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전쟁의 역사
개요
유럽에서 전쟁의 양상은 시기적으로 14~15세기의 백년전쟁, 18세기말부터 19세기초에 걸친 나폴레옹 전쟁, 그리고 20세기의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변화했다.
중무장 보병전술
고대 그리스 초기에는 귀족으로 구성된 기병과 전차병이 승패의 관건이었으나, 민주정치의 성립과 더불어 일반 시민으로 구성된 중무장의 보병이 주력 부대로 등장했다. 3회(BC 392, BC 490, AD 480)에 걸친 페르시아 전쟁에서 보병밀집전열의 우위가 입증된 이후 이 전법은 결전의 기본형으로 로마에 계승되었다. 로마의 전쟁은 기본적으로 대규모의 보병으로 구성된 로마의 정규군과 다종다양한 민족군과의 싸움이었다. 로마군은 3중 횡대로 밀집전열을 형성하여 적진으로 출격했고, 먼저 창을 던진 다음 검으로 싸웠다.
전투 직전에 지휘자는 직접 전열을 순시하여 사기를 고무시켰는데 이러한 모양은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 Commentaril de Bello Gallico〉에서 엿볼 수 있다. 기병은 정찰과 추격 임무를 담당했다. 군단은 기병 300명과 10개 대대로 편성되었고, 완전편제를 갖춘 군대의 병력은 약 6,000명이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BC 264~241) 이후 군선이 등장했으나 주력 부대는 정규전을 수행할 수 있는 육군이었다.
로마 시대말 정규군은 적어도 이론상 60만 명에 이르렀는데, 대부분 변경군으로서 방위를 필요로 하는 도시와 성채에 배치되었다. 이에 비해 게르만족의 병력은 평균 1만~3만 명의 범위를 넘지 않았다고 한다. 게르만족의 이동 시기에는 아르겐트라툼의 싸움(357)과 같은 예외적인 경우는 있었지만, 대전투나 장기공방전이 드물었는데, 그 이유는 로마군이 기동력을 상실한데다가 로마군 자체가 내부로부터 붕괴했기 때문이었다.
게르만적 전쟁관과 그리스도교
게르만 왕국들 중에는 로마 제국의 군사제도를 일부 수용한 국가도 있었지만 로마 시대 이후에는 게르만적 전법과 전쟁관이 지배적이었다. 인명에도 루이('싸움의 명예')·리처드('강력, 호탕')·윌리엄('의지와 투구')과 같은 무용(武勇)과 무기(武氣)를 의미하는 것이 많았고, 전투를 일상적인 것으로 보는 기풍이 나타났다. 전쟁은 일종의 신의 재판이므로 승패 역시 신의 심판이라고 생각했고, 승리에 대한 이의를 봉쇄하기 위해 결전 후 3~7일 동안 전쟁터를 확보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 관념은 일부 지방에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1322년에 바이에른 공 루트비히는 뮐드루프에서 승전한 후 즉시 전쟁터를 떠나 전쟁의 예법을 모르는 자라고 비난받았다. 패자의 처분은 당연시되었는데, 539년에 프랑크 왕 테오데베르트 1세는 롬바르드족을 격파한 후 부녀자까지 포 강에 던져버렸다.
페라라가 점령되었을 때에는 사제인 잉게니우스가 개입하여 몸값을 주고 포로를 구제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투르-푸아티에의 싸움(732)에서 승리한 카롤링거 왕조가 지배하는 동안 그리스도교도간의 싸움에서는 잔학한 행위가 감소했는데, 그 이유는 카롤링거 왕조의 권력이 그리스도교 세계의 방위와 질서유지에 입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시기의 전쟁에는 작센족과의 전쟁(772~804)과 같은 포교와 정복이 일체화한 성전(聖戰)의 관념이 나타났다.
기사의 시대
8세기에 등자(子)가 일반화되었고, 10세기에는 편자가 보급되었다. 이로써 기수는 말 잔등에 고정되어 장창을 수평으로 겨누고 출전하는 돌격전이 가능해졌다. 독일 왕 오토 1세가 마자르인의 침입을 받아 싸운 레히펠트의 싸움(955)에서 서유럽측은 동방 유목민의 기마대에 대항할 수 있을 만한 기병을 갖추고 있었다.
