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文學) 마당 ♣/- 우리 현대시

고재종 시인 시 몇 수

Bawoo 2014. 6. 29. 23:16

 

-면면綿綿함에 대하여-

 

                                                            느티나무             

  너 들어보았니

  저 동구 밖 느티나무의

  푸르른 울음소리

 

  날이면 날마다 삭풍 되게는 치고

  우듬지 끝에 별 하나 매달지 못하던

  지난 겨울

  온몸 상처투성이인 저 나무

  제 상처마다에서 뽑아내던

  푸르른 울음소리

 

  너 들어보았니

  다 청산하고 떠나버린 마을에

  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고

  소리 죽여 흐느끼던 소리

  가지 팽팽히 후리던 소리

 

  오늘은 그 푸르른 울음

  모두 이파리 이파리에 내주어

  저렇게 생생한 초록의 광휘를

  저렇게 생생히 내뿜는데

 

  앞들에서 모를 내다

  허리 펴는 사람들

  왜 저 나무 한참씩이나 쳐다보겠니

  어디선가 북소리는

  왜 둥둥둥둥 울려나겠니

 

주: 면면함-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상태,우듬지-나무줄기의 끝부분

 

 

 

 

-겨울숲은 저 홀로 정정하다-


겨울 숲에서

쑥대밭 된 희망을 끌고 뒷산에 오르는데
눈발 한점 없이 쟁명한 소한
바람 하나는 온통 쟁쟁한 울음이도다

텅 빈 들길을 지나 이윽고 들어선 산 초입엔
성성하던 백발 죄다 뜯기고 긴 꽃대궁과 잎새만
바싹 벼린 바람의 날에 씻기고 있는 억새밭
그곳에서 장끼와 까투리 앓는 소리를 듣는다
그 사랑자리가 꼭 살 베이는 억새밭이어야 했는지
다만 메마른 것은 늘 메마른 바람을 부른다

좀더 올라 떼찔레며 칡덤불 얼크러진
그곳에 우수수 쏟아진 붉은머리오목눈이떼
그들이 콕콕 찍는 빨간 열매는
그 무리에 비하면 양이 너무 적겠다
새들에게도 겨울 양식은 늘 부족할 것이다

새야 새야 그러나 저 빽빽한 잡목숲에
아직 손가락만한 크기의 어린 떨기나무들은
발가벗은 어린아이와도 같이
회초리도 휙휙 후리며 겨울을 잘 나고 있다

도리깨를 만들던 간부태나무, 열매기름을 짜서
석유 대신 쓰던 산초나무, 잎을 찧어 냇물에 풀어
그 독으로 고기를 잡던 때죽나무, 김치에 넣어
향을 내던 잰피나무, 싸리비 매던 싸릿대,
열매의 빨간 빛이 너무 좋던 마가목과
참빗살나무, 깨금나무, 정금나무, 갈매나무랑
이름이 반짝이던 나무들도 그 이름까지
다 벗어버린 정갈함으로 바람에 씻기고 있다

그때 마침 따다다다닥 따다다다닥
소리 들려 고개 번쩍 드니 아아 거기
오동나무를 온통 구멍내고 있는 청딱다구리여
너 이 치운 날에도 부지런히 일하는도다
너 일하는 소리 있어 숲도 비로소 이 세상이다

네 소리에 홀려 걷다보니 바스락바스락
이윽고 가랑잎 속에 푹푹 발 빠지는 걸 몰랐다
참나무숲인 걸 몰랐다, 바스락거리는 것은
발 밑만이 아닌 숲 전체인 것이니
갈참 굴참 물참나무 상수리나무 도토리나무들
대개는 황갈잎 추하게 달고 한없이 바스락거리며
숲속의 정정한 고요를 여지없이 흔들고 있는
겨울숲에도 욕심으로 타락한 것들 너희다

아니다 아니다 참나무밭엔 돌보지 않은 무덤들
하나 둘 흙무더기로 주저앉는 무덤들
또또 애장무덤들 많아서, 어쩌면 그 슬픔으로
저 참나무잎들 참말로 떨어지지 못하고 우는도다

오호 그래서 죽음은 서러운 것이다
어느 무덤 둘레에 심은 산수유나무의 따내지 않은
그 열매를 쪼으고 있는 곤줄박인가 어친가 하는
그 새도 묻힌 자의 한 영혼인지도 모르겠다
삐비비비 우는 소리에 저승내음이 묻었다

