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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ichard Strauss : `낙소스섬의 아리아드네` 서곡`

Bawoo 2014. 4. 6. 22:30

Richard Strauss : '낙소스섬의 아리아드네' 서곡'

Richard Strauss : 'Opera Ariadne Auf Naxos' Overture 

 

 


 

 

Richard Strauss : '낙소스섬의 아리아드네' 서곡'

Richard Strauss : 'Opera Ariadne Auf Naxos' Overture

Richard Georg Strauss, 1864. 6. 11 - 1949. 9. 8) 독일

 

뮌헨 궁정 오페라 극장의 호른 주자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오스트리아)(Franz

Josef Strauss, 1822~1905)의 아들로 4세 때부터 정규 음악 교육을 받고, 6세 무렵부터 궁정 악장 마이어(Friedrich Wilhelm Meyer)에게 작곡과 이론을 배웠다. 1881년(17세) 「교향곡 제1번」을 초연하고 이듬해에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발표하면서 작곡가로서 알려지게 된다. 그러나 양친의 의향에 따라 이 해부터 뮌헨 대학에 들어가 철학·미학·문학사를 청강했다. 수업 후 대지휘자 한스 폰 뷜로에게 인정받고, 그 관현악단을 위해 「13 취주 악기를 위한 모음곡 Suite für 13 Bläserinstrumente」(1884)을 쓰고 스스로 연주 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는 평생 지휘 활동을 계속해 간다. 각지의 궁정 극장에 근무한 뒤, 1889년(25세)부터는 바이마르 궁정 극장의 제1악장이 되고 1895년까지 재임했다.

 

이 무렵부터 제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의 약 20년간은 그에게 있어 가장 수확이 많은 활동기로서 「살로메 Salome」(1905)와 「장미의 기사 Der Rosenkavalier」(1910)를 비롯한 중요한 악극,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관현악곡)(1895),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Also sprach Zarathustra」(1896), 「영웅의 생애 Ein Heldenleben」(1898) 등의 교향시와 「가정교향곡 Sinfonia domestica」(1903), 그리고 실내악곡과 많은 가곡을 써 냈다. 또한 이 동안에는 연주 여행도 활발해서 그 범위는 독일이나 유럽의 각지는 물론, 러시아·미국에까지 달하고 있다. 제1차 대전 후는 독일의 정치 정세도 불안정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슈트라우스 (Richard Strauss) 신기(神技)에 가까운 관현악법으로 교향시 분야에서 사상 최대의 업적을 남긴 독일 근대의 거장. [네이버 지식백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음악의 역사 (음악사 대도감), 1996.9.10, 한국사전연구사)

 

1932년(68세) 나치스가 정권을 잡은 무렵에는 빈 오페라 극장 지휘자의 지위에 있었으며, 정부로부터 우대를 받아 후에 음악국 총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나치스의 유태인 배척 운동에 비협조적인 데다가 유태인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1881~1942)의 대본에 의해 희극 「말없는 여자 Die schweigsame Frau」(1935)를 쓰기도 해서 당국으로부터 배척당했다. 그 때문에 총재를 그만두고 산장에 은둔하는 생활을 했지만 자작의 지휘 활동은 계속되었다.

 

1945년(81세) 독일은 패배하고 이 당시 슈트라우스(오스트리아)는 스위스에 이주했으나, 나치스 협력 혐의로 재판에 넘겨지고 결국은 무죄로 석방된 바 있다. 이후는 약간의 지휘 활동은 제외하고 조용한 여생을 보내다가 1949년 85세의 생애를 마쳤다.R. 슈트라우스(오스트리아)는 극히 정력적인 활동가였으며, 그 음악도 또한 다면적인 작풍을 보였는데, 특정한 주의나 주장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예술가라기보다는 장인(匠人)이라고 평가된 적도 있지만, 새로운 기법은 적극적으로 도입하려고 노력했다.

