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구마 에이지 지음
김범수 옮김, 동아시아
358쪽, 1만6000원
‘뻔한 얘기겠군’이란 선입견을 줄 만한 제목 때문에 이 책을 밀쳐버릴 분들을 위해 일본판 원제를 먼저 알려드린다. ‘살아서 돌아온 남자-어느 일본군의 전쟁과 전후’다. ‘광복 70주년 맞춤 기획이겠지’ 짐작할 이들에겐 다음 구절을 권한다. 한국인이고 일본인이고 간에 우리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저절로 일깨워주는 서술 중 하나다.
“서로 전쟁을 체험한 사람이어서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운다든지 아우성친다든지 감정이 격해진다든지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서로 알았다. 격하게 감동한다든지 운다든지 하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296쪽)
주인공 오구마 겐지(90·小熊謙二)는 19살에 소련군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에서 강제 노동한 3년을 돌아보면서도 ‘비참한 운명’ 운운하는 다른 회상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냥 살아남는 데 필사적이었다. 그런 추상적인 것을 생각한 것은 원래 수준 높은 사람이거나 실외에서 중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장교였을 것이다.”
이 독특한 생활사(生活史)를 쓴 이는 겐지의 아들인 오구마 에이지(53·小熊英二) 게이오기주쿠대 종합정책학부 교수다. 1925년 태어나 평범한 보통 사람으로 살다가 징병되어 중국 대륙으로 보내진 뒤 수용소에서 귀환해 밑바닥 삶을 거친 아버지의 일생을 아들은 ‘담담하게’ 풀어낸다. 언뜻 전쟁 체험기처럼 보이지만 전쟁 전과 후의 일본 사회사와 경제사가 한 가족사를 통해 시시콜콜 펼쳐져 ‘살아낸 20세기 역사’의 성격을 띠고 있다. 도시 하층의 상인 집안, 전후 뜨내기 인생을 다루는 관점 덕에 민중사 구실도 겸하고 있다. 솔직한 증언과 꼼꼼한 채록으로 소설 못지않은 흥미를 돋우는 구성도 좋다. 에이지는 “글을 남기지 않는 사람, 그러나 후세에 전해야만 하는 경험을 한 사람의 기억을 글로 써둔다는 것은 역사 연구자의 역할”이라고 집필 동기를 밝혔다.
부친이 특별한 인간도 아니고 성인(聖人)이 아니라는 것도 아는 아들은 단 하나, “아버지가 갖고 있는 타자(他者)에 대한 상상력”(7쪽)에 감명 받았고, 이런 상상력이야말로 지금 세상에 필요한 것이라는 뜻에서 책을 지었다고 털어놨다. 그 구체적 사건이 한국인과 연결돼 있는 제9장 ‘전후보상재판’에 상세히 펼쳐진다. 겐지는 1970년대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를 읽고, 81년 폴란드 민주화운동에 공감한 뒤부터 몇몇 사회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그러던 89년 ‘부전(不戰) 병사의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이 단체의 회보 『부전』에 ‘조선인 일본군’이었던 오웅근씨가 ‘맨주먹의 병사’라는 수기를 연재하고 있었는데 내용을 보니 수용소에서 알던 한국인이었다. 중국에 거주한다는 오씨와 연락이 닿은 겐지는 소련 억류자에 대해 일본 정부가 주는 ‘평화기념사업’ 위로금 10만 엔을 신청해 절반인 5만 엔을 보낸다. 강제로 일본군에 징집됐지만 전후 국적을 상실해 연금이나 기타 대상에서 제외됐던 오씨에게 연대의 마음을 전하자는 행동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오웅근씨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정식 배상을 받아내기 위한 소송을 제기하면서 겐지에게 공동 원고가 되어달라고 요청한다. 96년 9월 도쿄지방법원에 소장을 제출하면서 겐지는 귀찮아질지 모른다는 이웃 말에 “무엇에 신경 쓰라는 건가. 어차피 ‘아래의 아래’에서 살아온 몸”이라고 응수한다. “‘일본계 일본인 전 포로’와 ‘조선계 중국인 전 포로’가 보수파 아시아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아 재판을 제기한다는, 거의 전례가 없는 소송이었다.”(337쪽)
재판에선 졌다. 20분에 걸쳐 ‘인간의 권리를 지키게 해 달라’고 구두변론까지 한 겐지는 2002년 대법원에서 청구 기각으로 결심이 나오자 “법원 서류 더미 속에 남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며 돌아섰다. 겐지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서 화나는 것이 많다며 아들에게 말한다.
