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솔리니는 독일 히틀러를 무시했다. 지적 우월감 때문이다. 히틀러는 대학입시에 실패했다. 히틀러의 나치즘은 파시즘을 모방했다. 1930년대 후반에 양상은 역전된다. 그는 히틀러의 꼭두각시로 전락한다.
2015년은 연합국(미국·영국·러시아)의 제2차 세계대전 승전 70주년이다. 독일 패망,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죽음 70년. 무솔리니에게 다가서야 파쇼와 나치를 안다. 그의 삶은 극적 흥미를 갖고 있다. 나는 지난 몇 년 무솔리니를 간간이 추적했다. 70년 시점에서 작업을 정리했다.
나의 행로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시작했다. 북동쪽 에밀리아-로마냐로 가는 67번 고속도로를 탔다. 목표는 무솔리니의 고향 생가(生家), 프레다피오(Predappio)다. 그곳은 포를리 지방의 조그만 도시(인구 6000여 명). 1시간30분쯤(100여㎞) 달렸다.
프레다피오는 ‘두체(Il Duce, 수령)’의 마을이다. 지난해 6월 나의 친구 마티아 데 로시가 전화했다. 그는 밀라노의 사립 박물관 전직 큐레이터다. “파시즘은 기피다. 그곳은 네오 파시스트의 순례지다. 조심하라”고 했다. 프레다피오 도로판이 나온다. 내 마음에 긴장감이 감돈다. 단출한 도시. 잠시 후 좁은 4차선 길에 표식이 나온다. ‘Casa Natale Mussolini’(무솔리니가 태어난 집).
나는 옛 사진과 비교했다. 외관은 같다. 돌로 외벽을 바른 3층 건물. 2층으로 돌계단이 나 있다. 역사 감흥을 일으킬 장식은 없다. 안내문은 간략하다. “1883년, 2층에서 베니토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장장이, 1층은 철공소”-. 무솔리니 회고록 『 나의 흥망(영문판)』이 생각난다. “어린 시절 돌계단에서 놀았다, 돌 틈새에 이끼가 끼었다.” 이끼와 돌계단도 그대로다. 그의 가정은 화목했다. 어머니(로사)는 가톨릭 신자로 초등학교 교사였다.
아버지(알레산드로)는 독학의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장남 이름에 자기 신념을 넣었다. ‘베니토 아밀카레 안드레아 무솔리니’(Benito Amilcare Andrea Mussolini). 베니토는 멕시코 혁명가(베니토 후아레스)에서 따왔다. 안드레아, 아밀카레는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들이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감화를 받았다. 이 부분은 히틀러, 옛 소련의 스탈린과 다르다. 그들의 아버지는 자식을 때렸다. 둘은 아버지를 증오했다. 그런 환경은 분노조절장애를 낳는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잔혹한 학살에 유년의 상처가 있다.
프레다피오 방문 초점은 무솔리니 무덤이다. 산 카시아노(San Cassiano) 가톨릭 공동묘지 공원은 정돈돼 있다. 중간에 작은 건물의 표식이 눈에 띈다. ‘Cripta Mussolini’(무솔리니 지하 납골당). 지하로 내려갔다. 무솔리니 얼굴 조각상(35X50㎝ 정도), 돌무덤이 있다. 시저의 얼굴상을 연상케 한다. 무솔리니는 로마제국의 부활을 외쳤다. 나는 흰 대리석 얼굴상을 살폈다. 부릅뜬 눈, 꾹 다문 입술이다. 그의 의지와 열정이 튀어나온다.
군 원수 복장의 ‘두체’(수령) 무솔리니(왼쪽), 프레다피오에 있는 무솔리니가 태어난 3층집(가운데),
무솔리니가 그려진 파시스트 기념컵 ‘IL CAMERATA’(오른쪽 작은 사진).
① 1934년 6월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만난 두 전체주의 독재자. 화려한 군복의 무솔리니가 사복차림의
히틀러를 압도했다. ② 베니스 두칼레 궁전 안뜰의 지금 모습. 80년 전 이곳에서 무솔리니는 ‘베르디- 바그너’ 음악회를 열었다. ③ 연설의 달인.요란한 제스처와 연극조의 언어 구사로 무솔리니는 대중을 장악했다.
