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작품은 이 전투 시기 전후를 다룬다. 자급자급자족하면서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가족-겐스케 집안: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고모, 삼촌 그리고 3남매-- 를 8살 된 손자 "다이이치"를 중심으로 전개하여 비극 그리고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른 작품에 비해 특이한 점은 전쟁 자체와 관련된 비극이 아닌 어머니 "시즈에"가 한센병에 걸려 결국 죽음을 택하는 암시가 나온다는 점일 것이다. 오키나와 지역이 본토보다 한센병이 심했다고 하는데-책 뒤 해설 자료- 작가는 전투시 있었던 민간인의 비극과 함께 오키나와 지역 자체가 갖고 있던 문제점을 이야기하려고 한 것 아닐까 싶다. 내가 읽은 다른 작품들은 주로 전쟁 시기의 비극만을 다뤘는데 비하여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특징은 가족사의 비극을 다루면서도 그 비극이 아픔보다는 태어나면 살아가게 마련인 인간의 삶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강조하는 표현이랄까 그런 생각이 든다는 점이었다. 어머니가 한센병에 결려 스스로 죽음을 택하고 아버지는 전장에서 죽고 막내 여동생은 피신 중에 병에 걸려 죽고 말지만 남아있는 가족은 살아가게 마련인, 살아간다는 희망을 보여준다는 점일 것이다. 전쟁의 비극만을 중점적으로 부각한 다른 작품들에 비해 뭔가 포근함(?)을 느끼게 해주는 차별성이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표현력이 부족해 소감을 이 정도뿐이 못쓰는 게 좀 민망하다. ㅠㅠ).
무엇보다 이 소설의 장점은 오키나와 지방의 자연과 민속을 빼어나게 재현해놓은 점이다. 물론 이 소설이 처음 출간된 때가 1993년인 점을 고려할 필요는 있지만, 이는 사실 지금의 한국 소설이나 국내에 소개되고 있는 대부분의 일본 소설과 크게 차이 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작가가 핍진하게 그려낸 오키나와의 자연과 민속은 상당히 감각적으로 살아 있어 하나의 ‘민속지’로도 손색이 없다.
식사를 마치고 한숨 돌린 후, 남자들은 각자 역할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분담하여 지붕 이엉을 잇는 작업에 들어갔다. 억새를 바닥에서 정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붕에 올라가 늘어놓는 사람도 있다. 구령을 붙여가며 모시풀 끝을 정리해 구멍을 낸 막대 봉에 줄로 엮는 사람이 있고 또 그것을 받아 모시풀을 단단히 묶는 사람도 있어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61)
소스강은 다이이치와 같은 아이들의 놀이터로 제격이었다. 좀 과장되게 말하자면 놀이터라기보다는 사는 법을 가르쳐주는 학습의 장이었다. 물론 다이이치에게 그런 자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다이이치는 강에 사는 생명들과 놀기를 좋아할 뿐이었다. 줄새우를 비롯해 잠자리 유충, 소금쟁이, 올챙이, 우렁이, 게, 장어, 그리고 수많은 물고기들…. 다이이치에게는 모든 생물이 신기했고 그들의 몸짓과 행동에 놀라는 경우가 많았다. 생물들의 모습을 보면서 다이이치는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지혜를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152~153)
작가가 ‘한국의 독자들에게’에서 “가족이나 생명의 고귀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문학의 보편적인 주제”라고 한 바와 같이 『생명의 강, 시이노 가와』에 흐르는 작가의 관점은 바로 이 생명의 관점이다. 한센병으로 고통 받는 시즈에와 그녀의 아이들, 그리고 소스강에서 살아가는 작은 생명체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눈에는 생명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넘쳐흐른다. 오키나와전쟁에 끌려간 사람들에게 보내는 시선도 그렇다. 이런 작가의 관점은 어쩌면 작가의 시적 감수성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일본 본토의 평론가 스즈키 히사오가 오시로 사다토시를 가리켜 “오키나와 전후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평가한 것은, 이미 오시로 사다토시의 내면에 오키나와의 역사와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자라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키나와의 삶과 슬픔, 그리고 희망
제3장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1944년 10월 10일 나하 주변 지역은 미군의 대공습을 받았다. 소위 ‘10·10공습’이라 불리는 이 공습에서 피해를 입은 가옥은 1만2000여 호에 이른다.” 오키나와전쟁의 시작을 알리려는 듯 곧이어 “같은 달 29일에는 만 21세에서 45세에 해당되는 남성이 방위대원으로 소집되었는데 겐타를 포함한 소스 마을 남자 십수 명이 소집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며 역사적 사건과 마을에서 일어난 일을 이어 붙인다.