노르만 정복 시기인 1066년에 발생한 헤이스팅스의 싸움에서 노르만 기사군은 그때까지도 전통적인 보병전을 고수하고 있던 앵글로-색슨 군을 유린하면서 중세적 전법을 확립시켰다. 기사만이 완전 전투원으로 간주되었고, 그들은 봉건제도의 약정에 따라 녹봉의 대가로 일정기간 영주를 위해 출역했으며, 이렇게 해서 전형적인 봉건군이 편성되었다.
그러나 12~13세기에는 정면 충돌에 의한 대규모 전투는 비교적 적었다. 영주간의 소규모 국지전이 빈번했으며, 적의 영지 약탈에 중점을 두고 짐짓 결전을 회피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보병은 2차적인 병력으로 간주되었다. 12세기에 발명되어 보병의 전용 무기가 된 석궁은 당시에 살상효과가 가장 큰 무기였다. 그러나 1139년에 라테란 공의회는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석궁의 사용을 금지시켰다.
테르툴리아누스와 오리게네스 등 초기의 교부들은 전면적으로 전쟁을 부인했으나, 점차 그리스도교가 사회 전체에 수용되어 세속 권력의 책임이 강조되면서 개인적인 폭력과 적법한 전쟁을 구별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군주가 질서와 평화의 유지를 위해 전쟁을 선포하는 경우 이를 승인했다. 성직자들도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고, 9세기말 프랑크 왕국의 분열 항쟁 과정에서는 무려 10만 명 이상의 사제가 전사했다.
그러나 교회의 전통에서 유혈을 혐오하는 감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노르만 정복은 교황청의 지원을 받아 시작된 사업이었지만 1070년에 교회회의는 승리자에게 회개를 명령했다. 교회는 신의 평화, 신의 휴전을 주창하면서 비전투원, 비전투 지구, 비전투 시간이라는 관념을 창출하여 전쟁을 한정지으려 했다. 13세기 스콜라 학파의 전쟁관에 의하면 전쟁의 적법성의 요건은 ① 당사자가 속인(俗人)일 것, ② 목적이 방위일 것, ③ 달리 해결 수단이 없을 것, ④ 증오와 학대 등 사악한 의도를 품지 않을 것, ⑤ 군주가 명하는 공적 전쟁일 것 등이었다. 모든 실제 행동이 위와 같은 이념으로 규제된 것은 아니었지만 14~15세기의 군주들은 지극히 정략적인 전쟁을 개시하기 위해서 개전의 명분 마련에 부심했고, 당시의 병법서에서도 적법성을 전쟁 준비의 하나로 간주했다.
화기의 사용과 단체전
1302년 쿠르트레 싸움에서 폴란드 보병은 프랑스 왕의 기사군을 격파했고, 그후 보병군의 승리가 종종 나타났다. 14~15세기, 특히 백년전쟁(1337~1453)을 통해 무기·전술·병력 구성에 변혁이 일어나 전쟁의 양상이 일변했다. 흑색화약의 제조법이 알려진 것은 13세기였으나 1320년 전후의 실험단계를 거쳐 1340년대에 이르러서야 무기 응용에 실용화되었다(→ 색인 : 화약). 15세기초에는 주로 거포(巨砲)가 제작되었으나 15세기 중엽 이후에는 사용의 목적에 따라 크기가 분화되었다.
그때부터 탄약은 보루(堡壘)의 파괴만이 아닌 직접 살상을 위해 제조되었으며, 소총도 등장했다. 1520년대에 구경의 표준화가 실현되었고, 1560년대에는 프랑스 왕군의 활부대가 총부대로 개편되었다. 포의 선박 탑재가 가능해지면서 해전이 전쟁의 중요한 국면으로 등장했다. 보병의 위력에 대항하여 14세기초부터 기사의 방어구가 발달했고 승마도 장갑(裝甲)되었으며, 17세기초에는 중갑(重甲)이 출현했다.
