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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양심의 탄생(오구마 에이지 지음, 김범수 옮김)

Bawoo 2015. 9. 20. 06:35

일본 양심의 탄생/오구마 에이지 지음/김범수 옮김/358쪽·1만6000원·동아시아
관동군 → 시베리아 포로 → 종전후 평화 활동

1943년 지인의 군대 입영자 송별회에 참석한 오구마 겐지(앞줄 오른쪽 두번째). 그 역시 1944년 11월 징집돼 관동군 이등병으로 복무하다 패전 뒤 시베리아 포로수용소에서 3년 동안 억류됐다. 그는 귀향 뒤 “바보 같은 전쟁을 시작해서 많은 사람을 죽인 사람들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아시아 제공)
<목차>

한국어판 출간에 부쳐
제1장 입영까지
제2장 수용소로
제3장 시베리아
제4장 민주운동
제5장 뜨내기생활
제6장 결핵요양소
제7장 고도성장
제8장 전쟁의 기억
제9장 전후보상재판
마치며

 

저자 오구마 에이지

저서(총 2권)
1962년 도쿄 출생. 1987년 도쿄대학교 농학부를 졸업하고, 1998년 도쿄대학교 대학원 종합문화연구과 국제사회과학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게이오기주쿠대학교 종합정책학부 교수이다. 국내에 출간된 저서는 『일본 단일민족신화의 기원』과 『일본이라는 나라』가 있다. 그 외 저서로 『1968』, 『‘민주’와 ‘애국’―전후 일본 민족주의와 공공성』, 『‘일본인’의 경계』,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오구마 에이지 시평집』 등이 있고, 공저 『‘도호쿠’ 재생』, 편저 『변경에서 시작한다―도쿄/도호쿠론』 등이 있다. 1996년 『일본 단일민족신화의 기원』으로 산토리학예상, 2003년 『‘민주’와 ‘애국’』으로 제2회 일본 사회학회 장려상과 제57회 마이니치출판문화상, 2004년에 『‘민주’와 ‘애국’』으로 제3회 오사라기 지로 논단상, 2010년 『1968』로 가도카와 재단 학예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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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사들의 책 소개 글 > 

간도 참변이나 난징 대학살 등에서 민간인을 무차별로 학살한 일본 ‘황군’은 ‘악마’였다. 그러나 그게 일본군 전체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황군의 상당수는 보통 사람이었다.

이 책은 그런 일본인들이 겪었던 전쟁의 모습을 보여 준다. 1925년 태어난 오구마 겐지가 1944년 11월 징집돼 관동군에 배치되고, 패전 뒤 구 소련군의 포로가 돼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노역하다가 돌아온 이야기다. 오구마의 구술을 게이오기주쿠대 종합정책학부 교수인 아들이 책으로 펴냈다.

오구마는 만주 헤이룽장 성 동남부 닝안 지역의 관동군 항공통신연대에 배치됐지만 전투를 치른 적이 없고, 총 한 방 쏘지 않았다. 패전 소식을 들은 뒤에는 ‘이제 일본으로 돌아가 가족을 만날 수 있다’고 기뻐했지만 그를 포함한 일본군 등 약 64만 명(강제 동원 조선인 약 1만 명 포함)은 소련군의 포로가 돼 시베리아 등에 분산 수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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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43년 만에 시베리아 치타 수용소 터를 다시 찾은 오구마 겐지. (동아시아 제공)

 

오구마는 시베리아 연방관구 치타 주의 치타 제24지구 수용소에 수용됐다. 수용소로 가는 열차 안에서 포로 한 명이 죽은 것을 시작으로 수년 뒤 귀환 때까지 그와 함께 수용된 포로 약 500명 중 45명 이상이 죽었다. 추위와 영양실조 탓이었다. 시베리아 포로의 사망률은 약 10%로 알려져 있다.

그동안 시베리아 포로가 펴낸 귀환기는 주로 장교나 지식인 출신이 쓴 탓에 젊은 날이 덧없이 흘러가는 것에 대한 초조감 등이 담겨 있지만 오구마는 “그냥 살아남는 데 필사적이었다”고 했다.

