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그러니까 지금부터 55년 전 얘기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2년 째 투병생활 중이었다. 입시공부를 거의 못했지만 초조한 마음에 예비고사 시험을 보려고 예비 소집장에 갔었다. 목표한 대학에 들어갈 실력에 한참 모자라는 걸 알았지만 예비고사에 합격할 정도는 되는가 알고 싶어서였다. 이날 고등학교 동창 한 명을 만났다. 3년동안 같은 반 한 번 해 본 적은 없지만 안면도 있고 호감을 가지고 있던 그런 동창. 원래 사람 사이의 관계는 그런 것 아닌가. 굳이 이성이 아닐지라도 동성간에도 호감이 가는 사람이 있게 마련인 법이다. 이 동창이 그랬다. 체형도 나와 엇비슷했고 내향적인 성향으로 보이는 것까지 같아서였을 것이다. 반전은 있다. 이 동창의 이후 살아온 삶을 보면 나하고는 정반대이면서 요식업으로 크게 성공했으니 말이다. 대인관계를 많이 해야만 가능한 일. 나는 질색하는 일.
이날 나는 이 동창에게 "지금 투병생활 중이고 언젠가 대학에 가긴 해야해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볼 겸 나왔노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몸이 많이 힘들어 시험장 근처 여관에서 잘 거라고." 그랬더니 이 동창 선뜻 자기집에 가서 자자"고 말하는 거 아닌가. 나는 깜짝 놀랐다. 동시에 과연 나라면 이리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다. 결론은 아니었다. 동정은 할지언정 집에 가서 자자고 했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이 동창에게 내가 폐결핵을 앓고 있다고까지 말했는지는 기억이 없다. 균은 약 복용 몇 개월만에 안 나온다고 했으니 2년이 다 되어가는 그 시절엔 이미 사라졌을 테니까. 단지 몸이 많이 쇠약해져 있고 아직 공부하기엔 이르다는 의사의 엄명이 아직도 유효하던 때였다.
그날 나는 결국 여관에 가서 자고 이튿날 시험을 치뤘다. 그렇다고 이 동창 집에 안 갔던 건 아니다. 집에까지 가긴 했었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리따운 여동생도 직접 내 눈으로 봤으니까. 다만 남에 신세 지는 걸 부담스러워 하는 내 유별난 성격 때문에 그리했을 뿐이었다. 고마운 마음은 고이고이 간직하고셔였다.
이후 이 동창을 본 건 40중반이던 94~5년 쯤일 것이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무려 25~6년 뒤. 남들이 볼 땐 괜찮은 직장, 직위에 있었지만 언제 이 지긋지긋한 직장생활에서 벗어나나 고심하고 있던 때. 다른 동창이 중소 제조업체 사장으로 취임하는 곳에서였는데 이 동창은 내가 그런 사연을 얘기해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아 본 진심이 담긴 호의였는데 말이다. 많이 섭섭했다. 어떻게 그런 좋은 일을 하고도 기억 못 하나 싶어서였다. 이후에도 이런 기억은 딱 한 번뿐이 없다. 훈련병 시절 내가 너무 배고파하는 걸 보고 자기 빵을 주던 동기. 다른 게 있다면 이 동기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여서 아마 성경 말씀에 따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정도다. 굳이 고마운 마음의 경중을 따지라면 동창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 내가 입은 실질적 도움은 군대 동기가 훨씬 더 컸는데도 말이다. ^^
이 동창 소식은 지금도 듣고 있다. 나에게 베푼 호의를 기억 못 하는 이유도 납득이 갔다. 나는 딱 한 번 겪은 일을 이 동창은 수도 없이 해왔을 것이고 그 동기도 사업 성공 수단으로서가 아닌 천성에서 비롯된 즐거운 마음으로 한 것이어서 이게 쌓여 성공적인 삶으로 이어졌을 거라고. 이 동창, 사는 곳 거리가 너무 멀어 만나기는 어렵지만 가까운 곳에 산다면 수시로 만나 담소를 나누며 노후를 같이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사람 만나는 곳보다 혼자 놀기를 더 좋아하는 내 유별난 성격의 예외에 해당하는 인물 중 영원한 1번. ^^ 그래서 10여 년 전인가 이 동창 사업장 근처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보러 갔을 때 일부러 가서 만난 적이 있다. 그때 이 동창의 성공한 삶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었다. 내 작업실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망 좋은 위치에 있는, 주차장까지도 널찍한 커다란 음식점을.
이젠 나이가 있어 일선에서 후퇴했다고 들었지만 건강 유지 잘해서 좋은 일 더욱 많이 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아마 이미 그러고 있겠지만.^^. [ 2022. 01. 22 아침에]
'[斷想, 閑談] > <단상, 한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을 때는 영화 속 마론 브란도처럼 (0) | 2022.02.09 |
---|---|
세월: 아내의 미용용 아령 (0) | 2022.01.31 |
세월: 동태탕 (0) | 2022.01.17 |
백신 접종 유감 (0) | 2022.01.07 |
새해 단상 (0) | 2022.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