기사도 충돌전에 참가했으며, 돌격 후에는 말에서 내려 전투를 벌였다. 밀집대형을 유지할 때 효율적인 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보병이 진격이나 이동시에는 약점이 노출되어, 쿠르트레 싸움 이후 기병이 무용화되지는 않았다. 전투의 개시와 마무리 역할은 여전히 기병의 몫이었다. 1470년대에는 단체전이 중시되어 부대의 깃발·대오·제복이 강조되었다. 이후 보병·기병·포대를 결합·배치하는 방법이 작전의 요체가 되었고, 전투의 양식도 공성전(攻城戰)에서 야전(野戰)으로 변화했다.
용병의 사용
봉건적인 군대는 통제가 어려워 일찍부터 용병이 사용되었지만, 용병이 대규모로 등장한 것은 백년전쟁중이었다. 용병은 대개 100명 미만의 소집단을 이루어 대장의 엄격한 통솔 아래 전투가 있을 때만 고용되었다. 그들은 직업적 전투원이라는 점에서 상비군 지원병과 유사하지만, 집단 단위의 단기 계약이라는 점에서는 상비군과 다르다. 그들은 고용이 안 되었을 때 약탈집단으로 변해 치안에 큰 해를 끼쳤다.
1445년 프랑스는 용병 가운데 우수한 자를 선발하여 칙령 중대를 편성했다. 중갑 기병 1명과 활과 검을 소지한 약간의 인원으로 구성된 단위를 창대(槍隊)라고 하는데, 1중대는 100창대로 편성되었다. 칙령 중대는 평상시에도 병영에 기거하는 상비군으로 전형적인 절대왕정군의 시발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전쟁 수행 권한이 왕에게 독점되었으며, 절대왕정시대에 왕은 값비싼 군대의 소모를 두려워하여 가능한 철저한 섬멸전은 피하려고 했다.
국민군의 등장과 근대전
직업군인에 의존하지 않는 국민군의 형성 과정은 나라마다 매우 달랐다. 1445년에 프랑스는 농민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대가로 면세궁병제도(免稅弓兵制度)를 실시했으나 정착되지 못했다. 면세궁병제도를 가장 먼저 시행한 나라는 영국이었는데, 영국에서는 이미 백년전쟁중에 장궁(長弓)을 휴대한 민병이 활약했다. 시민혁명시대에는 올리버 크롬웰의 신식 군대와 미국 독립전쟁의 지원병, 그리고 프랑스 혁명의 국민 위병과 같은 첨예한 계급성을 가진 군대가 등장하여 근대군을 형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797~1815년의 나폴레옹 전쟁 이후 근대전은 완전히 확립되어 징병제 및 대규모의 병력과 화기가 동원되었다. 또한 화기에 대한 산병(散兵) 전법과 철저한 추격 섬멸전이 가능해졌다. 동시에 전쟁수행 과정에서 보급 조직의 중요성이 결정적으로 증대되었는데, 이러한 중요성은 프랑스군의 러시아 원정 실패에서 잘 드러났다.
나폴레옹이 창시한 근대적 전술과 전쟁관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Vom Kriege〉(1832~34)에서 이론화되었다. 1861~65년 남북전쟁시 강철함선의 등장, 1904~05년 러일전쟁 때 기관총의 사용 등 병기의 고성능화와 전쟁의 대규모화가 진행되면서 승패의 관건은 경제력, 특히 공업생산력에 의존되었고, 전쟁은 총력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8)은 본질적으로 영국과 독일의 경제력 경합에서 발단되었으며, 미국이 가담함으로써 연합국은 공업생산력에서 동맹국을 압도했다. 내연기관이 병기에 응용되었고, 전차·항공기·잠수함이 이용되면서 작전은 입체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1939~45)에서는 항공기와 전파 병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핵무기가 전쟁을 종결시켰으며, 인류역사상 유례없던 파괴와 살상이 초래되었다.<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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