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글은 추사 선생이 그리고 쓴 세한도 중 그림 왼쪽에 붙어 있는 글-발문이라고 합니다-입니다.
세한도는 교과서에까지 나온 그림이라 우리 옛그림에 관심이 없는 분들도 익히 잘 알 정도로 유명한
그림이지만 글의 내용까지 알고 있는 분은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세한도는 1844년에 종이에 수묵으로 그렸고 크기는 23.7x108.2(1389)cm, 소장자는 개인(손창근)이고
국보 제 18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발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아래,
지난 해 만학집과 대운산방문고 두 책을 부쳐 주었고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 -거년이만학대운이서기래)
금년에는 또 황조경세문편을 부쳐주었소.
(又以우畊文編寄來 우이우경문편기래)* 우:蕩자의 밑 偶의 인변 대신 삼수변.
이 책들은 모두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此皆非世地常有-차개비세지상유)
천만리 먼 곳에서 여러 해에 걸쳐 사들인 것이지
(購之千萬里之遠 積有年而得之-구지천만리지원,적유년이득지)
일시에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라오.
(非一時之事也-비일시지사야)
더구나 세상의 흐름은 권력과 이익만을 쫒는데
(此世之滔滔 惟權利之是趨-차세지도도 유권리지시추)
그대는 이 책들을 구하느라 이같이 마음을 쓰고 힘을 기울여서
(爲之費心費力如此-위지비심비력여차)
권세가, 재력가에게 주지를 않고
(以不以歸之權利-이불이귀지권리)
외딴 섬에서 초췌하게 몰락해 있는 사람에게 주기를
(乃歸之海蕉悴枯槁之人-내귀지해초췌고고지인)
세상 사람들이 권세가와 재력가를 좇듯이 하였구려.
(如世之趨權利者-여세지추권리자)
태사공이 말하기를 '권력이나 이익으로 만난 사람들은
(太史公云,利權利合者 -태사공운 이권리합자)
권세나 이익이 바닥나면 교유도 소원해진다'고
(權利盡而疎交 - 권리진이소교)
그대 또한 이러한 세상 속의 흐름에 속해 있거늘
(君亦世之滔滔中一人 - 군역세지도도중일인)
어찌 세상의 권력과 이익을 쫒는 도도한 흐름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나
(其有超然自拔於滔滔權利之外-기유초연자발어도도권리지외)
권세나 재력의 잣대로 나를 대하지 않는단 말이오.
(不以權利視我耶 - 불이권리시아야)
사마천의 말이 틀렸던가?
(太史公之言非耶 - 태사공지언비야)
공자 말하기를 '추운 시절이 된 뒤에'
(公子曰 歲寒然後 - 공자왈세한연후)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 하셨소.
(知松柏知後凋 - 지송백지후조)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계절 시들지 않는 나무들이요
(松栢是毋四時而不凋者 - 송백시무사시이부조자)
추워지기 전에도 소나무, 잣나무요
(歲寒以前一松栢也 -세한이전 일송백야)
추워진 이후에도 똑같은 소나무, 잣나무이거늘
(歲寒以後一松柏也 - 세한이후일송백야)
성인께서는 추워진 뒤의 두 나무들을 칭찬했다오.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 성인특칭지어세한지후)
지금 그대가 나에게 대하는 것이
(今君之於我 - 금군지어아)
이전에 더한 것이 없고 이후에 덜한 것이 없소
(由前而無加焉,由後而無損焉-유전이무가언,유후이무손언)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것이 없었으나
(然由前之君無可稱-연유전지군무가칭)
이후의 그대 또한 성인으로부터 칭찬받을 만한 것이겠소
(由後之君亦可見稱於聖人也耶-유후지군역가견칭어성인야야)
성인께서 특별히 칭찬하신 것은
(聖人之特稱-성인지특칭)
늦도록 푸른 정조와 굳건함 때문이 아니라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비도위후조지정조경절이이)
추워진 뒤에 느끼신 바가 있었기 때문이오.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역유소감발어세한지시자야)
오호라 전한의 순박한 시절 (烏呼西京淳厚之世-오호서경순후지세)
급암과 정당시같은 훌륭한 사람들마저 (以汲鄭之賢-이급정지현)
빈객들이 그들의 성쇠와 함께 했으니(賓客與之盛衰-빈객여지성쇠)
적공이 대문에 써붙여 풍자한 것은 (如下邳榜文-여하비방문)
박절함의 극치라오. 슬프도다(迫切之極矣,悲夫-박절지극의,비부)
늙은이 완당이 쓰노라 (阮堂老人書 -완당노인서)
* 해제*
-세한도는 추사선생 제주 유배시절 제자인 '이상적'(1804~1865)이란 분이
추사선생의 궁박한 신세를 외면하지 않고 보살펴 준데 대한 고마움을
편지로 쓰고 그 옆에 문인화 형식으로 그려 붙인 그림입니다.