“정치인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반복하는 것이나 난징 사건이 거짓이라고 쓴 논조에 대해서는 벌써 포기한 심정이다. 그러나 ‘조용한 분노’는 언제나 있다. 최근 주간지의 제목을 보고 있으면 배타적인 모독성 발언이 넘쳐나고 역사의 진실을 축소시키고 있다.”(348쪽)
겐지는 요즘 90세 고령에도 능숙하게 집안일을 하며 ‘국경 없는 의사회’에 회비를 내고 양심수 수감에 항의하는 영문 엽서를 써서 보낸다. 아들은 마지막으로 시베리아나 결핵요양소 등에서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았을 때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느냐고 물었다. “희망이다. 그것이 없으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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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양심의 탄생 (오구마 에이지 지음, 동아시아 펴냄)
전쟁 포로 국적 상관없이 사죄·손해배상 요구했지만 도쿄지법 결국 청구 기각
日 지난 20세기 되돌아보며 전후 평화의식 형성과정 조명
日정부 이중적 태도에 일침
이재유기자 0301@sed.co.kr
그만큼이나 지난 12일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방문해 추모비 앞에서 사죄한 것은 의미가 컸다. 갈수록 우경화되는 일본 사회와 우익 정치인의 득세 속에서 진심으로 과거 역사에 대해 사죄하는 모습은 한국인과 중국인에게 큰 감동을 줬다.
드물지만 이처럼 적극적으로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는 일본 지식인이 또 있다. 일본 시민운동의 아이콘이자 베스트셀러 '사회를 바꾸려면'의 저자인 오구마 에이지 일본 게이오대 역사사회학 교수다. 저자는 올해로 팔순을 맞는 아버지 오구마 겐지를 인터뷰해 한 개인의 일생으로 일본의 지난 20세기를 돌아본다. 전쟁이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을 수 있는지, '전후 평화의식'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90여 년 급변하는 사회 맥락 속에서 되묻는다.
저자의 아버지 겐지는 1925년생으로, 스무살인 1945년 일본군에 입대했다. 알다시피 전쟁은 곧 끝나고 겐지는 소련군의 포로로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3년을 보낸다. 이곳에는 조선인 포로 오웅근도 있었다. 일본인이라 강제 징집됐지만, 조선인이라 무기도 없이 전쟁터에 끌려다닌 '조선인 일본군'이었다. 당시 이런 조선인이 소련에만 1만 명에 달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40여 년이 지나 일본 국적자, 즉 일본인에게만 전쟁피해자 위로금을 전달한다. 오구마 겐지는 이를 받았지만 오웅근은 제외됐다. 만주에 살던 오웅근을 일본인이라며 전쟁터에 끌고 다녔지만, 이제는 외국인(중국 국적)이라 보상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어처구니없게도 그 국적이라는 것을 바꾼 건 일본 정부였다. 일제 강점기 강제로 일본 국적을 부여한 일본 정부는 종전 이후인 1947년 '외국인 등록령'으로 조선·대만 등 식민지였던 지역의 일본 국적자를 '당분간 외국인으로 간주한다'고 선언한다. 1952년 연합군 총사령부가 철수하자 아예 일본 국적을 박탈했다. 그리고 그걸 근거 삼아 배상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겐지는 이 보상금을 받아 절반을 오웅근에게 보낸다.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징집해놓고 지금은 외국인이기 때문에 지급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리고 오웅근의 부탁으로 1996년 정부를 상대로 소송에 나선다. 일본계 일본인과 조선계 중국인 상관없이 전쟁 포로로 어려움을 겪은 모두에게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손해배상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패소한다. 2000년 도쿄지법은 '국민이 다 같이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 되는 전쟁피해'이기 때문에 보상할 수 없다는 청구기각 결정만 남겼다.
저자는 최근 일본이 미국과 중국에 공식 사과했으면서도 굳이 한국에는 끝까지 억지 주장을 펴는 이중적인 태도를 지적한다. 더불어 민간 합자기구를 통해 소액만 배상하는 것 역시 '눈속임'이라고 말한다. 원제는 '살아서 돌아온 남자 - 어느 일본군의 전쟁과 전후'다. 1만6,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