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국제통화제도는 ‘무제도(non-system)’라고 불린다. 어떤 규범이나 국제적 합의에 의해 움직이는 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1971년 미국의 달러화 금 태환 중지 선언으로 달러화를 기축통화로 한 고정환율 제도인 브레턴우즈 체제가 무너지면서 각국은 자유로이 환율 제도를 택하게 되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최근 보고서에 의하면 99개국이 변동환율제도를 채택하고 있으며 나머지 92개국은 달러화, 유로화, 혹은 복수통화바스켓에 환율을 고정시키거나 아예 달러나 유로화를 자국 통화로 사용하는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변동환율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 중에서도 미국·영국·유로존과 같이 환율을 완전히 시장에 맡기는 나라도 있고, 필요에 따라 당국이 시장에 개입하는 나라도 있다. 전자는 다섯 손가락 정도로 셀 수 있고 후자가 훨씬 더 많다. 스위스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까지는 전자에 속했으나 위기 이후 환율이 급등하자 시장개입에 나섰다. 일본도 2002년 이후 환율 개입을 자제하다가 위기 이후 엔화가 급등하자 다시 개입에 나섰다.
국제통화제도의 변천은 국제관계의 힘의 변화를 반영해 왔다. 힘센 나라가 국제통화질서를 주도하고 그 통화가 국제통화로 행사하게 된다. 미국 주도의 세계경제 질서가 다극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국제통화 제도도 혼돈의 시대를 맞고 있다. 19세기 말에는 세계 교역의 60%, 세계 외환보유액의 3분의 2가 파운드화로 이뤄졌다. 지금은 달러화가 거의 비슷한 비중으로 국제통화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이 세계금융위기의 진원지가 되고 또 전대미문의 통화팽창 정책으로 위기에 대응하는 것을 보고 전 세계는 달러화의 장래에 대해 불안감을 가지고 국제통화제도의 개편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향후 수십 년간 달러 중심의 국제통화제도의 변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영어를 국제어로 쓰자는 아무런 국제법도 없지만 지금 세계 공용어로 쓰이듯 달러화도 아무런 국제법 기반 없이 현재 국제통화로 쓰이고 있다. 이는 시장이 달러화를 국제통화로 사용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가까운 장래에 국제통화제도 개편에 대한 합의를 기대하기도 어려운 환경일 뿐만 아니라 합의로 이런 현상을 바꾸기도 쉽지 않다. 달러화를 대체할 만한 통화가 쉽게 나타날 가능성도 없다. 1872년 미국의 경제규모가 영국을 추월했지만 70여 년이 지난 1944년 브레턴우즈체제 출범으로 달러가 파운드를 대체해 국제통화로 자리잡게 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달러 중심의 ‘무제도’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각국은 자국의 실리를 위해 경쟁적으로 통화·환율 정책을 구사해 오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상황은 제1차 세계대전 후 금본위제도가 무너지고 브레턴우즈 체제가 출범하기 전 양차 대전 기간 중의 환율전쟁 상황과 유사하다. 미 연준과 영국은행, 유럽중앙은행이 모두 양적 팽창을 통해 자국 통화가치의 하락을 유도해 왔으며 일본도 아베 취임 이후 인플레 2% 달성 때까지 무제한 돈을 풀겠다며 엔화가치의 하락을 유도해 왔다. 그 결과 지난 6년간 주요 중앙은행들이 풀어낸 본원통화는 2~3배 이상 늘어났다.
오늘날과 같이 개방·통합된 국제금융환경 아래에서 통화정책과 환율정책은 둘이 아니고 하나다. 과거 일본의 환율정책을 두들겨대던 미국은 중국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군사화, 엔화 약세를 용인하고 있다.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비난하며 두들기나 중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4조 달러의 외환보유액을 쌓으며 환율 개입을 지속하고 있다. 위기 이후 ‘비전통적’ 통화정책을 구사해 온 미국이 이제는 다른 나라를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할 명분도, 권위도 없어 보인다. 우리와 같은 신흥국들은 각자도생의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
지난 2분기 원화는 4.5% 절상돼 선진국과 신흥국을 포함해 최대의 절상 폭을 보였다. 3년 전 100엔당 1600원에 가깝던 대일 환율은 이미 1000원 아래로 내려갔고, 5년 전 1300원을 웃돌던 달러 환율은 1000원 선을 위협받고 있다. 국내경제는 가계소득의 정체로 소비가 늘지 않고 기업소득은 투자로 연결되지 않아 저성장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환율의 지속적 절상은 기업이윤을 낮추고 디플레 압력을 높여 가계부채, 기업부채, 공공부채의 실질부담을 늘리고 국내 투자환경을 악화시킨다. 과거 일본이 걸어온 길이다. 우리 경제에 필요한 것은 분배구조와 기업환경을 근본적으로 개선해 경제활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긴 시간을 요구한다. 금리, 임금, 지가와 더불어 환율은 경제 운영의 가장 중요한 변수다. 환율의 추가적 절상을 방치하면 한국경제의 활력 회복은 그만큼 더 어려운 과제가 될 것이다.
< 출처: 중앙일보-조윤제 서강대학교·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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