 

건장하지 않았던 몸으로 운 좋게 노역을 견뎌 낸 오구마는 1948년 8월 귀환선을 탄다. 귀향을 학수고대했던 그지만 배에 내걸린 일장기에 대한 감개는 전혀 없었다. 그는 “1945년부터 일장기를 보자기로 썼다”고 했다.

그는 “나는 전쟁을 지지한다는 생각도 없었고, 반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휩쓸려 간 것이다”고 입대 전의 자신을 회상했다. 군 복무는 “포로가 되기 위해 (만주에) 보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라고 했고 패전 뒤에는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든 전쟁 책임에 대해 쇼와 천황의 사과를 받고 싶었다”고 했다.

책은 입대 전후 오구마의 개인사를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 변동과 함께 서술한다. 전쟁 중 물자가 부족해져 궁핍해지고, 전후에는 여러 일자리를 전전하며 호구책을 찾는 일본 서민의 일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일본인이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격동의 현대사를 살아온 한국의 부모나 조부모 세대 이야기처럼 읽히기도 한다.

전쟁과 대규모 학살은 별 생각 없이 명령을 따르는 보통 사람들의 손으로 수행되는 것이기에 평범한 병사라고 무조건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다. 오구마 역시 중국군이나 조선 독립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는 곳에 투입됐다면 살아남기 위해 상대방을 죽였을 것이다.

 

오구마는 1988년부터 평화를 지향하는 ‘부전(不戰) 병사의 모임’에 참여하며, 과거의 실타래를 풀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과 함께 시베리아 포로로 수용됐지만 일본 정부의 위로금 지급 대상에서는 배제된 조선인 오웅근 씨를 기억해 내고, 1990년 정부에서 받은 위로금 10만 엔 중 절반을 오 씨에게 보냈다. 1996년에는 오 씨와 공동으로 “일본 정부가 조선인 시베리아 억류 포로에게도 배상을 해야 한다”는 소송을 냈으나 끝내 패소했다.

저자는 “인간은 평범하게 살지만 몇 차례인가 위기를 경험하고 영웅적인 행동을 한다”며 “아버지의 궤적은 어디까지나 일본인의 평균적인 인생행로”라고 말한다. 돌려 말했지만 평화는 힘없어 보이는 평범한 양심에서 온다는 얘기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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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육군 이등병 오구마 겐지의 1945년 만주 복무 시절 모습(큰 사진). 겐지와 함께 일본 정부에 소련 억류자에 대한 피해보상소송을 낸 오웅근씨(작은 사진). [사진 동아시아]

일본 양심의 탄생
오구마 에이지 지음
김범수 옮김, 동아시아
358쪽, 1만6000원


‘뻔한 얘기겠군’이란 선입견을 줄 만한 제목 때문에 이 책을 밀쳐버릴 분들을 위해 일본판 원제를 먼저 알려드린다. ‘살아서 돌아온 남자-어느 일본군의 전쟁과 전후’다. ‘광복 70주년 맞춤 기획이겠지’ 짐작할 이들에겐 다음 구절을 권한다. 한국인이고 일본인이고 간에 우리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저절로 일깨워주는 서술 중 하나다.

 “서로 전쟁을 체험한 사람이어서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운다든지 아우성친다든지 감정이 격해진다든지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서로 알았다. 격하게 감동한다든지 운다든지 하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296쪽)

 주인공 오구마 겐지(90·小熊謙二)는 19살에 소련군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에서 강제 노동한 3년을 돌아보면서도 ‘비참한 운명’ 운운하는 다른 회상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냥 살아남는 데 필사적이었다. 그런 추상적인 것을 생각한 것은 원래 수준 높은 사람이거나 실외에서 중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장교였을 것이다.”