사실 제3장은 오키나와전쟁으로 인해 벌어진 소스 마을의 변화를 전면으로 내세우면서, 한편으로는 전장에 끌려간 소스 마을 사람들을 교차로 보여준다. 이는 작가가 오키나와전쟁을 다루면서도 이 전쟁을 어느 관점에서 보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소설 전반부의 평화로운 소스 마을이 시즈에의 한센병 발병으로 공동체 내 갈등으로 치닫다가 종내에는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드는 구조를 갖는 것은, 작가가 실존의 조건과 역사적 조건들을 전부 넘어서는 희망을 말하고 싶어서였을까? 이 소설은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시즈에의 아들 소년 다이이치의 눈으로 그려져 있다는 점을 지적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소년 다이이치에게는 참으로 벅찬 일들이 연달아 닥치지만 그를 붙잡아주고 위로해주는 것은 결국 가족과 자연이었다.
특히 고모와 함께 반딧불이를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은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장면인데, 여기서 작가는 반딧불이로 상징되는 다른 세상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막내 동생 사치코의 죽음, 그리고 엄마 시즈에의 죽음을 반직불이의 날아오름으로 형상화하면서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것은 작가가 시적 감수성으로 이 장편을 썼다는 것을 새삼 증명해준다. 특이한 것은 아버지인 겐타의 죽음은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튼 다이이치 입장에서는 아빠, 엄마, 동생 사치코가 동시에 죽은 사건이 닥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이이치의 곁에는 자연과 거기에 사는 생명이 있었던 것이다.
미요가 이렇게 말하며 다이이치와 우메코 고모를 봤다. 미요가 가리킨 곳은 가족들이 사치코의 돌무덤을 만든 곳인데 그 위로 희미한 불빛이 깜빡이고 있는 게 보였다. 그 가운데 큰 불빛 하나와 작은 불빛 하나가 있었고 작게 보이는 불빛은 마치 큰 불빛의 손에 이끌려가듯 크게 좌우로 흔들리며 올라갔다. 품에 안겨 올라가는 것 같기도 했고 식구들과의 작별을 아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다이이치와 미요는 가만히 그 빛을 바라봤다.(261)
사실 엄마 시즈에가 움막을 지어 집을 떠난 사실은 알게 된 다이이치가 달려간 곳도 소스강인데, 이때 작가가 소스강에 사는 생명체들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것도 어쩌면 다이이치를 자연과 그 속에서 사는 생명으로 위로하려는 목적이었는지 모른다. 생명의 아픔과 고통은 다른 생명으로만 치유 가능하다는 듯이 말이다. 그렇다고 이런 방식을 진부한 사실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온당치 않을뿐더러 과녁을 한참 빗나간 소감일 것이다.
왜냐하면 작가 오시로 사다토시에게는 오키나와 지역의 자연과 생명들이 이미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를 쓰다가 처음 쓴 장편소설이라는 사실은 시적 서정으로는 다하지 못한 이야기가 작가의 내면에 고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이 소설의 도처에서 시적인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반딧불이가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도 그런 맥락에서 읽었을 때 그 슬픔과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이에 대해 작품 해설을 쓴 평론가 김동현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생명의 강, 시이노 가와』의 마지막 대목을 읽다 보면 서정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전쟁을 이야기하되 슬픔에 빠지지 않으려는 서늘한 긴장이 느껴진다. 마지막 부분의 시간적 배경만 보면 오키나와전쟁이 끝나려면 5개월이나 남았다. 더 큰 파국이 이들 남매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 장면이 있기에 두 남매가 끝까지 살아남기를, 끝내 살아남아서 오키나와전쟁을 기억하고 말할 수 있기를, 반딧불이처럼 빛나고 빛나는 삶을 이어가기를 기대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책소개
오키나와 작가 오시로 사다토시가 쓴 첫 장편소설이 출간되었다. 이 장편소설은 오시로 사다토시의 작품으로는 처음 번역돼 출간되는 책이기도 하다. 단편 「K공동묘지 사망자 명부」가 번역 소개된 적은 있지만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은 처음이다. 이 장편소설은 작가가 시인으로 출발했다가 처음 쓴 소설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오키나와전쟁 전후의 소스강 주변의 마을을 다루며 오키나와 사람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제1장과 제2장에서는 3대가 함께 사는 겐스케 집안을 중심으로 자연과 생활, 민속, (한센병으로 인한) 갈등을 그려내고 제3장에서는 오키나와전쟁에 끌려간 오키나와 사람들의 슬픈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앞부분에서 전쟁은 아직 멀리 있는 이야기로 처리되지만 곧 다가올 운명이라는 듯 시즈에의 한센병을 중심에 두고 겐스케 집안과 마을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슬픔이 배치된다.
