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감] 묘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읽는 내내 했다. 그러면서 흡인력 있는 문장과 전개에 빠져 들어 빠른 시간 내에 읽었다. 작품은 도입부가 추리소설이 아닌가 싶게 전개된다. 뭔가 어둡고 칙칙하다. 내가 이 작품을 발견, 읽어보려고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했을 때 분명히 좋아하는 소재였는데.
내 할아버지 기준으로 볼 때 한일합방 전후에 태어난 할아버지 세대, 일제 강점기 중인 1920년 대 초,중반에 태어난 아버지 세대는 일제 강점기, 해방 후 혼란기, 한국전쟁기를 다 겪는 시대적 비운을 타고 난 세대였다. 이 세대가 겪은 가족의 아픔은 국가 권력-일제 포함-에 의해 빚어진 것이기에 불가항력적이었다. 이 아픔을 나처럼 손자, 아들 세대인 해방 전인 40년대 초나 해방 후 태어난 3대째가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가 겪어야 했던 작품으로 많이 만들었고 3대에 해당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나는 겪지 않았으나 실제로 겪은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와 성인이 될 때까지 같이 살았었기에 간접적으로나마 아픔을 같이 했기 때문이다.
국가 권력의 폭력에 무기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는 개인의 비극. 당연히 가족사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런 형식을 무너뜨렸다. 시대적 배경은 같지만 국가 권력에 의한 개인의 희생이 아닌 개인이 갖고 있는 권력(?)에 희생당하고 엮여든 가족사를 다루고 있다. 그러면서 선대에 일어난 일에는 관심이 없이 자신들의 삶에 몰두(?)하는 3대 째의 이야기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3대는 작중 아직 현역인 대학 교수인 거로 보아 50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나보다 20년 늦게 태어난 70년대 초 세대라 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 자체도 까마득하게 먼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니 일제 강점기 할아버지 세대에서 저질러진 악행 때문에 세 집안이 얽혀야 했던 비극적 가족사를 3대 째인 손자 대에 굳이 알 필요도 없거니와 설사 알았다고 할지라도 여기에 영향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실제로 이 작품에서 그리 전개된다. 선조의 선행이라면 모를까 악행을 굳이 알아서 뭐할 것인가. 작품은 이런 의도로 쓰인 것으로 보이는데 흡인력 있는 문장인 데도 불구하고 뭔가 안갯속을 거니는 느낌이 드는 것은 작가의 의도한 표현 방식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뭐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겠다.
[사족] 일제 강점기에 호의호식했던 친일파의 후손들 마음도 이와 같지 않을까?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부의 혜택은 누리되 부끄러운 과거는 일부러라도 모른 체하며 살아아간다. ^^
[작품에 대한 자세한 해설은 아래 책 소개 글에 잘 나와있으니 참고하기 바랍니다. ]
[책 소개]