 

< R. 슈트라우스가 살았던 집과 거실 >

 

많은 음악가의 영향을 받았는데 바그너(독일)의 악극과 관현악법을 계승하는 한편, 리스트(헝가리)풍의 교향시를 확충해서 낭만주의 음악에 최후의 꽃을 피우게 한 점이 슈트라우스(오스트리아)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하겠다. 또 200곡 이상의 가곡의 창작에 의해 근대 독일 가곡사상 그의 공적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 밖에 주요 작품으로는 악극 「엘렉트라 Elektra」(1908), 교향시 「돈 환 Don Juan」(1888), 「죽음과 정화 Tod und Verklärung」(1889), 「알프스 교향곡 Eine Alpensinfonie」(1915), 「호른 협주곡 제2번」(1942)과 많은 가곡이 있다.

 

< R. 슈트라우스의 생가와 생가에 걸린 명판 > 

 

낙소스섬의 아리아드네 [ Ariadne auf Naxos ]

1916년 작곡한 오페라 1막극

 

오스트리아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후고 폰 호프만스탈(Hugo von Hofmannsthal)이 몰리에르의 희곡 《평민귀족 Le Bourgeois Gentilhomme》(1670)을 참조하여 쓴 대본을 토대로 하여 만든 부수음악으로, 1916년 빈에서 초연되었다.

 

테세우스에게 버림받은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 [ Ariadne Abandoned by Theseus on Naxos ] 

       안젤리카 카우프만 作 1774년. 캔버스에 유채물감. 63.8×90㎝. 미국 텍사스 주, 휴스턴 미술관

 

배경은 18세기의 빈이다. 한 이상주의 작곡가가 자신의 오페라세리아인 《낙소스섬의 아리아드네》가 콤메디아델라르테와 함께 공연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깜짝 놀라면서 오페라는 시작된다. 희극과 비극이 번갈아 나오고 옛것과 새것의 결합이 이루어지며, 배우들이 오페라의 줄거리에 맞추어 그때그때의 영감에 따라 즉흥연기를 펼치는 점이 인상적이다. 작품 전체에 대규모 실내 오케스트라의 웅장함과 바로크적인 색이 짙게 깔려 있으며 슈트라우스의 작품 가운데 가장 완성도가 높다는 평을 듣는다.

 

<조지 프레드릭 왓트 作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지휘자 막스 라인하르트가 《장미의 기사》 리허설 중 슈트라우스와 호프만슈탈에게 준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호프만슈탈은 베를린에 위치한 라인하르트의 독일 극장에 어울릴 ‘새로운 종류의 여흥거리’를 착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몰리에르의 희곡 「귀족 수업」에 슈트라우스가 음악을 넣어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를 완성시켰다. 그러나 라인하르트 극장은 이 작품을 세우기에 여러모로 역부족이었고, 결국 이것은 슈투트가르트에서 초연되었다. 여러 장르의 결합물이었던 이 작품은 호응을 얻지 못했고, 결국 새로운 버전으로 다시 탄생했다. 이번에는 희곡 부분을 다음 내용의 프롤로그로 대체하였다.

 

‘빈 최고의 부호’가 그의 손님들을 위하여 오락거리를 마련한다. 그러나 일의 진행이 느려지자 그는 희가극과 비극적 내용의 오페라가 동시에 공연되도록 명령한다. 그리하여 결국 희극 배우들이 등장하여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슈트라우스는 거만한 프리마돈나와 잘난 척하는 테너들을 재미있게 그려낸다. 슈트라우스는 모차르트와 같은 천재성을 지닌 젊은 이상주의 작곡가 배역에게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부여한다. 희극배우인 체르비네타는 고도의 기교가 요구되는 콜로라투라 배역이다.

 

월터 레그는 이 음반 녹음을 위한 기악주자와 성악배우들을 직접 뽑았다고 한다. 이 음반은 모노 녹음 방식으로 제작되었지만 들어보면 그 사실을 믿기 힘들다. (네이버 지식백과)

 

벼락 귀족-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오페라 작곡가들의 가장 큰 고민은 곡과 음악의 일치를 어떻게 실현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자곡가들은 이러한 고민을 최소한 덜기위해 대본 작가들과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곤 하였는데,때론 대본 작가들을 믿지 못하여 직접 자신이 집필하는 경우도 있다. 리하르트 쉬트라우스는 이러한 점에 있어서는 비교적 행운을 타고난 셈이다. 그에게는 다폰테 못지 않은 후고 폰 호프만스탈이라는 재능있는 동료가 있었다.두사람의 운명적인 만남은 쉬트라우스가 '살로메'의 성공이후, 다음 오페라의 소재를 물색하던중 1903년 베를린에서 공연된 호프만스탈의 '엘렉트라'에 관심을 갖게 디되면서 시작되었다. 사실 그 이전부터 호프만스탈은 쉬트라우스와의 공동작업을 희망하여 그에게 편지까지 보낸 적이 있다. 두 사람은 곧 위기투합하여 '일렉트라'를 단숨에 성공시켰고, 다음 작품인 모차르트풍의 '장미의 기사'까지 호흡을 맞추어갔다.

