동

사실 인식 능력을 상실한 일본
극론을 즐기는 일본인의 기질
아베 신조, 누구도 이루지 못한 일을 하다
유치한 반미주의로 귀착할 가능성
다시 반미로 봉기할까
미국의 51번째 주가 된다면
욕망의 표현 방식
역사적 사실의 은폐 구조
‘ 점령 시대’를 망각하다

대화를 마치며
추천의 글

 

책 속으로

전후 일본은 “대미 종속으로 대미 자립을 이룬다”는 대단히 교묘한 국가 전략을 유지합니다.
44쪽

자기 파괴나 파괴 원망破壞願望이랄까요. 일본인은 ‘온통 엉망진창‘인 상태를 좋아합니다. 제도를 조금씩 손질하기보다 한꺼번에 전부 파괴하고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쪽을 좋아하지요.
46쪽

고질라는 일본인의 죄책감과 자기 처벌 욕망을 형상화한 존재이지요. 고질라는 되풀이하여 일본을 습격하는데, 근대 일본 시스템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폭력적 억압, 죽은 자들의 원한, 잃어버린 전통, 더럽혀진 산하와 같이 일본인이 내버린 것들의 복수담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반근대·반중앙·반도시·반문명 등 다양한 ‘반反’이 고질라 형상을 빌려 근대 일본을 파괴하기 위해 등장합니다. 따라서 심성사心性史의 흐름 속에서 보면 고질라는 메이지 이래 일본인이 만들어 온 것을 때려 부수고자 했던 ‘반란군’과 기능적인 측면에서 닮았습니다.
56쪽

민주주의 시스템은 의사결정에 시간이 걸립니다. 경제 활동의 커다란 걸림돌이죠. 그래서 글로벌리스트는 모든 사회 제도에서 민주주의 잔재를 쓸어버리는 꿈을 꿉니다. 원래 민주주의는 의사결정을 늦추려 하는 시스템이지, 최적의 대답을 척척 내놓기 위한 틀이 아닙니다. 의사결정이 늦기 때문에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나라가 망해도 천천히 망합니다. 거꾸로 독재 시스템은 급성장할 수 있는 대신 하룻밤 사이에 망하죠.
69쪽

2011년부터 2012년에 걸쳐 우리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거세게 일었지요. 그런데 어느샌가 ‘역시 바뀌지는 않는다’는 분위기로 흘렀고, 그로부터 눈을 감은 채 여기까지 쭉 왔습니다. 위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말이죠. 모르긴 해도 모든 이야기가 2020년 도쿄올림픽으로 귀결될 겁니다. 제 식으로 말하자면 결국 ‘부인否認의 제전’이지요.
84쪽

아베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참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올림픽을 무사히 개최하기 위해서는 2020년까지 중국, 한국,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영토 문제를 몰아붙일 정치적 선택지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웃 나라가 보이콧하면 그것만으로도 모스크바올림픽의 재판再版이 되는 셈이니까요. 아베 정권은 영토 분쟁의 긴장을 고조시켜 지지율을 높여온 측면이 있는데, 계속 긴장감을 높이려고 시도했다가는 더 이상 국제사회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릴 것입니다.
86쪽

가해 경험을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은 정말로 보기 드물죠. 명확하게 말하자면 그런 솔직한 말은 대중 속으로 퍼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습이나 원폭의 경험은 피해자 의식을 도드라지게 만들어버렸습니다.
93쪽

무라카미 하루키는 《중국행 슬로보트》 이래 줄곧 중국과 관련한 ‘껄끄러운’ 문제를 다루고 있지요.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할 수 없는 까닭에 그 이후 모든 경험의 의미를 결정짓는 트라우마...로서의 중국 체험을 이야기합니다. 무라카미도 아버지가 중국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일본으로 돌아온 후 중국 경험은 전혀 말하지 않고 그저 사자死者들의 넋을 위로하는 기도만 계속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자식 세대는 아버지의 침묵을 유언처럼 물려받았습니다. 작가 자신은 경험조차 못 한 일이 트라우마가 되어 작가의 글쓰기에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중국인에 대한 트라우마를 문학적 주제로 잡으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성이 구축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인에 대한 전후 일본인의 ‘입장 없음’을 적절하게 그려냈기 때문에 중국에서도 압도적 인기를 누리고 있지요.
100쪽