목차
한국의 독자들에게 / 4
제1장 / 9
제2장 / 85
제3장 / 157
옮긴이의 말 / 240
[해설] 오키나와전쟁과 대면하는 비극적 서정(김동현, 문학평론가) / 245
책 속으로
다이이치는 조심스럽게 무릎까지 오는 강물 속으로 들어가 허리를 숙인 채 손을 넣어 풀뿌리 아래를 더듬는다. 처음에는 양팔을 쫙 펼치고 있다가 서서히 가운데로 모은다. 그러면 풀뿌리 아래에서는 반드시 두세 마리 정도의 줄새우가 잡힌다. 줄새우가 있다는 건 손의 감촉만으로도 바로 알 수 있다. 그때 망설임 없이 덥석 잡으면 된다. 아니면 살짝 가운데로 몰아 양손으로 잡아도 된다. 이렇게 하면 줄새우는 얼마든지 재미있게 잡을 수 있다. 줄새우 가운데는 가재처럼 큰 집게를 가진 친바-라는 녀석도 있다. 때로는 손가락이나 손바닥을 물려 놀랄 수도 있지만 다이이치는 그 친바-도 곧잘 잡았다. 엄마는 다이이치의 실력을 알고 줄새우 잡이를 부탁한 것이었다.(18)
산은 울음인지 고함인지 모를 소리로 소란스럽다. 마을 뒤에 서 있는 산의 절벽에 부딪혀 끊임없이 상공으로 솟는 바닷바람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쓸쓸한 비명을 지르며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그 소리에 대답이라도 하듯 나무들도 비명을 질러댄다. 그것은 때로는 온갖 탁한 소리를 모두 뒤섞어놓은 땅울림 같은 소리가 되어 여기저기에서 들려오고 때로는 각각의 나무들이 자신의 슬픔을 죄다 끌어모아 손으로 어루만지며 지르는 비명 같기도 하다. 소리에 강약은 있어도 결코 끊어지는 법은 없다. 산이 통곡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시즈에는 산의 통곡을 들은 것 같기도 했다. 누군가가 몸을 격렬하게 흔들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어둠 속에서 멀리 희미하게 투명한 하늘이 보이고 반짝반짝 빛나는 별도 보인다. 그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남편 겐타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다.(127)
소스강은 다이이치와 같은 아이들의 놀이터로 제격이었다. 좀 과장되게 말하자면 놀이터라기보다는 사는 법을 가르쳐주는 학습의 장이었다. 물론 다이이치에게 그런 자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다이이치는 강에 사는 생명들과 놀기를 좋아할 뿐이었다. 줄새우를 비롯해 잠자리 유충, 소금쟁이, 올챙이, 우렁이, 게, 장어, 그리고 수많은 물고기들…. 다이이치에게는 모든 생물이 신기했고 그들의 몸짓과 행동에 놀라는 경우가 많았다. 생물들의 모습을 보면서 다이이치는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지혜를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152~153)
다이이치는 모래사장에 발이 묶여 넘어지는 바람에 드럼통이 있는 곳에 다다르지 못했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전투기가 드럼통을 목표로 삼은 탓에 모래사장에 엎드리고 있던 다이이치는 그나마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이이치는 선회하는 전투기에 탄 미군 조종사의 얼굴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느낀 순간, 전투기가 다시 기총사격을 시작했다. 얼굴을 다시 모래사장에 묻고 있으니 입안 가득 모래가 밀려 들어왔다. 전투기가 지나간 후 다이이치는 얼굴에 붙은 모래알을 손으로 떼어내면서 얼른 고사쿠와 세이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무릎을 누르며 소리쳐 울고 있는 세이지 옆에서 고사쿠가 얼굴에 새빨간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고사쿠에게는 어떤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183)
“사치코가 반딧불이가 되어서 날아가는 건가 봐….”