 

'장미의 기사'공연때에는 또 한명의 귀중한 조력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유명한 연출가였던 막스 라인하르트이다. 각기 다른 분야의 최고의 자리에서 근대 독일 예술을 이끈 세 사람의 예술가는 '장미의 기사'의 대대적인 성공에 힘입어 고전 사극과 오페라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시도에 도전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선택된 소재가 바로 몰리에르의 희극 '벼락귀족'이다. 그들의 계획은 몰리에르숱 희극 3막에서 극의 주인공이 초대한 손님들에게 오페라 '낙소스섬의 아리아드네'를 상연하는 내용이였는데, 악취미가 있었던 '벼락귀족'은 비장하기만해야할 이 고대 희랍 비극에 갑자기 어릿광대인 알렉킨과 체르비네타를 출연시켜 고전극과 근대 희극을혼합시켜버린다는, 실로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즉 벼락귀족 주르당의 장난을 빌어 호프만스탈과 쉬트라우스가 의도한 것은 세리아와 부파의 결합이라는 전대미문의 시도였다. 이를 위하여 이 연극에는 2개의 서곡과 아리아, 판토마임, 발레 등 다양한 요소들이 동원되는데, 모든 것은 바로크적인 정신에 의해 통일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원대한 포부에도 불구하고 너무 장황하게 길어진 공연 시간으로 말미암아 1912년 슈투트가르타에서의 초연은 비참하게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후 1916년 대대적인 개정에 착수하였는데 '벼라귀족'에서 사용하던 부수음악은 모음곡으로 따로 만들고, '낙소스섬의 아리아드네'는 새로운 프롤로그를 붙여 완성했다.

 

바로크적인 이상을 실감나게 연출

 

쉬트라우스가 바로크적인 이상에 접근하기위해 노력한 이 역작은 이러한 이유로 개정판만이 주로 연주되어 왔는데, '살로메'의 불어판을 녹음하여 화제를 뿌렸던 켄트 나가노가 최근 발표한 이 음반은 '아리아드네'의 원본을 바탕으로 레코딩한 것이다. 앞의 '벼락귀족'은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켄트 나가노의 레코딩은 연극대신 도미니크 볼케르트가 다시 손질한 주르당의 모놀로그 버전을 채택했다. 이 버전은 주르당의 함축있는 대사와 쉬트라우스의 음악이 적절히 혼합되어 원본의 모습을 크게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전혀 지루하지 않게 구상되었다. 이 단축 버전 연주의 일등 공신은 켄트 나가노로, 섬세한 감각을 바탕으로 한 그의 재치있는 해석은 쉬트라우스가 의도했던 바로크적인 이상의 실현을 매우 실감나게 연출하고 있다.

 

작은 편성의 오케스트라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장면마다 다른 색감을 연출해내는 그의 뛰어난 안목이 더욱 빛을 발한다. 뿐만 아니라, 적재적소에 캐스팅된 출연진들도 매우 완성도높은 연주를 들려준다. 기교적인 콜로라투라의 대표적인 배역으로 손꼽히는 체르비네타는 조수미가 맡아 열창하였는데, 그녀의 매끈한 프레이징과 눈부신 기교는 과거 이 역의 뛰어난 해석자인 리타 쉬트라이히나, 에디타 그루베로바를 능가할 정도로 출중하다. 한편 기품있는 아리아드네에 잘 어울리는 마가리트 프라이스의 관록있는 가창도 만족스러우며 할레킨, 톨파프딘, 스카라무초등 광대들의 익살스러운 노래에선 부파다운 흥겨움을 만끽할 수 있다. 리옹 오페라의 투명한 합주력도 인상적이다. <양진모 / 음악칼럼니스트>

 

 

 

 

 

출처 : 멀뚱박사의 사랑방
글쓴이 : 멀뚱박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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