전후 일본 사회는 경제 발전과 함께 풍요로워졌습니다. 그래서 전후는 ‘평화와 번영의 시대’라는 역사 감각이 널리 공유되어왔습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에는 상황이 나빠집니다. 이른바 ‘잃어버린 20년’이지요. 누구라도 ‘이미 평화와 번영의 시대는 끝났다’는 사실을 차츰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시점에 지진과 쓰나미, 원전 사고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말하자면 최후의 일격이었던 셈이지요. 전후의 유산이 이미 상당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지만, 그야말로 물리적으로 깡그리 무너졌다는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으로 전후는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105쪽

원전 사고를 말하자면, 전후 일본의 다테마에建前가 정말로 다테마에에 지나지 않았다는 모든 증거가 튀어나왔습니다. 대표적인 다테마에가 평화주의와 민주주의입니다. 이 나라의 지배 권력은 평화와 민주, 그 어떤 가치도 진심으로 추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덮은 채 감추고 있던 어두운 것, 어렴풋이 알아채기는 했지만 보고 싶지 않아
내팽개쳤던 진실이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더 이상 못 본 척 덮어두어서는 안 됩니다. 생명과 재산을 직접 위협하는 참사로 나타났기 때문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 사회가 점차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분위기로 나아갔어야 할 터인데, 어떻습니까, 달라지고 있습니까? 물론 달라지고 있긴 합니다만 나쁜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106쪽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일본 입장에서는 패배의 형태로 전쟁이 마무리됐습니다. 그런데 전후 일본은 그 순전한 패배, 이의의 여지가 없는 패배를 속여왔습니다. 저는 이것을 ‘패전의 부인’이라 부릅니다. 왜 패전을 부인해야만 했을까요? 전쟁을 이끌었던 사람들이 전후에 또다시 지배적 지위에 계속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큰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본래대로라면 그런 지위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패전 사실을 가능한 한 애매모호하게 처리해야 했죠. 그렇다면 왜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미국이 원했기 때문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부터 냉전 구조가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일본을 자유주의 진영에 붙들어 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107쪽

안에서는 패전을 속이고, 미국에는 아무런 조건 없이 항복했습니다. 두 손 두 발 다 들었죠. 일본의 보수 정치 세력은 미국의 허락 아래 권력의 자리에 머무를 수 있었던 터라 미국에 감히 맞설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대미 종속 구조를 형성한 근본 원인입니다. 이리하여 일본은 미국에 영원히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입니다.
한편 국내에서는 패전을 속였다고 했는데 어떻게 했을까요?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패전한 사실을 감추는 방법입니다. 일본이 침략했던 중국과 식민 지배했던 한반도에 대해서는 오만한 태도를 취해왔지요.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냉전 구조입니다. 미국은 일본을 파트너로 취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09쪽

영속패전 구조도 1990년을 전후로 유통기한이 끝납니다. 냉전이 끝났기 때문에 미국 입장에서는 일본을 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로 여길 필요가 없게 되었죠. 다른 한편으로 중국이 성장하면서 국력의 차이도 좁혀졌습니다. 물론 한국의 성장도 두드러집니다. 이리하여 영속패전 체제를 지탱하고 있던 두 개의 기둥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껏 영속패전 체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 20년 동안 우리는 하늘에 붕 떠 있는 상태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공중을 걷고 있지요. 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추락하고 맙니다.
111쪽

영속패전 구조는 전후의 국체國體입니다. 전전의 천황제가 모양만 바꿔 전후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118쪽

전후 체제로부터의 탈각이라 했을 때 순수하게 그 말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대미 자립을 달성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베 총리는 한편으로는 전후 체제에서 벗어나자고 하면서도 대미 종속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특히 안전 보장을 둘러싸고 말입니다.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용인하는 해석개헌으로 미국에 들러붙어 전쟁을 할 수 있게 하려고 합니다.
150쪽