미요가 이렇게 말하며 다이이치와 우메코 고모를 바라봤다. 미요가 가리킨 사치코의 돌무덤 위로 희미한 불빛이 깜빡이는 게 보였다. 그 가운데 큰 불빛 하나와 작은 불빛 하나가 있었고 작게 보
이는 불빛은 마치 큰 불빛의 손에 이끌려가듯 크게 좌우로 흔들리며 올라갔다. 품에 안겨 올라가는 것 같기도 했고 식구들과의 작별을 아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다이이치와 미요는 가만히 그 빛을 바라봤다.
“엄마가….”
우메코는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우메코의 말은 갑자기 수면 위로 뛰어오른 물고기 소리에 가려져 다이이치와 미요에게는 들리지 않았다.(238)
출판사서평
오키나와 작가 오시로 사다토시 첫 장편소설 출간!
오키나와 작가 오시로 사다토시가 쓴 첫 장편소설이 출간되었다. 이 장편소설은 오시로 사다토시의 작품으로는 처음 번역돼 출간되는 책이기도 하다. 단편 「K공동묘지 사망자 명부」가 번역 소개된 적은 있지만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은 처음이다. 이 장편소설은 작가가 시인으로 출발했다가 처음 쓴 소설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오키나와전쟁 전후의 소스강 주변의 마을을 다루며 오키나와 사람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제1장과 제2장에서는 3대가 함께 사는 겐스케 집안을 중심으로 자연과 생활, 민속, (한센병으로 인한) 갈등을 그려내고 제3장에서는 오키나와전쟁에 끌려간 오키나와 사람들의 슬픈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앞부분에서 전쟁은 아직 멀리 있는 이야기로 처리되지만 곧 다가올 운명이라는 듯 시즈에의 한센병을 중심에 두고 겐스케 집안과 마을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슬픔이 배치된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장점은 오키나와 지방의 자연과 민속을 빼어나게 재현해놓은 점이다. 물론 이 소설이 처음 출간된 때가 1993년인 점을 고려할 필요는 있지만, 이는 사실 지금의 한국 소설이나 국내에 소개되고 있는 대부분의 일본 소설과 크게 차이 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작가가 핍진하게 그려낸 오키나와의 자연과 민속은 상당히 감각적으로 살아 있어 하나의 ‘민속지’로도 손색이 없다.
식사를 마치고 한숨 돌린 후, 남자들은 각자 역할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분담하여 지붕 이엉을 잇는 작업에 들어갔다. 억새를 바닥에서 정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붕에 올라가 늘어놓는 사람도 있다. 구령을 붙여가며 모시풀 끝을 정리해 구멍을 낸 막대 봉에 줄로 엮는 사람이 있고 또 그것을 받아 모시풀을 단단히 묶는 사람도 있어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61)
소스강은 다이이치와 같은 아이들의 놀이터로 제격이었다. 좀 과장되게 말하자면 놀이터라기보다는 사는 법을 가르쳐주는 학습의 장이었다. 물론 다이이치에게 그런 자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다이이치는 강에 사는 생명들과 놀기를 좋아할 뿐이었다. 줄새우를 비롯해 잠자리 유충, 소금쟁이, 올챙이, 우렁이, 게, 장어, 그리고 수많은 물고기들…. 다이이치에게는 모든 생물이 신기했고 그들의 몸짓과 행동에 놀라는 경우가 많았다. 생물들의 모습을 보면서 다이이치는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지혜를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152~153)
작가가 ‘한국의 독자들에게’에서 “가족이나 생명의 고귀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문학의 보편적인 주제”라고 한 바와 같이 『생명의 강, 시이노 가와』에 흐르는 작가의 관점은 바로 이 생명의 관점이다. 한센병으로 고통 받는 시즈에와 그녀의 아이들, 그리고 소스강에서 살아가는 작은 생명체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눈에는 생명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넘쳐흐른다. 오키나와전쟁에 끌려간 사람들에게 보내는 시선도 그렇다. 이런 작가의 관점은 어쩌면 작가의 시적 감수성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일본 본토의 평론가 스즈키 히사오가 오시로 사다토시를 가리켜 “오키나와 전후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평가한 것은, 이미 오시로 사다토시의 내면에 오키나와의 역사와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자라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키나와의 삶과 슬픔, 그리고 희망
제3장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1944년 10월 10일 나하 주변 지역은 미군의 대공습을 받았다. 소위 ‘10·10공습’이라 불리는 이 공습에서 피해를 입은 가옥은 1만2000여 호에 이른다.” 오키나와전쟁의 시작을 알리려는 듯 곧이어 “같은 달 29일에는 만 21세에서 45세에 해당되는 남성이 방위대원으로 소집되었는데 겐타를 포함한 소스 마을 남자 십수 명이 소집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며 역사적 사건과 마을에서 일어난 일을 이어 붙인다.
