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툇마루에 앉아 책을 보는데 객지에 산다는
동창 부음을 받고 가슴께에 조등을 내건다
감나무 아래 늙은 개가 땅바닥에 졸음을 내려놓았는데
한 평 그늘이 묘혈 같다
마늘단이 까실히 말라가고
처마 밑 제비 살던 오막살이 한 채
적막이 깊다
<곡선의 나라>
외진 산비탈을
등뼈처럼 휜 다랑논이 기어오르고 있다
윗논이 아랫논을 끌고
아랫논이 윗논을 미는
평생을 쇠똥구리처럼 오르내리는
천출賤出의 땅
아버지 어머니가 사는 나라
<새>
새가 날아가 버렸다
눈 깜짝할 새
날갯짓할 새도 없이
쳐다볼 틈도 없이
정말 눈 깜짝할 새
어느 누구도
본 적 없는
이젠 영영 날아가 버린…
눈 깜짝할 새
나는
2만 2천90일을 날아왔다
하루가 나뭇가지에서
새처럼 날아간다
오지奧地
산 첩첩 눈끝을 향해 달려오는 산맥 허리마다 누군가 휘갈긴 비백飛白
사이로 뾰쪽 내민 산의 이마에 적막이 깊다. 내 등뼈를 타고 몰아치던
그해 겨울 눈보라 비칠거리는 능선 한가운데서 적설은 내 허벅지까지
칭칭 붕대를 감아댔다 흔적은 흔적을 지우고 그 아스라한 경계에서
나는 산이었다가 나무였다가 아무것도 아니었다가 사방은 온통 눈 첩첩
거대한 북극곰들이 으르렁거리며 진을 치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더는 갈 수 없는 내 몸의 오지 등뼈 그 골짜기 거제수나무 껍질에서
저문 바람 소리가 들렸다 웅성거리는 곳에 귀 기울이면 사무치는 것은
그대를 향해 뛰어가는 발자국만은 아니었다 그곳에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을 그대의 거처가 궁금했으므로 아직 봉인되지 않은 그리움이 겨울을
나고 있으리 외진 바람으로
조수옥(1958~ 전남 진도)
시집 "어둠 속에서 별처럼 싹이 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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