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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명상록

Bawoo 2014. 11. 5. 21:02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명상록(暝想錄)은 로마 황제이자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이기도 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저서이다. 원제(原題)는 '타 에이스 헤아우톤(Τὰ εἰς ἑαυτόν)'으로 '자신에게 이야기한 일'을 의미하며(다만 이 제목을 붙인 것이 황제 자신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12권으로 되어 있다. 대우주(大宇宙)와 그 속에 사는 소우주로서의 자기 자신과의 대비(對比)를 기조로 하는 내면적 자기 반성의 기록이다. 특히 죽음의 문제가 끊임없이 논해지며 또 세계(宇宙) 시민의 발상이 되풀이하여 강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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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가 골치 아픈 국정 수행기간 동안 추구한 사상과 비록 역사적으로 매우 값진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일상 정치사상을 좀더 자세히 알려면 〈명상록〉을 읽으면 된다. 그가 이 책을 쓰면서 어느 정도로 타인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명상록〉은 전쟁을 수행하고 통치하는 동안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단편적으로 기록한 책으로, 논증적인 글과 경구가 번갈아 나타난다. 어떤 면에서 이 글은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쓴 것으로 보인다. 〈명상록〉은 로마인의 가장 내밀한 사상을 다 모아놓은 것이지만 놀랍게도 그리스어로 씌어졌는데, 이는 당시에 여러 문화들이 통합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마르쿠스의 사상을 찬탄해왔지만,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지나친 까다로움과 히스테리가 뒤섞인 마르쿠스 사상의 병리학적 측면이 더 눈에 띈다. 마르쿠스는 항상 이룰 수 없는 행동목표를 추구하고 있었으며, 사색 속에서 그 자신을 포함한 인간 일반과 물질 세계가 덧없고 야만스럽고 보잘것없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세상을 믿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는 어떤 희망도, 심지어 영원한 명성에 대한 희망도 없이 의무와 직책에 얽매여 있었다. 평생 동안 병고에 시달렸으며 만성 위경련으로 고통받으면서 매일 많은 약을 복용했던 것 같다. 〈명상록〉의 책갈피 속에서 풍기는 종말론적 분위기는 약물중독자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더 확실하고 중요한 점은 마르쿠스의 불안이 다소 과장된 형태이긴 해도 그 시대의 풍조를 반영한다는 사실이다.

철인왕(哲人王)의 사상이 담겨 있는 〈명상록〉은 오랜 세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책 가운데 하나로 여겨져왔다. 그 사상은 마르쿠스 자신의 것이긴 하지만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스토아주의의 도덕철학이고,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우주는 지성이 지배하는 하나의 통일체이며, 인간의 영혼은 신이 가진 지성의 일부이기 때문에 혼돈과 변화의 한가운데 홀로 내던져진다 하더라도 더럽혀지지 않고 순수할 수 있다. 무엇보다 정확한 이해의 부족 탓이겠지만 마르쿠스 사상의 한두 측면은 스토아 철학을 벗어나 플라톤주의에 가까웠다. 플라톤주의는 당시 에피쿠로스주의를 제외한 모든 이단 철학을 다 끌어안아 신플라톤주의로 바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종류의 영혼불멸의 위안을 받아들일 정도로 스토아주의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마르쿠스가 도나우 강을 가로지르는 국경지역을 평정하고 있는 바로 그때 이집트·스페인·영국 등은 반란과 침공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전에 베루스 아래에서 일했던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장군은 175년에 이르러 로마 제국의 동방지역과 이집트까지 사실상 통치하게 되었다. 그해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장군은 마르쿠스 황제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을 우연히 듣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음을 선포했다. 마르쿠스는 북부 지역의 미정복 부족들과 평화조약을 맺고 아비디우스의 반란군을 진압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반란 장군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부하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마르쿠스는 그 기회에 동방지역을 평정하고 시찰할 목적으로 로마를 떠났다. 그는 안티오크·알렉산드리아·아테네를 방문했으며, 아테네에서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그랬던 것처럼 엘레우시스 제전을 참관했다. 그러나 이 비의적(秘儀的) 제전은 그의 철학관점에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않은 것 같다. 도나우 강 지역 원정에도 동반했던 황비 파우스티나는 이 여행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삶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해서도 전 로마 시민은 극진한 경의를 표했으며, 마르쿠스도 〈명상록〉에서 사랑과 존경의 글을 그녀에게 바치고 있다. 어떤 고대 사료는 그녀가 정직하지 못하고 충성심이 없었다(즉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와 함께 모반을 꾀했다고)고 쓰고 있지만, 이러한 비난은 아무 설득력이 없다.

177년 마르쿠스는 16세의 아들 콤모두스를 공동 황제로 선포했다. 그들은 협력하여 도나우 강 전쟁을 다시 시작했다. 마르쿠스는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하여 제국의 북쪽 국경선을 확장·변경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180년 마르쿠스가 아들 콤모두스를 국정의 최고 조언자로 임명하고 난 직후 군대 사령부에서 숨을 거두었을 무렵 거의 결실을 맺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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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Glyptothek Munich.jpg
로마 제국 16대 황제
재위 기간 공동 황제:161년 3월 7일 - 169년
단독 황제:169년 - 180년 3월 17일
타고난 이름 136년 이전-카틸리우스 세베루스
136년 이후-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황제 이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전임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
공동 황제 루키우스 베루스
후임 황제 콤모두스
Logo-14.png 로마 황제 연대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로마 제국의 제16대 황제(121년 4월 26일 - 180년 3월 17일)이다. ‘철인황제(哲人皇帝)’로 불리며, 5현제 중 한 사람이다. 중국의 역사서 《후한서》에 기술된 ‘대진국왕(大秦國王) 안돈(安敦)’이 바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끝으로 로마 제국의 전성기는 끝났으며, 군인 황제 시대가 도래하였다.

