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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정치>세종께 길을 묻는다

Bawoo 2015. 6. 1. 21:12

나라 안팎이 시끄럽고 어지러운 상황이 계속되다 보니 우리 역사에서 태평성세를 이끌었던 큰 어른의 가르침을 듣고 싶어진다. 지난달 15일 세종 탄신 618돌을 기념하는 ‘세종학 학술회의’가 경기도 여주 세종대왕릉 영릉재실에서 열렸다. 여주시와 여주대학교가 발족시킨 세종리더십연구소 창립 1주년도 함께 기념하는 모임이었다. 여러 편의 논문 발표와 토론이 이어지는 그 자리에서도 오늘의 한국이 처한 난국을 돌파하는 데 세종시대가 시사하는 타개책은 과연 어떤 것인가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600년 전 조선왕조의 세종시대로부터 오늘의 민주공화국이 처한 난제 해결의 힌트를 찾겠다는 것은 다소 엉뚱한 발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 건국 후 불과 6년 만에 태어나 22세에 왕위에 오른 세종에게 부과된 역사적 임무가 1000년을 지탱할 국가사직의 새 기틀을 마련하고 이를 뒷받침할 사회공동체를 이룩하는 것이었다면, 이는 해방 70년을 맞고 있는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부여된 시대적 사명과 성격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이 당면한 국가적 과제는 첫째로 정치적 분열을 넘어서는 합리적 국가운영 과정의 확립, 둘째로는 빈부격차를 비롯한 사회적 양극화를 해소하는 사회통합, 셋째 적자생존의 법칙이 작동하는 국제환경에서 나라의 안보와 경쟁력을 유지해 가며 통일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세종이 강조한 국정운영의 두 원칙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첫째 원칙은 백성, 즉 국민은 나라의 근본이며 근본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평안하다는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윤재 교수의 표현대로 백성의 삶을 챙기고 보듬는 일에 충실한 ‘보살핌의 정치’를 세종은 실천했다. 둘째 원칙은 이렇듯 국민이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 가려면 확고하고 효율적인 국가운영체제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국민을 위한 정치를 실현하는 기틀은 공정한 법의 제정과 엄격한 집행에 있다. 이를 위해 세종이 시작한 법전 편찬사업은 성종에 이르러 『경국대전』으로 완성되는데, 서울대 정긍식 교수의 지적대로 ‘법전국가’의 건설은 민심에 합치하는, 따라서 국민이 믿고 지킬 수 있는 법을 만드는 데 지도자의 세심한 노력이 경주되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세종의 공법(貢法), 즉 세법개혁 과정에서 그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세종 9년에서 23년까지 무려 14년에 걸친 세제개혁 과정은 17만300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등 수많은 검증과 보완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통치 과정의 업적은 32년이란 세종의 재위기간과도 무관하지 않다. 5년 단임제로 운영되고 있는 지금의 1987년 체제가 지닌 국가운영 능력의 한계와 연관시켜 생각해 볼 문제다. 어떻게 장기집권의 폐해를 예방하면서도 장기계획과 전략을 수립 및 집행하는 국가운영체제를 만드느냐가 우리의 시급한 당면과제다.

 사실 세종시대의 큰 업적인 훈민정음 창제, 아악 정비 등 문화예술 진흥, 천문학을 비롯한 과학기술 발전 등은 모두가 오늘의 단임 대통령제에서는 실현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선조들은 미래를 설계하려면 우선 과거를 알아야 한다는 자명한 이치에 따라 고려 인종은 김부식으로 하여금 5년에 걸친 작업 끝에 『삼국사기』를 완성시켰으며,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세우자마자 『고려사』 편찬을 시작해 세종 때에 이르러 완성시켰다. 그러나 왕조사보다는 문명사로 쓰임이 타당한 조선왕조사는 왕조실록과 같은 방대한 자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광복 70년인 지금까지도 시도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움을 토로한 전주대 오항년 교수의 의견은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근래 한국 정치의 성패를 가늠하는 핵심으로 부상된 인재 등용과 관리의 차원에서 세종은 우리에게 구체적인 처방을 남겨 주고 있다. 인재가 바로 나라의 보배라는 것, 따라서 인사행정이 성공적 국가운영의 열쇠라는 것을 세종은 간파하고 있었다. 어느 시대인들 인재가 없을 수는 없기에 오직 몰라서 못 쓴다는 세종의 판단은 아직도 유효하다. 다만 인재를 발굴하고 등용하며 적재적소에 배치하기 위해서는 인재경영의 제도화에 지도자가 상당한 투자를 해야 된다는 것이 세종리더십연구소장인 박현모 교수의 지론이다. 집현전이란 제도와 조직은 지금도 본받을 여지가 충분하다. 집현전 학사들과의 담론을 통해 지도자는 국가의 나아갈 길을 찾고 이를 운영할 인물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해방 70년, 2년 후면 87민주화체제 30년의 실험을 마감하게 되는 이 시점에서 국가운영의 기초를 재정립한다는 역사인식을 갖고 세종이 남긴 큰 정치의 전통을 이어받아야 되지 않겠는가.

* 중앙일보 -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