그들이 무의식 속에서 갈망하고 있는 시나리오는 조금 전에도 얘기했습니다만 센카쿠에서 충돌이 일어나 일본인 모두가 들고 일어서는 경우라고 봅니다. “자, 중국하고 한판 붙자!”는 말이 나오면서 국민은 미친 듯한 흥분 상태에 빠지겠죠. 물론 일본 국민은 당연히 미일 안전보장조약 제5조에 따라 미군이 출동하여 자위대와 함께 중국 인민해방군과 싸워주리라 기대할 테죠. 하지만 미군은 출동하지 않습니다. 뭐가 아쉬워서 그렇게 하겠습니까. 암초 하나 때문에 미국의 병사가 죽음을 무릅써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니까요.
152쪽

많은 일본인은 개헌을 하지 않는 한 그런 사태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순서가 다릅니다. 개헌을 하고 나서 전쟁을 하자는 말이 아니라 먼저 전쟁을 하고 그다음에 개헌을 하자는 게 그들이 원하는 전략 루트입니다. 그들은 개헌 발의나 국민투표에서 질 수 있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반드시 이길 수 있을까요? 자위대가 전쟁에 나가 죽는 사람까지 생기는 상황에 이른다면, 사실상 헌법 9조는 기능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됩니다. 157쪽

출판사서평

일본의 전후 70년,
우경화로 치닫고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일본

저자 우치다 다쓰루와 시라이 사토시는 전후 일본이 취했던 ‘대미 종속으로 대미 자립을 이룬다’는 영속패전 체제의 국가 전략을 비판한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패전을 부인하듯이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 사고도 은폐와 기만으로 처리됐다는 것이다. 이른바 ‘평화와 번영’을 구가했던 일본 경제가 버블로 무너지고 이른바 ‘잃어버린 20년’이라 불리는 저성장 사회를 지날 때 닥친 동일본 대지진은 그야말로 일본의 파국을 촉발하는 결정타였다.
더욱 문제는 그 과정에서 전범 세력의 후예인 아베 정권이 들어서고 일본 사회에 내셔널리즘과 우경화 움직임이 거세지는 분위기다. 이런 변화를 두 저자는 고질라를 빗대 일본인의 자기 파멸 본성을 언급한다. 고질라가 일본 열도를 파괴하듯 차라리 다 부시고 다시 시작하자는 패전으로 인한 원한 섞인 욕망이 현재 아베 정권과 추종자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현재 일본은 민주주의가 억압받고 있으며 오로지 돈으로 환원되는 가치를 추구하는 방향에 우경화 세력이 규합하면서 일본은 파멸을 향해 폭주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전후 체제로부터의 탈각은
평화헌법 9조의 개헌이 아니다.

또한 두 저자는 현재 일본의 영속패전 구조는 전후의 국체國體라고 말하는데 다시 말해 과거의 천황제 자리를 영속패전 구조가 차지했다는 이야기다. 영속패전 구조는 철저한 대미 종속 구조에서 작동하는데 아베는 전후 체제로부터 탈각을 말하는, 모순되고 분열적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평화헌법 9조를 개헌하여 전쟁을 할 수 있는 일본을 만들려는 것으로 이는 미국과 다시 전쟁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베 세력의 속내는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개헌에 목매달기 보다는 중국과 한국과의 영토 분쟁을 쟁점화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군사적 충돌을 유발하여 자연스럽게 평화헌법 9조를 무력화하는 방안을 갖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노 담화를 부정하거나 일본군 성노예 존재를 부인하면서 한국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 워싱턴의 입장은 아베와 다르다. 미국은 아베처럼 전쟁을 하는 것보다는 아시아에서의 군사적 긴장감을 유지하는 쪽이 돈이 더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개헌은 그리 쉽지 않으리라 진단한다.

동아시아의 미래를 위해서 해야 할 일,
한·일 정치인에게 권한다.

