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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 한류처럼 … 고구려 스타일 전파한 광개토대왕

Bawoo 2015. 5. 31. 12:31

우리 역사 중 가장 강력한 국력을 자랑했던 국가를 꼽는다면 고구려를 떠올리게 된다. 광개토대왕이 통치했던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고구려는 제국을 건설했다. 당시 고구려는 한강 이북부터 현재 중국의 동북지방, 동몽골의 일부와 연해주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영토를 통치했다. 동북아시아에서 천하의 중심은 중국이 아닌 고구려였다. 교과서와 언론, 각종 사료를 통해 광개토대왕과 강대했던 고구려를 들여다봤다.

광개토대왕(374~412·재위 391~412)

지금의 만주·간도 지역은 물론 중앙아시아의 일부 지역까지 광활한 영토를 정복했던 고구려의 19대 왕. 이름은 담덕. 17세 어린 나이에 왕에 올라 38세까지 21년 동안 고구려를 통치했다. 그는 왕이 아닌 태왕으로 불렸다. 태왕은 중국의 황제처럼 여러 민족과 국가를 아우른 제국의 최고 지도자를 일컫는 말이다. 그는 한반도에서 최초로 영락(永樂)이라는 독자 연호(年號)를 사용했다. 연호란 아시아의 군주 국가에서 사용됐던 일종의 달력으로 군주의 치세 연차를 헤아리던 방법이다. 당시 연호는 중국의 황제만 사용할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이 독자 연호를 사용했다는 점은 고구려의 국력이 중국의 여러 왕조와 어깨를 맞댈 정도로 강대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미래엔은 “고구려인은 스스로를 하늘의 자손으로 여겼다…신라의 왕과 신하를 고구려로 불러들여 관리의 옷을 나누어 준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이는 동아시아 강대국으로 성장한 고구려가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과시하였음을 보여준다”고 기술한다.

 광개토대왕은 당시 수도였던 국내성(현 중국 집안시)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모든 방향으로 영토를 넓혔다. 중국 당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구당서』엔 고구려의 영토가 “동은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은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르고, 남은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은 말갈에 이른다. 동서는 3100리, 남북은 2000리에 달했다”고 적고 있다.

중국 집안(集安)시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 높이 6.39m, 무게 37t의 거대한 크기다.
제국을 건설하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광개토대왕은 대중에게 잊힌 왕이었다. 『구당서』『자치통감』『수서』등 중국 역사서는 물론 국내 최고(最古) 역사서인 『삼국사기』에서 조차 광개토대왕과 고구려에 대한 언급은 부분적이다. 특히 장거리 원정으로 거란을 정벌한 것이나 백제의 항복, 신라를 구원하고 가야와 왜를 격파한 사실, 동부여를 정복한 일 등은 기존 역사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다. 그의 업적과 고구려의 역사가 제대로 평가받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광개토대왕릉비(중국 집안시 소재)가 발견되면서부터다.

 광개토대왕이 넓혔던 영토는 서쪽으로는 지금의 몽골 동쪽에 해당되는 대흥안령 산맥과 시라무렌강 유역, 북쪽으로는 송화강 유역의 북만주 일대, 동쪽으로는 두만강을 넘어 목단강 유역의 연해주까지로 추정되고 있다.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은 크게 왕실에 대한 복수와 제국의 건설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갖고 있었다. 복수의 대상은 고구려 16대 왕인 고국원왕을 죽인 백제와 모용선비족이 세운 후연이었고 제국 건설이라는 목표를 위해 신라와 거란·동부여·숙신·가야·왜 등을 공략했다. 광개토대왕릉비엔 사해(四海)·사방(四方)이라는 표현과 함께 “백제·신라 왕이 항복해 노객(奴客)을 자처하며 신하의 예를 올리면 태왕이 은덕을 베풀었다”라는 문장이 자주 등장한다. 천하의 중심이 고구려임을 표현한 것이다. 두산동아는 “5세기 전반 고구려는 신라를 사실상 보호국으로 여기고 있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한때는 외적을 막는다는 구실로 고구려군이 신라에 주둔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왕위 계승에도 영향력을 미쳤다”고 썼다.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
  거란 정벌은 광개토대왕의 제국 건설 구상을 잘 보여준다. 광개토대왕릉비엔 “영락 5년(395) 을미년에 왕께서 패려(거란)가 □□하지(□ 는 판독 불가능한 글자)않기 때문에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셨다.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언덕에 이르러 600~700영을 쳐부수고 소·말·양떼를 얻은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거란 정벌은 고구려가 제국을 건설하는데 교두보 역할을 했다. 거란이 위치한 서요하 지역은 동북아시아의 고구려와 몽골 초원의 유목민 세력, 만리장성 남쪽의 중원 세력이 서로 만나는 곳이다. 이곳을 정벌함으로써 거란세력을 새로운 힘으로 얻었고, 서요하 남쪽에 위치한 후연으로 진격할 수 있는 길을 확보했다.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된 호우명 그릇. 그릇 뒤편에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이라는 광개토대왕 업적를 기린 표현이 적혀있다.
 대규모의 원거리 원정이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광개토대왕의 국제정세를 읽는 뛰어난 감각과 지략 덕분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집권 직후 백제와의 전쟁에 우선 집중한다. 『삼국사기』는 광개토대왕 즉위년인 “391년 7월에 대왕이 백제를 공격해 10개의 성을 빼앗았고 그해 10월엔 관미성을 함락했다”고 적고 있다. 집권 직후 고구려 남쪽 국경을 넓히고 백제가 후방에서 도발하지 않도록 미리 손을 써둔 것이다. 당시 후연은 북중국에서 급부상한 북위와의 전쟁에 힘을 쏟느라 고구려를 견제할 수 없었다. 광개토대왕은 후연이 처한 상황을 읽고 백제를 먼저 공격해 후방을 튼튼히 한 뒤 거란으로 장거리 원정을 계획한 것이다. 광개토대왕 재위 시절 중국은 5호 16국이 서로 중원의 패권을 놓고 다툰 분열기였다. 광개토대왕은 이런 국제정세의 변화를 정확하게 꿰뚫고 정벌의 우선순위를 두고 제국 건설의 밑그림을 그렸다.

