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374~412·재위 391~412)
지금의 만주·간도 지역은 물론 중앙아시아의 일부 지역까지 광활한 영토를 정복했던 고구려의 19대 왕. 이름은 담덕. 17세 어린 나이에 왕에 올라 38세까지 21년 동안 고구려를 통치했다. 그는 왕이 아닌 태왕으로 불렸다. 태왕은 중국의 황제처럼 여러 민족과 국가를 아우른 제국의 최고 지도자를 일컫는 말이다. 그는 한반도에서 최초로 영락(永樂)이라는 독자 연호(年號)를 사용했다. 연호란 아시아의 군주 국가에서 사용됐던 일종의 달력으로 군주의 치세 연차를 헤아리던 방법이다. 당시 연호는 중국의 황제만 사용할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이 독자 연호를 사용했다는 점은 고구려의 국력이 중국의 여러 왕조와 어깨를 맞댈 정도로 강대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미래엔은 “고구려인은 스스로를 하늘의 자손으로 여겼다…신라의 왕과 신하를 고구려로 불러들여 관리의 옷을 나누어 준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이는 동아시아 강대국으로 성장한 고구려가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과시하였음을 보여준다”고 기술한다.
광개토대왕은 당시 수도였던 국내성(현 중국 집안시)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모든 방향으로 영토를 넓혔다. 중국 당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구당서』엔 고구려의 영토가 “동은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은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르고, 남은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은 말갈에 이른다. 동서는 3100리, 남북은 2000리에 달했다”고 적고 있다.
중국 집안(集安)시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 높이 6.39m, 무게 37t의 거대한 크기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광개토대왕은 대중에게 잊힌 왕이었다. 『구당서』『자치통감』『수서』등 중국 역사서는 물론 국내 최고(最古) 역사서인 『삼국사기』에서 조차 광개토대왕과 고구려에 대한 언급은 부분적이다. 특히 장거리 원정으로 거란을 정벌한 것이나 백제의 항복, 신라를 구원하고 가야와 왜를 격파한 사실, 동부여를 정복한 일 등은 기존 역사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다. 그의 업적과 고구려의 역사가 제대로 평가받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광개토대왕릉비(중국 집안시 소재)가 발견되면서부터다.
광개토대왕이 넓혔던 영토는 서쪽으로는 지금의 몽골 동쪽에 해당되는 대흥안령 산맥과 시라무렌강 유역, 북쪽으로는 송화강 유역의 북만주 일대, 동쪽으로는 두만강을 넘어 목단강 유역의 연해주까지로 추정되고 있다.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은 크게 왕실에 대한 복수와 제국의 건설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갖고 있었다. 복수의 대상은 고구려 16대 왕인 고국원왕을 죽인 백제와 모용선비족이 세운 후연이었고 제국 건설이라는 목표를 위해 신라와 거란·동부여·숙신·가야·왜 등을 공략했다. 광개토대왕릉비엔 사해(四海)·사방(四方)이라는 표현과 함께 “백제·신라 왕이 항복해 노객(奴客)을 자처하며 신하의 예를 올리면 태왕이 은덕을 베풀었다”라는 문장이 자주 등장한다. 천하의 중심이 고구려임을 표현한 것이다. 두산동아는 “5세기 전반 고구려는 신라를 사실상 보호국으로 여기고 있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한때는 외적을 막는다는 구실로 고구려군이 신라에 주둔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왕위 계승에도 영향력을 미쳤다”고 썼다.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된 호우명 그릇. 그릇 뒤편에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이라는 광개토대왕 업적를 기린 표현이 적혀있다.
거란을 정벌한 이듬해 광개토대왕은 방향을 돌려 대규모의 백제 정벌을 단행한다. 58개의 성과 700개의 마을을 획득한 큰 승리였다. 영락 8년(398) 숙신을 정복하고 영락 10년(400)엔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한 뒤 가야까지 정벌을 진행한다. 영락 17년(407)에는 후연을 격퇴하고 영락 20년(410)엔 동부여를 복속시켰다.
광개토대왕 재위시절 고구려 영토를 표시한 교과서 속 그림.
일본의 역사 왜곡, 임나일본부
처음으로 광개토대왕릉비의 가치를 파악하고 고대사 연구에 주력한 것은 한국이 아닌 일본이다. 19세기 말 조선 침략의 야욕을 드러낸 일본은 광개토대왕릉비의 내용을 왜곡해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 일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제기하며 일본의 조선합병을 정당화하려 했다. 일본학계가 주목한 대목은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신묘년의 다음 32글자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 破百殘□□□羅 以爲臣民” 중간에 지워진 세 글자를 일본 학계는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했다. 일본학계는 “백잔(백제)과 신라는 본래 우리(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예로부터 조공을 해 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에 와서 바다를 건너 백제·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주장했다. 고대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다.
다행히 한국학계의 연구가 지속되면서 일본의 주장은 근거없는 억측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독립운동가 정인보는 고구려라는 주어가 생략된 점을 고려해 “백제와 신라는 옛적부터 고구려에 조공을 바쳐왔다. 신묘년에 왜나라가 쳐들어오자,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가 왜를 쳐부셨다. 그런데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신라로 쳐들어가) 그들의 백성으로 삼으려 했다”라는 해석을 내놨다. 재일 사학자 이진희는 비문조작설을 주장했다. 대체로 지금의 학계는 정인보와 이진희의 해석을 받아들여 391년 고구려가 왜를 격퇴했다는 해석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일본 역사학계의 역사왜곡은 아직도 멈추지 않고 있다. 언론은 이 점에 주목한다. “임나일본부설은 폐기됐지만 ‘임나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최근 일본 학계는 고대 한반도는 고구려·백제·신라·가야가 분열됐던 것에 비해 당시 일본은 강력한 단일 정권(야마토 정권)을 수립했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단일국가 일본이 정치·외교적으로 우위에 섰다는 것이다.”(중앙일보 2010년 3월 24일 일본 학자들, 식민사관 ‘가지’는 자르고 ‘뿌리’는 유지)
* 중앙일보 - 글=정현진 기자 <correctroad@joongang.co.kr> 자문=최미정 중동고 역사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