이서진 소설가의 장편소설로 월북무용가 유나타샤의 삶을 추적하는 과정을 통해 오랜 세월 동안 세 집안에서 대를 이어 벌어진 충격적인 일들을 허상만의 손자 기준과 그의 아내 선영의 교차 시점을 통해 그리고 있다.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탈춤 공연을 보면서 ‘검고 우묵하게 뚫린 눈에 근육결이라곤 전혀 없는 표정’의 탈 형상에 눈길이 머물러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작가는 실감 나는 인물 묘사와 생생한 역사적 현장감으로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장편소설 『밤의 그늘』은 1932년 늦가을 함경도 원산 내안이라는 마을에 찾아든 혼성 사당패의 여인이 낳은 딸로 인해 얽힌 강근언, 허상만, 진중섭 세 집안의 사연이 시종일관 긴장감 있게 전개된다. 작가는 담백하면서도 의표를 찌르는 인물 심리를 통해 이야기 행간행간 역사의 엄중한 시간이 묻어나오게 하는가 싶다가도, 피비린내 진동하는 인간 욕망의 속내를 거침없이 드러내기도 하고, 가족 그리고 핏줄의 비의를 감정적으로 교차시키고 있다. 월북무용가 유나타샤, 그녀는 본명이 허진애로 1933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한 후 재학 중에 무용에 재능을 보였으나 6·25전쟁으로 연인인 진이상을 따라 월북한 뒤 소련 모스크바 대학 유학을 다녀온 후 북한의 대표적인 무용가가 되어 풍자적 요소가 강하고 역동적인 시선 표현이 독창적인 무용수로 활약한 여인이다. 남쪽의 세 집안은 그녀로 인한 긴긴 애증의 세월을 살아야 하는데, 작가는 그 시간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인물들의 비극과 탈주를 차가움으로 번득이게 한다. 그 결과 스스로 목을 멘 허재표와 평생 핏줄의 고리에 시달리는 그의 동생 진표의 형상은 삶의 의미에 대한 부정이면서도 동시에 의미의 부재라는 비극성으로 오랫동안 각인되어 머릿속에 맴돈다. 비극적인 역사의 시간을 뚫고 들어와 인물들의 정지되거나 고여있는 시간을 연속적으로 이어가는 플롯을 통해 삶과 운명 전체를 조망하는 작가의 시선은 우리 마음에 가라앉아 있던 어떤 감정덩어리를 격렬하게 휘저어 놓는다.
교수이면서도 두 여자와 버젓하게 불륜을 저지르는 허재표의 아들 기준의 실상을 보며 그의 아내 선영이 내뱉는 ‘사진 속 무희의 몸짓은 사진이라는 틀 속에 갇혀 한순간 멈춰버렸다. 그때를 살았던 사람들이 펼쳐냈던 상황들도 봉인되며 같이 묶여버렸다. 하지만 멈춰버린 시간들은 어느 날 우연히 스며든 미미한 빛 속을 간신히 뚫고 나와 미역한 기척을 냈다. 기준의 지금 시간들도 오랜 세월 격세유전을 거쳐 반복된, 어둠 속 뒤에 어린 또 다른 그늘의 흔적일지 모른다’는 전언은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이다.
이서진 작가의 장편소설 『밤의 그늘』은 독자들에게 단순한 역사나 인간 비극의 차원을 넘어 더 근본적인 삶의 차원과 대응하게 만든다. 가족이나 핏줄이 인간 운명 차원에서 작동하는 근원적인 힘, 즉 역사라는 인식의 차원이 아니라 인물들의 운명이라는 존재론적인 차원의 이야기를 전달하려고 한다. 그 때문에 ㅊ소설의 이야기가 지닌 원초적인 비극성을 극대화시켜 분노와 폭로보다는 성찰과 관조의 지혜를 보여주는데, 이것은 이서진 작가의 운명에 대한 차가운 통찰의 힘이 지닌 산물이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책 속으로
그 중 한 권에 종이가 끼워져 있었는데 대강 접어 넣었는지 밖으로 삐죽 나와 있었다. 선영은 별 생각 없이 그걸 빼서 펼쳤다. 거기에는 한 무희가 있었다. 처음엔 그림으로 여겼는데 자세히 보니 사진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했다. 그것은 두 장인데 현상하기 전 빛이 새어들어 약간 탈색된 것처럼 바탕이 흐린 빛을 띠었고 갈색 반점들이 점점이 있었다. 그 때문인지 노인의 얼굴에 피고 있는 검버섯처럼 오랜 세월의 낡음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속의 무희는 금방이라도 춤사위를 펼칠 듯 역동적이었다. 카메라 앵글에 잡혀 찰나의 순간 멈췄던 몸짓이 다시 그대로 드러날 것 같았다. 정지되었음에도 바로 눈앞에서 춤을 추고 있다는 실재감을 아주 강하게 풍겨냈다. 손가락 마디마디,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 들이쉬고 내뿜는 미세한 호흡마저 느껴질 것처럼 생생하게 와 닿았다.