공동묘지 밖 주차장에 오토바이 순례객들이 있다. 그들은 나에게 오른손을 높이 든다. 파시스트의 고대 로마식 경례. 무솔리니 극장정치의 생명력은 길다. 프레다피오는 무솔리니 숭배자의 성지(聖地)다. 그의 생일(7월 29일), 죽은 날(4월 28일), 로마 진군의 날(10월 27일)에 찾아온다. 순례객은 1년에 10만 명 정도. 시내에서 가게를 찾았다. 무솔리니 얼굴이 그려진 컵을 샀다. 60대 주인은 “ 마을 이미지는 불편하다. 하지만 파시즘 역사 관광은 늘고 있다. 여기 건물들은 파시즘시대 절제의 건축미학을 보여준다”고 했다.
나는 볼로냐(Bologna)로 향했다. 북쪽 내륙의 대학도시. 무솔리니는 볼로냐 대학에서 프랑스어 교사 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마키아벨리 박사 논문 제출. 곽준혁(숭실대 가치와 윤리연구소장) 교수는 “1924년 대학 측은 집권자 무솔리니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제안했다. 그는 거부했고 정식으로 법학 박사 논문을 냈다”고 했다. 그 사연은 호기심을 일으킨다. 나는 볼로냐에 사는 로시와 만났다. 로시는 지방 잡지에 ‘파시즘 풍경’이란 논문도 썼다. 우리는 무솔리니를 추적했다. 무솔리니는 거칠고 명석한 악동(惡童)이었다. 그는 주머니에 작은 칼을 넣고 다녔다. 친구를 칼로 찔렀다. 퇴학, 정학을 당했다. 폭력의 효과는 각인됐다. 그 후 정치무대에서 학습 경험으로 작동했다.
그는 사범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1902년 스위스 로잔으로 갔다. 그 후 10년은 고통과 단련기다. 병역 기피, 막노동, 사회당원, 파업 주도, 스위스 경찰에 체포, 감옥, 군 복무, 연설과 신문사 기고가 이어졌다. 그는 마키아벨리(권력과 인간), 귀스타브 르봉(군중 심리), 니체(초인의 미덕), 소렐(생디칼리슴)의 책을 읽었다. 그의 삶은 “돈키호테 식 저돌성에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코리올라누스(Coriolanus)의 영웅적 행태를 흉내 내면서 모순투성이로 진행됐다.”(Martin Clark 『무솔리니 권력의 윤곽』 )
무솔리니 야망은 유력한 언론인이었다. 꿈이 실현됐다. 사회당 기관지 ‘아반티’(Avanti! 전진)의 편집국장(29세)이 됐다. 그는 지면을 대중의 문체로 바꿨다. 선동적 기사로 쟁점을 선점했다. 구독자가 2만에서 10만 명으로 늘었다.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사회당과 아반티의 노선은 전쟁 반대. 무솔리니는 이탈했다. 아반티는 그를 추방했다. 그는 좌파언론인, 사회당원의 명성과 결별한다. ‘일 포폴로 디탈리아’(Il Popolo d’Italia, 이탈리아 민중)를 창간했다. 좌파에서 극우파로의 변신이다. 그에게 신문은 정치적 삶의 전투(battles of political life)다. 그리고 승리의 기반이었다(회고록 『나의 흥망』). 우리는 결론을 내렸다. “무솔리니는 신문과 권력의 관계를 치밀하게 파악했다. 그는 프로 언론인이다. 그 경력으로 권력을 잡았다. 특이한 사례다.”
무솔리니는 체제 타도에 나선다. 1919년 3월 ‘전투 파쇼’(Il Fasci di Combattimento)를 결성했다. 그 세력은 정치폭력의 검은 셔츠단→국가파시스트당으로 확장한다. 파시즘은 다양한 이념들의 퓨전식 혼합이다. 핵심은 권력 집중, 민족지상, 국가 우선. 반(反)자유주의, 반(反)사회주의다. 사회 혼란은 계속됐다. 그는 노조 파업 분쇄를 선언했다. 1922년 10월 검은 셔츠단 4만 명은 로마로 진군했다. 국왕(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은 총리의 계엄령 요청을 거부했다. 무솔리니에게 조각 위촉을 지시했다. 다수당인 사회당, 의회주의자들은 기습을 당했다. 최연소 총리(39세)의 탄생, 대권 장악은 경악스러운 반전(反轉)이다. 3년 전 총선에서 그의 파시스트당은 완패했다. 권력은 의지와 기회 포착으로 쟁취한다.