 

우치다 다쓰루와 시라이 사토시는 메이지 이래 일본의 근대화가 결국은 실패했다고 단정한다. 패전 후 미국의 속국을 자처하면서 패전을 교묘히 감춰왔고 경제력을 바탕으로 아시아에서는 과거 침략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외면해왔는데 이제는 중국과 한국의 경제적 부상을 비롯한 미국의 대일본 자세 변화로 더 이상 일본의 기만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베는 애국심을 내세워 내셔널리즘을 전파하고 선동하고 있는데 이러한 가짜 선동에 더 이...상 속지 말고 세계 시민 사회에 더 이상 폐를 끼치지 말자고 말한다.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사과를 통해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몰락해가는 일본을 바닥에서 다시 끌어올리고 세계 시민의 길을 가자는 게 두 저자의 메시지다.
일본의 이야기지만 마치 우리네 역사를 비추는 거울 같은 책으로 한국과 일본의 정치인을 비롯한 양국 시민들에게 《사쿠라 진다》를 권한다.

[책속으로 이어서]
확실한 점은 일본이 개헌을 하면 한일·중일 외교 관계가 악화하면서 동아시아 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리라는 사실입니다. 일본이 헌법 9조를 폐기하는 순간 ‘전쟁 상대’는 누가 봐도 한국과 중국, 두 나라이기 때문이죠. 미국의 서태평양 전략은 간단하게 말해 중국·일본·한국·타이완이 ‘우호적이지는 않더라도 동맹 관계는 가능하고, 적대적이라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 수준의 적절한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중국 인민해방군과 미국 군산복합체 모두 그러한 상태를 바랍니다. 전쟁에 이르지 않을 정도의 군사적 긴장이 정기적으로 발생해야 그들의 이익이 최대화하기 때문입니다.
160쪽

파국을 위해 이곳저곳에 다양한 형태의 리스크를 마련해둡니다. 중일 관계와 한일 관계, 원전 문제를 비롯한 수도권 집중 문제 그리고 격차 사회 심화 방치를 넘어 아베노믹스에 이르기까지 많은 리스크가 도사리고 있지요. 설치해둔 폭탄 중 하나가 조만간 폭발하여 수습할 수 없는 대혼란에 이르기를 기대합니다. 가출하기는 어려우니까 차라리 집이 불에 타버리는 게 낫다는 생각입니다. 자력으로는 오늘날의 미일 질서를 바꾸거나 수정 보완할 힘도 없고, 비전도 없기 때문에 전부 엉망진창 돼버리는 파국이 도래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174쪽

원전 사고를 철저하게 조사하여 피해를 정밀하게 평가하고 두 번 다시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 했다면 더 이상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인하면서 사정을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죠. 거대한 사고가 났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대충 얼버무리는 태도는 특별히 도쿄전력의 이익을 확보하거나 관련 관청의 감독 책임을 유야무야 덮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고를 유야무야 덮으면 앞으로 더 큰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리스크가 더 커지지요. 바로 그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197쪽

우리는 일상에서 중국인이나 한국인을 접촉할 기회가 많습니다. 제가 자주 만나는 학생이나 동료 중에도 있습니다. 그들을 만나면 서로 ‘우리는 대체로 이렇게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상호 이해의 접점을 찾아보려 애씁니다. 그러나 그런 일상은 전혀 뉴스에 나오지 않습니다. 뉴스는 서로 으르렁대는 이야기뿐입니다. 당혹스러운 일이죠. 이런 경향은 일본만이 아니라 중국과 한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국 서로 으르렁댈 수밖에 없다’는 이미지 조작이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지요. 대중은 어떤 동기로 이런 미디어를 선호하게 됐을까요? 세대적으로 뭔가 떳떳하지 못한 점이 있어서가 아닐까 싶어요.
228쪽

세대에 따라서는 ‘왜 우리가 한국에 사죄해야만 하는가’라는 불편한 감정을 갖기도 하지요. 내가 한 일도 아닌데 전쟁의 책임을 추궁당해야 하느냐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테니까요. 그런데 국민국가는 일종의 연속성을 갖기 마련이고 연속성이 없으면 지탱할 수 없습니다. “전쟁을 한 놈들이 나쁘지, 나는 관계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국민국가는 환상의 차원에서 죽은 자들과도 공동체를 형성하기 때문이지요.
229쪽