거란을 정벌한 이듬해 광개토대왕은 방향을 돌려 대규모의 백제 정벌을 단행한다. 58개의 성과 700개의 마을을 획득한 큰 승리였다. 영락 8년(398) 숙신을 정복하고 영락 10년(400)엔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한 뒤 가야까지 정벌을 진행한다. 영락 17년(407)에는 후연을 격퇴하고 영락 20년(410)엔 동부여를 복속시켰다.

광개토대왕 재위시절 고구려 영토를 표시한 교과서 속 그림.
 언론은 광개토대왕의 제국 건설이 단지 영토 확장의 의미를 넘어서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졌다는 점에 주목한다. “광개토대왕의 남진정책…민족사의 발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동일 민족의식을 기반으로 한 통일 의지의 실천적 구현이라는 점에 그 역사적 의미가 있다.”(월간중앙 2004년 8월 19일 [스페셜 리포트 韓·中 역사전쟁 제 2탄!] 광개토대왕↗ ↘ 비문에 나타난 ‘天下觀’입체 조명) 광개토대왕 대에 이르러 비로소 백제·신라·가야가 모두 고구려의 직·간접적인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된다. 고구려의 성 쌓는 기법, 토기 제작 기법, 무덤의 형태, 건축술, 무기와 갑옷 등 고구려의 문화가 백제·신라에 전파됐다. 고구려 천하는 삼국 간 문화적 동질감을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 훗날 삼국을 통일한 것은 신라였지만 삼국통일의 씨앗을 뿌린 것은 광개토대왕이었던 셈이다.

일본의 역사 왜곡, 임나일본부

 처음으로 광개토대왕릉비의 가치를 파악하고 고대사 연구에 주력한 것은 한국이 아닌 일본이다. 19세기 말 조선 침략의 야욕을 드러낸 일본은 광개토대왕릉비의 내용을 왜곡해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 일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제기하며 일본의 조선합병을 정당화하려 했다. 일본학계가 주목한 대목은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신묘년의 다음 32글자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 破百殘□□□羅 以爲臣民” 중간에 지워진 세 글자를 일본 학계는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했다. 일본학계는 “백잔(백제)과 신라는 본래 우리(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예로부터 조공을 해 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에 와서 바다를 건너 백제·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주장했다. 고대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다.

다행히 한국학계의 연구가 지속되면서 일본의 주장은 근거없는 억측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독립운동가 정인보는 고구려라는 주어가 생략된 점을 고려해 “백제와 신라는 옛적부터 고구려에 조공을 바쳐왔다. 신묘년에 왜나라가 쳐들어오자,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가 왜를 쳐부셨다. 그런데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신라로 쳐들어가) 그들의 백성으로 삼으려 했다”라는 해석을 내놨다. 재일 사학자 이진희는 비문조작설을 주장했다. 대체로 지금의 학계는 정인보와 이진희의 해석을 받아들여 391년 고구려가 왜를 격퇴했다는 해석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일본 역사학계의 역사왜곡은 아직도 멈추지 않고 있다. 언론은 이 점에 주목한다. “임나일본부설은 폐기됐지만 ‘임나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최근 일본 학계는 고대 한반도는 고구려·백제·신라·가야가 분열됐던 것에 비해 당시 일본은 강력한 단일 정권(야마토 정권)을 수립했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단일국가 일본이 정치·외교적으로 우위에 섰다는 것이다.”(중앙일보 2010년 3월 24일 일본 학자들, 식민사관 ‘가지’는 자르고 ‘뿌리’는 유지)

* 중앙일보 - 글=정현진 기자 <correctroad@joongang.co.kr> 자문=최미정 중동고 역사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