무희가 날아오르듯 팔을 뻗을 때였다. 고깔에 가렸던 얼굴이 드러나며 눈매가 카메라에 잡혔다. 아이라인과 짙은 속눈썹을 붙인 무대화장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것만이 아닌 어떤 강렬함이 후려치듯다가들었다. 아주 깊고 먼 시원의 중심 같은 검은 눈이 처연하도록 흰 고깔 속에서 빨아들일 듯 빛을 냈다. 1, 2초나 됐을까 싶은 아주 짧은 순간, 그 눈빛이 선영의 가슴으로 확! 와 닿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뭔가에 접촉된 것처럼 가슴 쪽에 찌릿한 여운 같은 게 번졌다. 이 느낌은 뭐지? 선영은 가슴에 가만히 손을 대보았다.
선영의 시할아버지 허상만은 일제가 조선과 합병을 한 직후인 1913년 강원도 동해의 최북단에 위치한 주 어업기지인 동진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전쟁과 분단으로 끊어졌지만 일제강점기하의 동진은 동해북부선 철로역이 있던 교통요지였으며 원산과 부산 간 여객선의 기항지였다. 농산물과 해산물의 집산지여서 물자와 사람들이 모여들어 흥청거렸다.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우스갯말까지 있을 만큼 당시 동진의 경제 실정은 전반적으로 넉넉했다.
하지만 허상만의 집은 부칠 밭 한 뙈기나 바닷가에 살면서 지닐 수 있는 손바닥만 한 전마선도 없이, 찢어지게 가난해 밥 굶기를 밥 먹듯 했다. 움직일 때보다 누워있는 날이 더 많았던 병약한 아비가 어쩌다 남의 허드레 품을 팔아 버는 형편없는 수입으로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갔다. 이엉 한 번 제대로 갈지 못한 지붕은 무너질 듯 위태로웠고, 엉성하게라도 둘러친 울타리는커녕 콧구멍만한 단칸방에 문짝도 없이 거적때기를 치고 살 정도였다. 명색으로나마 틀 구실을 하는 흙벽은 겨울이면 터지고 갈라져 황소바람이 들이쳤다. 풍찬노숙이나 다름없었다.
기준이 처음 모운희를 만났을 땐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찾아들던 초기의 여느 조선족과 다를 바 없었다. 지도학생으로 정해져 연구실에 인사를 하러 왔던 모습은 독특했다. 생김새는 곱상했지만 촌스러워서 한국의 70년대 분위기를 풍겼다. 짧은 머리를 빠글하게 펌을 하고 무릎길이의 성장용 치마를 입었는데, 무릎 밑까지만 오는 짧은 판탈롱 스타킹을 신어 알무릎이 그대로 드러났었다. 거기다 옷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낮고 투박한 신발을 신은 모습은 나이든 시골 여자를 연상시켰다. 어디 외출할 때면 멋을 부리고 치장했어도 세련과는 거리가 먼 차림새였다. 당시 중국과의 수교 초기에 접하던 그곳 일반 여성들 모습이어서 중국, 하면 연상되던 낙후라는 인식처럼 그랬다.
사당패는 춤과 노래, 곡예 등 연희를 펼치며 떠돌던 유랑예인들이었다. 여자로만 모인 무리를 사당패라 하고 남자들만 모인 무리를 남사당패라고 하지만, 이제는 그런 구별도 없이 남자 여자가 뒤섞인 경우가 허다했다. 그들도 환대받던 호시절이 있었으나 19세기 들어 점차 힘을 잃어갔고, 한일 병합 이후부터는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옹색하게 이름만 남았다. 기량도 못 미치는 어중이떠중이들이 섞이면서 명성도 무색해졌다. 그들은 패를 이끌어 가는 모갑이가 주선한 곳에서 판을 벌렸고, 그에 대한 사례와 사당(여자)들이 매음을 하고 받은 해우채로 먹고 살기로 했다. 그나마도 수요가 없어지자 다른 살 길을 찾아 흩어지는 경우가 흔했다.
