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쟁의 역사
고대 중국의 초기에는 약 150개 정도의 나라들이 있었으나 춘추시대(BC 770~403)에 22개 나라로 감소되었다가 BC 5세기말 전국7웅으로 합병되었으며, BC 221년에 진(秦)이 다른 6국을 차례로 정복하여 중국을 통일했다. 주(周) 왕조의 쇠퇴 이후 발생한 거대한 사회변동 속에서 진은 부국양병에 성공하여 끊임없는 약육강식의 전쟁에서 살아 남았다.
약 500년에 걸쳐 사회가 변동하면서 전쟁의 형태도 변화했다. 처음에는 각 제후국에서 지배적인 가문 출신의 선비들이 전차를 몰아 적국의 전차와 싸우는 귀족전사끼리의 차전(車戰)이었으나, 점차 북방 기마 민족의 영향을 받아 기마전이 도입되었으며, 이후 일반 서민으로 구성된 보병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 전쟁이 되었다. 또한 무기도 청동제에서 철제로 진보되어 대량 제조가 가능해졌고, 석궁과 같은 강력한 무기 및 성(城)을 공격하거나 방어하기 위한 각종 무기가 개발되어 전쟁 피해의 규모가 확대되었다.
춘추시대 이후 각 제후국들은 사절을 파견하고, 회맹을 개최하여 협정과 교섭을 통해 외교적 관행과 의례를 확립시켰다. 이러한 관행과 의례는 불필요한 전쟁을 사전에 예방하거나 감소시켰고, 전쟁에서 활약하는 무장(武將)보다 교양있고 세련된 예법을 익힌 외교 교섭에 능한 정치가와 변론가의 지위를 향상시켰다. 당시의 유명한 외교가로는 소진(蘇秦)·장의(張儀)가 있으며, 이후 이들은 종횡가(縱橫家)라고 불렸다.
〈손자 孫子〉·〈오자 吳子〉 같은 병법서에서도 병법의 핵심은 싸움에서 이기는 것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지적하여 전술보다 전략을 중시했다. 따라서 병법에서 필요한 것은 단순한 전술가의 기질을 넘어 보다 넓은 시야에서 교섭할 줄 아는 정치적인 자질이었다.
전국시대에 싹튼 관료제가 진·한 시대에 완성된 이후 한 고조(高祖)는 전장을 달리며 백전백승의 전과를 올린 한신(韓信)보다도 후방에서 물자의 조달수송을 원활히 하여 뒷걱정이 없게 한 소하(蕭何)를 제국 창건의 일등공신이라고 평가했다. 국군 총사령관으로서 사마(司馬) 또는 태위(太尉)의 서열은 최고의 문관인 승상(丞相) 또는 사도(司徒)보다 아래였으며, 이러한 경향은 무제(武帝)가 유교를 국교화하면서부터 더욱 명확해졌다. 비록 삼국 시대에 관우(關羽)·장비(張飛) 등과 같은 무장이 활약했지만, 문관 관료층은 끝내 무사계급의 상승을 허용하지 않았고, 문관 우위의 경향은 과거급제가 중요한 등용 조건으로 정착된 이후 확고해졌다.
이리하여 중국에서는 군대에 대한 문민통제가 대체로 일관되게, 오히려 역사의 진행에 따라 더욱 강하게 유지되었고, 민중 사이에서도 병사가 되는 자는 인간 쓰레기라는 인식이 확대되었다.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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