사실 제3장은 오키나와전쟁으로 인해 벌어진 소스 마을의 변화를 전면으로 내세우면서, 한편으로는 전장에 끌려간 소스 마을 사람들을 교차로 보여준다. 이는 작가가 오키나와전쟁을 다루면서도 이 전쟁을 어느 관점에서 보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소설 전반부의 평화로운 소스 마을이 시즈에의 한센병 발병으로 공동체 내 갈등으로 치닫다가 종내에는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드는 구조를 갖는 것은, 작가가 실존의 조건과 역사적 조건들을 전부 넘어서는 희망을 말하고 싶어서였을까? 이 소설은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시즈에의 아들 소년 다이이치의 눈으로 그려져 있다는 점을 지적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소년 다이이치에게는 참으로 벅찬 일들이 연달아 닥치지만 그를 붙잡아주고 위로해주는 것은 결국 가족과 자연이었다.
특히 고모와 함께 반딧불이를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은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장면인데, 여기서 작가는 반딧불이로 상징되는 다른 세상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막내 동생 사치코의 죽음, 그리고 엄마 시즈에의 죽음을 반직불이의 날아오름으로 형상화하면서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것은 작가가 시적 감수성으로 이 장편을 썼다는 것을 새삼 증명해준다. 특이한 것은 아버지인 겐타의 죽음은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튼 다이이치 입장에서는 아빠, 엄마, 동생 사치코가 동시에 죽은 사건이 닥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이이치의 곁에는 자연과 거기에 사는 생명이 있었던 것이다.
미요가 이렇게 말하며 다이이치와 우메코 고모를 봤다. 미요가 가리킨 곳은 가족들이 사치코의 돌무덤을 만든 곳인데 그 위로 희미한 불빛이 깜빡이고 있는 게 보였다. 그 가운데 큰 불빛 하나와 작은 불빛 하나가 있었고 작게 보이는 불빛은 마치 큰 불빛의 손에 이끌려가듯 크게 좌우로 흔들리며 올라갔다. 품에 안겨 올라가는 것 같기도 했고 식구들과의 작별을 아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다이이치와 미요는 가만히 그 빛을 바라봤다.(261)
사실 엄마 시즈에가 움막을 지어 집을 떠난 사실은 알게 된 다이이치가 달려간 곳도 소스강인데, 이때 작가가 소스강에 사는 생명체들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것도 어쩌면 다이이치를 자연과 그 속에서 사는 생명으로 위로하려는 목적이었는지 모른다. 생명의 아픔과 고통은 다른 생명으로만 치유 가능하다는 듯이 말이다. 그렇다고 이런 방식을 진부한 사실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온당치 않을뿐더러 과녁을 한참 빗나간 소감일 것이다.
왜냐하면 작가 오시로 사다토시에게는 오키나와 지역의 자연과 생명들이 이미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를 쓰다가 처음 쓴 장편소설이라는 사실은 시적 서정으로는 다하지 못한 이야기가 작가의 내면에 고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이 소설의 도처에서 시적인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반딧불이가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도 그런 맥락에서 읽었을 때 그 슬픔과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이에 대해 작품 해설을 쓴 평론가 김동현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생명의 강, 시이노 가와』의 마지막 대목을 읽다 보면 서정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전쟁을 이야기하되 슬픔에 빠지지 않으려는 서늘한 긴장이 느껴진다. 마지막 부분의 시간적 배경만 보면 오키나와전쟁이 끝나려면 5개월이나 남았다. 더 큰 파국이 이들 남매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 장면이 있기에 두 남매가 끝까지 살아남기를, 끝내 살아남아서 오키나와전쟁을 기억하고 말할 수 있기를, 반딧불이처럼 빛나고 빛나는 삶을 이어가기를 기대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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