나의 다음 행로는 베니스(이탈리아 명칭 베네치아)다. 1934년 6월 아돌프 히틀러가 찾은 물의 도시. 그의 집권은 무솔리니보다 11년 뒤(33년)다. 나는 80년 전 영상기록물을 살폈다. 두 독재자의 첫 대면. 승자는 무솔리니다. 그의 화려한 군복과 독일어 실력은 분위기를 장악했다. 히틀러의 차림은 중절모와 트렌치코트. 그는 이탈리아말을 못했다. 무솔리니의 극장정치는 극적으로 전개된다.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 마당에서 콘서트가 열렸다. 베르디의 ‘운명의 희망’ 서곡,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곡이 연주됐다. 바그너는 히틀러 열정의 진원지다. 베르디의 삶에는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 이탈리아 민족부흥)가 담겼다. 장엄하고 격정적인 선율이 퍼졌다.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정복 야심을 꺾으려 했다.
그는 산 마르코(San Marco) 광장에 7만 군중을 모았다. 검은 셔츠단과 청년 파시스트의 퍼레이드. 이어서 요란한 제스처와 연극조 어휘가 넘치는 무솔리니 연설. 대중은 열광했다. 히틀러는 압도당했다.
나는 산 마르코 광장에 섰다. 관광객들로 넘친다. 해양 강국 베니스의 옛 영광이 기억된다. 그곳엔 무솔리니의 격동도 남아 있다. 광장은 대중과 소통한다. 광장을 지배하는 자가 권력자다. 베니스 영화제는 오래됐다(2015년 72회). 그 영화제 뒤에 무솔리니가 있다. 그는 영화와 대중 사이를 주목했다. 그 시절 최고상은 ‘무솔리니 상’(현 황금사자상)이다. 그는 독일 총통과의 만남을 결산했다. 그는 히틀러를 ‘허접한 익살꾼’으로 묘사했다. 히틀러 저서 『나의 투쟁(Mein Kampf)』도 무시했다. “지루하다. 조잡하고 단순하다.”
히틀러는 베니스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정치 초년기의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선구자(precedent)로 인용했다. 요제프 괴벨스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에게 진 빚을 자세히 인정했다.”(Paul Johnson 『모던 타임스』) 괴벨스는 나치 선동술의 대가다. 나치 경례, 복장은 파시스트와 비슷하다. 퓌러(Fuhrer, 총통) 칭호는 두체에서 원용했다. 파시즘은 악성 진화했다. 전체주의 의 기이(奇異)한 원조다. 독일의 나치즘은 그것을 극단적으로 확장시켰다.
그 시점이 무솔리니 전성기다. “영국 총리 처칠은 그를 로마의 천재라고 했다. 인도의 간디는 그의 진정성에 감탄했다.”(Rupert Colley 『무솔리니』) 파시즘은 제3의 길로 비춰졌다. 공산주의와 자유주의와 다른 선택으로 평가됐다.
그 무렵 파시즘의 억압체제는 완성됐다. 정적(자코모 마테오티) 암살, 선거법 개정, 비밀경찰, 반체제 정당 해산, ‘파시스트 평의회’가 의회를 대신했다. 무솔리니는 교황과 화해한다(라테란 조약). 그는 무신론자였다. 그의 내치 콘셉트는 이탈리아의 가속화(velocizzare )다. 대규모 인프라 건설, 말라리아 퇴치, 열차·우편 서비스 개선. 실업률은 크게 낮아졌다. 시칠리아 마피아 척결은 인기 메뉴였다.
무솔리니의 권력 운용은 교활했다. 대중 조작과 동원의 실험이 계속됐다. 그는 다양한 대중 교감 프로젝트를 내놓았다. 대중의 열망을 모아 반대세력을 압박했다. 파시즘 전문가인 장문석 영남대 교수는 “무솔리니는 현대 대중정치의 윤곽을 만들고 실천한 최초 인물”이라고 했다.
무솔리니의 감수성은 영악했다. 그의 오페라식 연설 기법은 시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D’Annunzio)에서 따왔다. “사회주의 이론은 죽었고 남은 것은 원한이다.” “민주주의는 낡고 막연하다. 나라의 재생을 위해 정열을 경험해야 한다.” 무솔리니의 그 웅변은 청중과 문답식이다. 단눈치오는 1919년 피우메(현재 크로아티아 리예카) 항구를 점령했다. 퇴역군인 등 2000여 명이 동참했다. 그 파격과 돌출은 무솔리니에게 영감을 줬다. 그는 로마 행군의 정치적 퍼포먼스를 연출한다.