그러다 나는 어느 순간 새하얀 나라에 들도다
내 어릴 적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개간하다
돌자갈 많아 버린 그 개간지터에 심은
은사시나무떼 무단히 하늘 찌르게 자라서
그 시원히 벗어버린 알몸들이 새하얀하다
그 하얀 몸이 황갈색 조선숲 속의 이방인 같다
사람은 어리석어 숲속에다도 부조화를 연출했도다

이윽고 이윽고 나는 청설모를 쫓아간다
한 열마리나 되는 청설모떼가 쏜살같이 나타나
그 뒤를 허억허억 쫓았으나 청설모는 그만
나무와 나무 위로 몸을 날리며 사라지고
내 영혼은 마침내 웅엄한 교향학 속에 들었도다

머언 광야를 달려온 듯 웅웅대는 청솔바람소리
그 장엄의 소리는 꼭이 시원에서 들려오는 소리
아니고선 저러할 수 없는 청솔바람소리

그러다가도 또 어느 순간엔
쏴아쏴아 지친 몸에 찬물 쏟아붓는 소리이다가
솨알솨알 쑥대밭된 희망을 빗질하는 소리이다가
급기야 부리부리한 눈 부릅뜨게 하여, 어느
먼 정신에게로 뜨거이 치닫게 하는 청솔바람소리

나 그 솔숲에 강렬한 경건함으로 서 있노라니
겨울숲은 다 벗어버리고 저 홀로 정정하다
겨울숲은 울음 깊어 저 홀로 성성하다
겨울숲은 제 품엣것들 모두 제 삶으로 엄정하여
나 그만 쩡쩡 추운 겨울숲에서 온몸 달아오른다

그 뜨거움에 겨워 계곡으로 미끄러져 내려가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뭔가 기척을 느껴 돌아보니 거기
웬 꽃사슴 한마리가 나와 눈을 딱 마주친다
저기 언덕 위 농장에서 뛰어나왔는지
웬 꽃사슴 한마리가 도망칠 줄도 모르고
어쩌자고 눈을 데굴데굴 굴려 나에게 웃는다
사람이 마음 씻으면 꽃사슴하고도 웃는다

산 내려오는 길 아이처럼 싱싱해져
나 홀로도 경건하게 깊어진 뒤 싱싱해져
쟁명한 하늘 쟁쟁하던 바람도 그윽해졌도다
겨울 숲

 

* 들길에서 마을로 *

 

들길에 서서 - 신석정

 

 

  해거름, 들길에 선다. 기엄기엄 산그림자 내려오고 길섶의 망초꽃들 몰래 흔들린다. 눈물방울 같은 점점들, 이제는 벼 끝으로 올라가 수정방울로 맺힌다. 세상에 허투른 것은 하나 없다. 모두 새 몸으로 태어나니, 오늘도 쏙독새는 저녁 들을 흔들고 그 울음으로 벼들은 쭉쭉쭉쭉 자란다. 이때쯤 또랑물에 삽을 씻는 노인, 그 한 생애의 백발은 나의 꿈. 그가 문득 서천으로 고개를 든다. 거기 붉새가 북새질을 치니 내일도 쨍쨍하겠다. 쨍쨍할수록 더욱 치열한 벼들, 이윽고는 또랑물 소리 크게 들려 더욱더 푸르러진다. 이쯤에서 대숲 둘러친 마을 쪽을 안 돌아볼 수 없다. 아직도 몇몇 집에서 오르는 연기. 저 질긴 전통이, 저 오롯한 기도가 거기 밤꽃보다 환하다. 그래도 밤꽃 사태 난 밤꽃 향기. 그 싱그러움에 이르러선 문득 들이 넓어진다. 그 넓어짐으로 난 아득히 안 보이는 지평선을 듣는다. 뿌듯하다. 그 뿌듯함은 또 어쩌려고 웬 쑥국새 울음까지 불러내니 아직도 참 모르겠다. 앞강물조차 시리게 우는 서러움이다. 하지만 이제 하루 여미며 저 노인과 나누고 싶은 탁배기 한 잔. 그거야말로 금방 뜬 개밥바라기별보다도 고즈넉하겠다. 길은 어디서나 열리고 사람은 또 스스로 길이다. 서늘하고 뜨겁고 교교하다. 난 아직도 들에서 마을로내려서는 게 좋으나, 그 어떤 길엔들 노래 없으랴. 그 노래가 세상을 푸르게 밝히리. *

 

양희은 들길 따라서:http://www.youtube.com/watch?v=hOOFPVJoVrw&feature=player_embedded

 

고재종(1959~ ) 시인
1984년 실천문학사 시 '동구밖집 열두 식구' 발표
<자료 출처 : 시-'서정시가 있는 문학강의실'이란 책/ 지은이 프로필 및 느티 사진-검색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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