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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선생의 소실 정씨와 딸에 관하여 읊은 시(절구) - "남당사(南塘詞)" 일부

Bawoo 2014. 3. 26. 21:28

다산 정약용 선생은 강진 유배 시절에 소실을 들였고 두 분 사이에는 '홍임'이란 이름의 딸이 한명 있었습니다. 소실을 둔 이유는 다산초당에 드나드는 문하생-18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의 수발을  들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지만 선생뿐이 아니라 조선조 장기간 유배형을 당한 중앙 고위 관리 출신들은 대부분 유배지에서 현지 여인과 사실혼 관계를 맺고 지냈다고 합니다. 다산 선생의 형으로 현산어보란책을 쓴 정약전 선생이 그랬고 정조 시해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한 '조정철'이란 인물도 그랬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라는 책 참조). 

 

조정에서 고위 관직에 있던 인물들이 유배형을 당하는 것은 대개  정쟁에서 밀린 경우인데  시대가 바뀌면 복권이 되어 유배 전보다  더 높은 벼슬 자리에 오르는 경우가 많아  유배지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소위

지역 유지들은 이런 유배객들과 연을 맺기 위한 방편으로 그 지역 여인과 유배객이 사실혼 관계를 맺도록

유도했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이렇게 유배객과 연을 맺은 유배지 여인의 경우 설사 유배객이 해배되어 복권이 되더라도 같이 한양으로 올라가 산 경우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부분은 전문 학자의 사실과 다르다는 연구 내용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산 선생의 경우 해배되면서 두 모녀를 본가로 데리고 갔다는 기록이 있으나 정실인 홍씨 부인의 반대로 쫓겨나다 싶이 강진으로 다시 내려왔다고 합니다. 이후의 두 모녀 행적에 대하여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고 '본가에서 쫓겨날 때 양근의 박생이란 인물에게 딸려 보냈는데 이 자가 호남 장성부의 부호인 김씨와 은밀히 모의하여 소실로 들이려 한 것-박생이란 인물이 다산 선생의 부담을 줄여주려고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을 완강히 거부하고 다산 초당에 잠시 머무르다 결국 친정으로 들어갔다'는 정도의 기록이 전해지는데 지은 이를 알 수 없는 '남당사(南塘詞)'라는  절구 16수에 두 모녀의 애절한 사연이 전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 남당사 절구 16수 중에 2수를 옮겨보았습니다.

 

*넷째 수*

어린 딸 총명함이 제 아비와 똑같아서    (幼女聰明乃父如-유녀총명내부여)

아비 찿아 울면서 왜 안 오냐 묻는구나   (喚爺啼問盖歸歟-환야제문개귀여)

한나라는 소통국도 속량하여 왔다는데   (漢家猶贖蘇通國-한가유속소통국)

무슨 죄로 아이 지금 또 유배를 산단말가(何罪兒今又謫居-하죄아금우적거)

 

 - 선생의 딸 '홍임'은 1813년에 태어났고 선생의 해배는 1818년에 이루어졌으므로 이 해에는 이미 여섯살때 인 것으로 보여 한창 아빠를 찿을 나이입니다.

- 3구의 '소통국'은 중국 한나라 시절,'소무'가 흉노에 억류되어 살 때 흉노녀와 살며 낳은 아들인데 뒤에

아버지를 따라 한나라로 들어와 낭중 벼슬을 제수받은 인물이라고 합니다.

(다산 선생의 딸 '홍임'이 선생 곁에 있지 못하고 귀양지였던 강진에 머물고 있는 것을 비유로 원망한 글로 보입니다.)

 

*열다섯째 수*

남당의 봄물에 안개가 절로 일고        (南塘春水自生煙-남당춘수자생연)

물가 버들,강가 꽃이 객선을 덮는구나 (渚柳汀花覆客船-저류정화복객선)

하늘가 곧장 가서 한 길이 통한다면    (直到天涯通一路-직도천애통일로)

가는 편에 아이 실어 소내에 닿을텐데 (載兒行便達牛川-재아행편달우천)

 

-다산 선생의 소실 정씨는 결국 남당에 있는 -강진에 남당포란 곳이 있었다고 합니다- 본가로 들었다고

합니다. 딸을 배편에 실어 아빠인 다산선생이 있는 소내로 보내고 싶다고 하는 마음은 마음만으로 끝나고

모녀는 그렇게 잊혀졌다고 합니다. 유배객들이 유배지에서 현지 여인을 소실로 맞아들여 자식까지 낳고

살았지만 서얼차별이 유난이도 심했던 조선사회에서는 잊혀질 수밖에 없는 존재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이야기가 조금 비약인 듯 싶지만 우리나라가 못살던 60년대  시절만 해도 양공주라고 불리던 우리 젊은 아가씨들이 미군들의 현지처를 하다가 버림을 받았고- 파주에서 중학교 다니던 시절 직접 목격도 했습니다- 월남전 당시  참전했던 우리나라 군인들이나 기술자들이  월남 아가씨들과의 사이에 아이까지 낳고 나 몰라라 한 것도 유사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 아니 남자들의 이기심인 줄 뻔히 알면서도 거기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가여운 여인들의 삶을 들여다 보게 되는 가슴 아픈 한 장면으로 생각됩니다. 

다산 선생은 모르긴 몰라도 삶을 마칠 때까지 두 모녀에 대한 죄책감에 편할 날이 없는 삶을 사시지 않았을까 멋대로 생각해봅니다만 대부분의 다른 인간들은 나몰라라 하며 잘 먹고 잘 살았엤겠죠. 에구!

 

*출처: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란 책 중 '다산의 부정이 담긴 매조도 두 폭'이란 글을 주로 참고하고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라는 책의 내용과  제 개인 의견을 덧붙였습니다. 

 

                                                   *글 쓴이: 바 우  우 원 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