편지의 내용은 모두 '사마천의 사기'에 근거한 내용들이라고 하는데
그림, 편지 모두에 유배 중인 추사선생의 개인적인 비분강개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해설은 아래 다른 분 자료 참조 )
* 자료 출처: 고연희 님의 '그림 문학에 취하다'란 책 내용 중 '김정희의 세한도'에서 발췌.요약
* 세한도 전체 그림
저자소개 김정희(金正喜 : 1786(정조10)~1856(철종7))는 조선 말기의 문신·학자·서화가. 자(字)는 원춘(元春), 호(號)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노과(老果)·시암(詩庵) 등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24세 때 부친 김노경(金魯敬)을 따라 연경(燕京)에 가서 청(淸) 나라의 거유(巨儒) 옹방강(翁方綱)·완원(阮元) 등으로부터 지우(知遇)를 입었다. 1840(헌종6)년에 윤상도(尹尙度)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9년간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위의 글은 완당이 1844(헌종10)년에 제주에서 『세한도(歲寒圖)』를 그리고 그 끝에 쓴 발문(跋文)인데, 『완당전집』 제 4권에 “이우선에게 보냄(與李藕船)”이라는 편지로 실려있다. 이 글에 의하면 『세한도』는, 불우한 처지에서 귀양살이하는 작자 자신을 조금도 괄시하지 않고 옛날처럼 변함없이 대해주는 제자 이상적(李尙迪)의 태도에 감동한 나머지, 그의 인품을 엄동이 된 뒤에도 잎이 지지 않는 송백(松柏)의 지조에 비유하여 그림으로 그려준 것이다. 이상적은 역관(譯官)인데, 호가 우선(藕船)이다. 우선은 그 이듬해에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에 가서 그곳의 명사 장악진(章岳鎭)·조진조(趙振祚) 등 16인에게 보이고 그들의 찬시(讚詩)를 받아 발문에 이어 붙였다.
그 뒤 완당의 문하생 김석준(金奭準)의 찬(贊)과 오세창(吳世昌)·이시영(李始榮)의 배관기(拜觀記) 등이 다시 첨가되어 이 그림은 긴 두루마기를 이루게 되었다. 그림의 오른쪽 여백에는 작자가 큰 글씨로 ‘세한도’라는 화제(畵題)를 가로로 쓰고 작은 글씨로 ‘우선은 감상하라[藕船是賞]’라는 관지(款識)를 세로로 쓴 다음, 행을 바꾸어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쓰고 ‘정희(正喜)’라는 이름이 새겨진 도서(圖署)를 찍었다. 화면에는 수묵으로 집 한 채와 소나무·잣나무를 각각 두 그루씩 대칭을 이루도록 그렸을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여백으로 처리하였는데, 고상한 문인화의 품격이 돋보이는, ‘서화(書畵)가 함께 잘 어우러진 걸작이다. 이는 현재 개인이 소장하고 있으며, 국보(제180호)로 지정되어 있다. 발문의 끝에 보이는 적공(翟公)의 고사는 이러하다. “한(漢) 나라 때 적공이 정위(廷尉)가 되자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가 실각하자 이내 그의 대문에는 참새 그물을 칠 정도로 인적이 끊기고 말았다. 그 뒤 그가 다시 정위가 되자 또 당초처럼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에 그는 대문에다 ‘죽고 사는 갈림길에 서봐야 교정을 알게 되고, 사업에서 망하고 흥해봐야 교태를 알게 되며, 벼슬길에서 귀천을 겪어봐야 교정이 나타난다.[一生一死, 乃知交情, 一貧一富, 乃知交熊, 一貴一賤, 交情乃見.]’라고 써 붙여 세상 사람들의 염량세태를 신랄하게 책망하였다.”(『史記· 汲鄭列傳』)
참고: 위 내용은 검색하여 나온 자료 중 일부를 옮긴 것입니다.(출처:카페 '삼덕동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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