나는 구 식민지민에게 구 종주국민은 “수탈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합니다. 같은 국민인 한, 죽은 자들이 저지른 죄를 떠안을 의무가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나 자신이 죽은 자들의 핏줄로 이어졌기에 죽은 자가 저지른 죄나 짊어진 빚은 ‘나의 채무’입니다.
230쪽

예전의 ‘대미 종속을 통한 대미 자립’은 한 인간의 마음속에 면종복배라는 갈등을 불러들였지요. 그래서 무슨 말을 하는지 쉽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베는 다릅니다. ‘대미 종속’과 ‘미국이 싫어하는 짓을 할 권리’가 물물교환처럼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종속의 대가라는 게 ‘미국이 싫어하는 짓을 할 권리’이지, 일본의 국익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야스쿠니 참배만 해도 일본의 국익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참배 지지자가 말하듯이 사적인 종교 의례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미 종속’은 단적으로 일본의 국익을 줄여가며 뭔가를 바치는 일입니다. 대미 종속과 교환하여 손에 넣는 이익이란 사적인 종교 감정 충족이지요. 본래는 국익과 국익의 거래 수준에서 오갔던 이야기가 국익과 사익의 거래 차원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갈등이 없습니다. ‘일본이 무엇을 잃고 그 대신 아베 신조 개인이 무엇을 얻는가’라는 구도이기 때문에 갈등이 있을 리 없습니다. 이런 상태가 인격 분열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257쪽

현재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상 최대 위험 요소는 아베 신조입니다. 가능하다면 이 사람이 빨리 물러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했다가는 일본의 ‘북한화’라는 호랑이 꼬리를 밟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일본 국내의 ‘알아서 기는 하급 관료’들은 아베는 ‘대미 종속을 통한 대미 자립’ 노선의 충실한 실행자이기 때문에 백악관에서도 틀림없이 좋아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265쪽

이 정권의 정책은 모두 실패로 돌아갈 게 뻔히 보입니다. 수출은 늘지 않고 GDP는 떨어졌으며 성장 전략도 없지요. 믿을 거라곤 주가뿐이라. 주가가 급락하는 순간 아베노믹스의 명맥은 다하고 지지율은 주가와 함께 급락하겠지요.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정권을 지지할 구체적 근거가 사라집니다. 단지 경제 문제이기 때문에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266쪽

더 이상 미온적으로 패전을 부인하는 세계에 자족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역사수정주의가 태어난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고요. 최근의 화제 중에서 그러한 욕망이 가장 강하게 표출된 사건은 위안부 문제 보도를 둘러싼 아사히신문 때리기일 겁니다. 제주도에서는 강제 연행이 없었다는 이유로 마치 위안부 문제 전체가 없었다는 듯이 한술 더 떠서 일본의 침략 행위 자체가 없었던 것처럼 열변을 토하는 세력이 활기를 띠었습니다. 일본의 전쟁 책임 또는 침략한 과거를 말하는 행동은 일본인의 자랑에 상처를 입힌다는 둥 일본인을 폄하하는 거라는 둥 온갖 말들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역사를 정확하게 인식
하거나 반성하는 행위 자체가 일본인 긍지에 상처를 입히는 일이라며 밑도 끝도 없이 확대 해석을 해댑니다. 그것은 일본의 패배를 인정하다니 불경하다, 비국민이다, 죽어도 싸다는 가치구미의 논리와 다를 게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주장이 아무렇지도 않게 통용되면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파멸적 사태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파멸 충동이지요.
285쪽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기란 결국 불가능합니다. 지금까지 완벽하게 은폐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얼마 동안은 감출 수 있겠지만 반드시 드러납니다. 은폐하는 당사자 자신이 ‘은폐된 사실’의 진리성을 숙지하고 있기 때문에 은폐하는 자체로 진실은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밝혀집니다. 은폐된 시기가 길면 길수록, 은폐가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폭로되었을 때 입을 손실은 큽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은폐된 역사는 언젠가 반드시 폭로되지요. 예외는 없습니다. 은폐된 진실은 ‘곪기’ 때문이지요. 매끈한 표면 아래 상처 입은 자리에서 줄곧 피고름이 흘러나오고, 은폐물의 틈에서 악취가 나다가 어느 날 피부를 뚫고 ‘무서운 것’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2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