파시즘의 풍경에 신화가 있다. 언론인 출신 역사학자 폴 존슨(『모던 타임스』)은 이렇게 분석한다. “카를 마르크스는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신화의 힘(potency of myth), 민족적 신화의 힘을 간과했다.” 이탈리아는 신화의 나라다. 군중은 분산돼 있다. 신화가 주입되면 집단은 역동성을 갖는다. 무솔리니는 권력 드라마에 애국의 신화를 넣었다. 상징이 필요했다. 시저, 파스케스, 독수리 표상, 로마식 경례. 무솔리니는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할 인물로 등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무솔리니는 자원 입대했다. 두 번째 사병 복무(32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다. 그는 험준한 줄리안 알프스 전선에 배치됐다. 헤밍웨이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 무대다. 지난해 봄 나는 그 전선의 유적지(슬로베니아 소차계곡)를 가보았다. “산속 참호, 눈과 비, 추위와 배고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련을 겪었다.”(『나의 흥망』) 수류탄 폭발 사고가 났다. 중상으로 9개월 후 전역했다.
역사는 기억의 충돌이다. 지도자가 대중과 어울리면 역사의 잔상을 새긴다. 신화에 기대면 향수가 남는다. 로시가 덧붙인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역사의 수치이며 악몽이다. 하지만 그는 글과 말로 세상을 평정했다. 형식적이나 왕정-총리체제를 유지했다. 히틀러 식 광기(狂氣)의 폭압과는 달랐다.”
1935년 독일의 재군비 선언이 있었다. 그때까지 무솔리니는 히틀러 견제의 선두에 섰다. 영국·프랑스와 스트레사(Stresa) 체제를 만들었다. 그는 나치의 인종정책을 비난했다. “황당하다. 독일인종도 순수혈통이 없다. 고대 로마 이래 유대인은 이탈리아에 함께 살아왔다.”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를 점령했다. 영국은 비난했다. 그는 반발했다. 히틀러는 그에게 접근했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터졌다. 두 사람은 국민전선의 프랑코 를 지원한다. 추축(樞軸)의 강철동맹이 등장했다. “영국 외무장관 이든이 유연(malleable)했다면 무솔리니는 히틀러에게 가지 않았을 것이다.”(『나의 흥망』 1998년판 서문, Richard Lamb)
파시스트 정권의 유대인 정책도 악랄한 차별로 바꿨다. 나치의 뉘른베르크 법을 따랐다. 2013년 당시 이탈리아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는 “무솔리니의 반(反)유대인법은 최악의 실수다. 하지만 다른 많은 부분에선 잘했다”고 했다. 발언 뒷부분에 비난이 쏟아졌다. 무솔리니 손녀 알레산드라(Alessandra, 유럽의회 의원)는 파시즘의 가치를 내세운다.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40년 6월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승전 열차에 편승한다. 이탈리아의 군사력은 형편없었다. 그리스,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후퇴와 졸전을 반복했다. 무솔리니의 허풍이 드러났다. 1943년 7월 미국·영국군은 이탈리아의 시칠리아로 상륙한다. 7월 24일 그는 국왕의 명령으로 체포된다. 절대 통치자의 몰락은 평온했다. 2015년 4월 로시가 메일을 보내왔다. “무솔리니 처형 70년, 파시즘은 자유와 인권의 배신이다. 하지만 정치 혼란 때 기괴한 지도자가 등장한다. 역사를 알아야 파시즘 재발을 막는다”고 했다.
무솔리니는 알프스 산장에 갇힌다. 1943년 9월 나치 SS부대가 그를 구출한다. 그는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운다. 독일의 괴뢰 국가다. 이탈리아는 남과 북으로 나눴다. 살로(수도 이름) 공화국은 나치의 몰락과 함께 망했다. 그는 스위스로 탈출하려 했다. 이탈리아 빨치산에 체포돼 처형됐다. 나이 62세. 그의 롤러코스트 삶도 마감한다. “무솔리니는 평생 ‘장엄함과 소극(笑劇)’(grandeur and farce) 사이를 불안하게 떠돌았다.”(폴 존슨)
◆무솔리니와 여자=많은 여자가 있었다. 20대 시절 그의 이념 멘토는 러시아 귀족 출신 여성 혁명가였다. 그보다 5년 연상인 안젤리카 발라바노프(Balabanoff)였다. 사회당 기관지 ‘아반티’ 편집국장 취임도 발라바노프의 지원이 컸다. 파시스트 신문 ‘일 포폴로 디탈리아’ 편집인 시절에는 부유한 유대인 여성 마게리타 사르파티(Sarfatti)가 그 옆에 있었다. 그는 근육질(키 1m69㎝), 남성다움, 장악력, 스토리텔링 솜씨로 많은 연인을 두었다. 처형될 때도 연인(페타치, 29세 연하)과 함께 있었다. 부인 라켈레(Rachele·1890~1979)는 밖에 나서길 싫어했다. 둘 사이에 3남2녀를 두었다.