동네로 들어선 패거리는 평소처럼 풍악도 울리지 못하고 조용히 동구 길을 잡아들었다.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돈거리나 본정통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조심하게 됐다. 그들은 내안 근동에서 제일 부자인 강근언의 집을 찾아드는 중이었다. 선영의 시어머니 강경분의 친정 작은집이었고 인정의 친가였다. 강근언은 어린 허상만을 원산으로 불러 취직시켜준 인정의 친할아버지였다.
진표에겐 전쟁통에 행방불명되어 얼굴은커녕 존재조차도 제대로 몰랐던 큰 누이가 친어머니로, 형 내외인 허재표와 강경분은 사돈이 되었다. 허재표에게는 누이가 처형으로, 동생 진표는 사돈이 되었다. 강경분에게는 얼굴도 본 적 없이 얘기만 들어 알던 시누이가 사촌언니로, 시동생인 진표는 친정 조카가 되었다. 기준에게는 존재가 있는지도 몰랐던 고모가 이모로, 삼촌 진표는 외재종형이 되었다. 인정에게 진표는 내외종 간이며, 사돈이었던 진표의 생모는 실상 친 고모였다. 진해식이 전하는 말대로라면.
진표는 인쇄물을 책상 위에 놓고 서랍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고서적 같은 책 몇 권과 탈, 흑백사진 두 장이 들어 있다. 책들은 오래 되어 제목마저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만큼 흐릿했고 표지도 누렇다 못해 갈색으로 변해 있다. 사진들도 오래되어 귀퉁이가 찢어졌고 군데군데 빗물에 젖은 것처럼 얼룩이 번져 조금만 힘을 주어도 바싹 마른 낙엽처럼 으스러질 것 같다.
사진 중 하나는 학예회였는지 초립동이 복장인 열두세 살쯤의 소녀가 찍혀 있다. 전반적으로 선명도가 없는데도 이목구비만은 단정하게 눈에 들어왔다. 홑꺼풀의 커다란 눈에 시원스레 뻗은 콧날과 또렷한 입매였다. 서글해 보이는 그 모습에 진표의 모습이 판에 찍은 듯 겹쳤다.
딸은 허상만과의 관계로 그 나이가 가질 수 있는 이성에 대한 설레는 감정도 갖지 못 했다. 그러나 진이상에게만은 달랐다. 문득 문득 여자로서 모든 걸 걸어도 좋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함께 평생을 살 수 있다면 바랄 게 없었다. 진이상은 딸을 욕정의 대상으로가 아닌 진정으로 존중해 주며 인간의 존엄에 대해 말할 때는 힘이 실렸다. 그와 가까웠던 이유도 그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처한 처지로는 감히 그런 생각조차 뻔뻔할 뿐이었다.
딸은 소학교를 다니며 학예회에서 무용을 시작했던 후부터 무용가가 되고 싶은 열망도 품었다. 지도했던 무용교사도 무용에 적절한 신체조건과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 권유했다. 그러나 허상만은 사당년이나 하는 천한 짓거리라며 단호하게 눌러버렸다. 딸은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만 했다. 아버지를 거스를 수 없었다.
하지만 몸을 통해 터져 나오는 수많은 갈구를 맘껏 표출해내지 못 하는 현실은 늘 안타까웠다. 진이상은 그런 딸의 열망을 다독이며 반드시 이룰 수 있을 거라는 힘을 실어주었다. 그런 진이상을 향한 딸의 마음은 점점 피어올랐다. 그럴수록 그 마음을 눌러 접어야 했다. 허상만과의 관계를 떠올리면 안 될 일이었다. 언감생심 꿈도 꾸어선 안 되는 자신의 처지만 되새겨지며 환멸스러웠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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