 

생애

입양

121년 4월 26일, 로마에서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와 도미티아 루킬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3살 때 아버지가 죽자 3번 집정관을 연임한 할아버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베루스에게 입양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질이 특출하였던 그는 하드리아누스의 눈에 띄었다.

정계에 입문하다

136년 하드리아누스가 자신의 후계자로 루키우스 케이오니쿠스 콤모두스를 공표하였고, 같은 해 마르쿠스는 루키우스 케이오니쿠스 콤모두스의 딸 케이오니아 아파비아와 약혼하여 일약 로마 정계 전면에 부상하였다.

입양과 결혼

그러나138년 콤모두스가 죽자 하드리아누스는 마르쿠스의 고모부인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를 양아들로 맞아들여 새로운 후계자로 삼았는데, 나중에 그는 제위에 올라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된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명령에 따라 마르쿠스를 자신의 양아들로 입적하였다.

이때 마르쿠스의 이름은 마르쿠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로 바뀌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나중에 마르쿠스의 약혼을 파기시켜 자신의 딸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와 약혼시켜 결혼시켰다.

단독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루키우스 베루스와의 공동 통치를 한 뒤에 단독 황제가 되었는데 161년 본국 이탈리아와 그 주변에 걸쳐 기근과 홍수가 일어났고 같은 해 파르티아가 동방에 칩입해 1개 군단이 궤멸당하고,카파도키아의 세베리아누스총독이 자결했고 아르메니아 왕국까지 점령당하는 사태가 일어난다.

이에 카파도키아 총독에 스타티우스 프리스쿠스를 임명하고 루키우스 베루스를 출정하게 하여 163년 동방의 남은 군단들을 이끌고 파르티아군을 격파한뒤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 아르타크사타를 탈환했으며 165년까지는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의 파르티아까지 진격하고 166년 티그리스 강 건너편의 파르티아 동쪽 깊숙히 쳐들어가 철저히 격파했다.

한편 168년부터는 게르만족과의 게르마니아 전쟁이 발발해 이 과정에서 169년 공동 황제 루키우스가 죽었고 170년 봄부터 클라우디우스 프론토가 이끄는 로마군은 다키아 속주에서부터 북상해 대규모 공세를 감행해 게르만족들을 패주시켰으나 이 과정에서 프론토가 전사하고 로마군 2만 명이 포로가 된다.

그리고 270년만에 북부 방어선이 뚫려 게르만족들이 쳐들어오고 그 영향으로 4개 군단을 더 창설하기도 했다. 뒤이어 아프리카 속주에서는 마우리타니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히스파니아까지 쳐들어오는 사태가 벌어지자 동생 피디우스 빅토리우스를 파견해 이를 진압했다.

172년부터 본격적인 제1차 게르마니아 전쟁이 발발해 베오그라드에서 동시에 공세를 감행했으나 도나우 강 건너에서 근위대가 대패하고 근위대장 빈덱스가 전사했으며 173년부터는 각개 격파 작전으로 바궈 지지부진한 전쟁 끝에 174년 강화가 성립되었다.

오현제 시대의 종말

175년에는 시리아 총독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마르쿠스가 죽었다는 잘못된 소식을 듣고 황제를 자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해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177년에는 지금까지의 5현제의 관습을 타파하고 친아들인 콤모두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결정하여 5현제 시대는 끝나게 된다

죽음

178년부터 다시 제2차 게르마니아 전쟁이 발발해 대공세를 펼치며 집정관 율리우스 베루스가 전사함에도 불구하고 마르코마니족, 콰디족, 야지게스족을 무찌르며 압도했으나 180년 3월 17일 도나우 강의 진중인 시르미움 근처에서 병에 걸려 급사하였다. 그의 시신은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안치되었으며, 원로원은 그를 신격화하였다.

저서

한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사색과 철학에 관한 내용을 토대로 쓴 《명상록》이라 불리는 에세이를 남겼다. 그는 정신적 스승이었던 에픽테토스, 세네카와 함께 스토아 학파를 대표하는 철학자이며, 금욕과 절제를 주장하였으며 수많은 명언을 남길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하였다. 전쟁터에서 틈틈이 쓴 그의 <자성록> 12편은 로마 스토아 철학의 대표적인 책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는 언제나 인정이 많고 자비로워 백성을 널리 사랑하였으나 정책상 기독교도를 억눌렀다. 그의 유명한 저서인 《명상록》에는 철학인으로서의 그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읽어보기

바깥고리

전 임
안토니누스 피우스
제16대 로마 제국 황제
(공동 루키우스 베루스)
161년 - 180년
후 임
콤모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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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속으로^^>

 

72년초 군병원 신세를 질 때에 읽은 책 중의 하나가 이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입니다. 책을 접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무렵인 것 같은데 그때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었는데 -지금도 기억나는게 책 뒷 표지에 '어떤 오이는 쓰다'로 시작되는 귀절이 있었습니다. 도무지 뭔소린지 ㅠㅠ-신기하게도 이때는 죽죽 잘 읽혀 아주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 머리 속에 별로 충전된 지식(교양)이 없을 때는 책을 한권 한권 읽어나가며 머리 속을  충전시키는게  큰 기쁨이었는데 이 책도 그런 책 중의 하나였습니다. 더구나 저자가 로마 전성기를 이끈 5현제 중의 한 분인데다가 전장에서 이 책을 썼다는게 참 놀랍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