* 중앙일보 - 이탈리아(프레다피오·베니스)=박보균 대기자 bgpark@joongang.co.kr
피렌체는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의 무대다. 도시 외곽 그의 고향 집에 찬양 석판이 달려 있다. “국가통치술과 이탈리아 해방에 대한 불멸의 작품을 남겼다.” 그의 『군주론(Il Principe)』(1513년 집필)에 담긴 지적 파괴력은 영속적이다. 그 책은 권력과 인간성의 진실을 조명, 해부한다. 무솔리니와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1891~1937)는 마키아벨리에 심취했다. 무솔리니는 박사 학위 논문을 냈다. 그람시는 ‘현대 군주론’의 개념을 조립했다. 젊은 시절 둘의 사상 연마와 지적 역정은 비슷하다. 나중엔 이념적, 정치적 적수였다. 나이는 무솔리니가 여덟 살 많다.
군주론은 정치의 본질을 설파한다. 그것은 힘(fortezza)이다. 권력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무솔리니의 마키아벨리 습득은 편향적이다. ‘이기적인 인간본성과 힘에 대한 찬양’을 읽는 데 주력했다. 그람시는 힘과 헤게모니를 구별했다. 물리적인 힘만이 아닌, 물리적인 힘이 수반될 수 있는 인민의 동의를 강조했고 헤게모니에 초점을 맞췄다.”(곽준혁 교수, 숭실대 가치와윤리연구소장 )
로마 테스타시오 구역 ‘개신교 공동묘지’에 있는 그람시 묘소.
군주론의 진수는 비르투(virtu)와 포르투나(fortuna)다. 새 질서의 확립은 포르투나의 운명에 다르지 않는다. 그것은 비르투의 권력의지와 승부근성으로 성취된다. 무솔리니는 엘리트 규합과 기회 선점을 중시했다. ‘로마 진군’의 권력 탈취는 속전속결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폴 존슨은 이렇게 비교한다. “무솔리니가 로맨스와 드라마(romance & drama)에 의존할 때 그람시는 생디칼리즘을 고수했고 공장 점거를 설파했다.”(폴 존슨 『모던 타임스』)
마키아벨리는 비르투를 교활하게 펼쳤다. 그람시는 현실정치의 패자였다. 그는 이탈리아 공산당 당수(하원의원)였다. 1926년 파시스트 정권은 의원면책특권을 무시한다. 그람시는 체포되고 투옥된다. 그람시의 옥중수고(獄中手稿)는 패배의 반성, 복수의 준비다.
그람시는 절묘하면서 매력적인 혁명과 변혁의 개념을 내놓았다. 문화 헤게모니, 인간의지와 비(非)결정주의 역사관, 진지(陣地)와 기동(機動)전, 역사적 지배블록…. 1980년대 그람시 이론은 한국에 본격 소개됐다.
이탈리아(피렌체.로마)=박보균 대기자
[S BOX] 뇌의 작동 20년간 중단시켜라
1927년 그람시에 대한 재판과 격리가 진행됐다. 파시스트 검사의 구형 논고는 악마적 직설이다. “이 뇌의 작동을 우리는 20년간 중단시켜야 한다.(Per vent’anni dobbiamo impedire a questo cervello di funzionare.)” 판결 형량은 20년4개월5일이었다. 그는 어릴 때 성장 부실 장애를 앓았다. 감옥에서 건강이 악화됐다. 그곳 생활 10년 뒤 숨졌다(46세). 감옥 속 그의 글쓰기는 치열했다. 그 글들은 이념의 지평을 확장했다. 지난해 로마에 있는 그의 묘소에 갔다. 한국 사회에 그람시가 스며들어 있다. 그 영향력 때문에 궁금했다. 지하철 B라인을 타고 피라미드 역에서 내렸다. 가까이에 ‘개신교, 비(非)가톨릭 공동묘지’(Cimitero Acattolico)가 있다.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그 묘지를 “로마에서 가장 거룩한 곳”이라고 했다.
그람시 묘소는 조촐했다. 비명도 간략했다. 그의 이름에다 ‘ALES 1891 ROMA 1939’라고 적혀 있다. 태어나고(사르데냐 섬 알레스) 죽은 곳(로마), 그 연도만 썼다. 파시스트 정권의 감시 탓일 것이다. 묘소 주위에 작은 화분 10여 개가 놓여 있다. 평소 정성스레 가꾼 인상은 주지 못한다. 그에 대한 열광과 찬사와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