저자 오구마 에이지

 

이 독특한 생활사(生活史)를 쓴 이는 겐지의 아들인 오구마 에이지(53·小熊英二) 게이오기주쿠대 종합정책학부 교수다. 1925년 태어나 평범한 보통 사람으로 살다가 징병되어 중국 대륙으로 보내진 뒤 수용소에서 귀환해 밑바닥 삶을 거친 아버지의 일생을 아들은 ‘담담하게’ 풀어낸다. 언뜻 전쟁 체험기처럼 보이지만 전쟁 전과 후의 일본 사회사와 경제사가 한 가족사를 통해 시시콜콜 펼쳐져 ‘살아낸 20세기 역사’의 성격을 띠고 있다. 도시 하층의 상인 집안, 전후 뜨내기 인생을 다루는 관점 덕에 민중사 구실도 겸하고 있다. 솔직한 증언과 꼼꼼한 채록으로 소설 못지않은 흥미를 돋우는 구성도 좋다. 에이지는 “글을 남기지 않는 사람, 그러나 후세에 전해야만 하는 경험을 한 사람의 기억을 글로 써둔다는 것은 역사 연구자의 역할”이라고 집필 동기를 밝혔다.

 부친이 특별한 인간도 아니고 성인(聖人)이 아니라는 것도 아는 아들은 단 하나, “아버지가 갖고 있는 타자(他者)에 대한 상상력”(7쪽)에 감명 받았고, 이런 상상력이야말로 지금 세상에 필요한 것이라는 뜻에서 책을 지었다고 털어놨다. 그 구체적 사건이 한국인과 연결돼 있는 제9장 ‘전후보상재판’에 상세히 펼쳐진다. 겐지는 1970년대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를 읽고, 81년 폴란드 민주화운동에 공감한 뒤부터 몇몇 사회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그러던 89년 ‘부전(不戰) 병사의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이 단체의 회보 『부전』에 ‘조선인 일본군’이었던 오웅근씨가 ‘맨주먹의 병사’라는 수기를 연재하고 있었는데 내용을 보니 수용소에서 알던 한국인이었다. 중국에 거주한다는 오씨와 연락이 닿은 겐지는 소련 억류자에 대해 일본 정부가 주는 ‘평화기념사업’ 위로금 10만 엔을 신청해 절반인 5만 엔을 보낸다. 강제로 일본군에 징집됐지만 전후 국적을 상실해 연금이나 기타 대상에서 제외됐던 오씨에게 연대의 마음을 전하자는 행동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오웅근씨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정식 배상을 받아내기 위한 소송을 제기하면서 겐지에게 공동 원고가 되어달라고 요청한다. 96년 9월 도쿄지방법원에 소장을 제출하면서 겐지는 귀찮아질지 모른다는 이웃 말에 “무엇에 신경 쓰라는 건가. 어차피 ‘아래의 아래’에서 살아온 몸”이라고 응수한다. “‘일본계 일본인 전 포로’와 ‘조선계 중국인 전 포로’가 보수파 아시아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아 재판을 제기한다는, 거의 전례가 없는 소송이었다.”(337쪽)

 재판에선 졌다. 20분에 걸쳐 ‘인간의 권리를 지키게 해 달라’고 구두변론까지 한 겐지는 2002년 대법원에서 청구 기각으로 결심이 나오자 “법원 서류 더미 속에 남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며 돌아섰다. 겐지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서 화나는 것이 많다며 아들에게 말한다.

 “정치인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반복하는 것이나 난징 사건이 거짓이라고 쓴 논조에 대해서는 벌써 포기한 심정이다. 그러나 ‘조용한 분노’는 언제나 있다. 최근 주간지의 제목을 보고 있으면 배타적인 모독성 발언이 넘쳐나고 역사의 진실을 축소시키고 있다.”(348쪽)

 겐지는 요즘 90세 고령에도 능숙하게 집안일을 하며 ‘국경 없는 의사회’에 회비를 내고 양심수 수감에 항의하는 영문 엽서를 써서 보낸다. 아들은 마지막으로 시베리아나 결핵요양소 등에서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았을 때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느냐고 물었다. “희망이다. 그것이 없으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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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양심의 탄생 (오구마 에이지 지음, 동아시아 펴냄)
전쟁 포로 국적 상관없이 사죄·손해배상 요구했지만 도쿄지법 결국 청구 기각
日 지난 20세기 되돌아보며 전후 평화의식 형성과정 조명
日정부 이중적 태도에 일침


  • 이재유기자 0301@sed.co.kr
    '8월15일'을 기념하는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입장은 다르다. 각각 '광복' '승전' '패전'의 의미가 교차하는 세 나라다. 최근 한국내 여론조사에서는 국민 65%가 '한중일 정상회담은 일본이 사과한 후에 개최해야 한다'고 응답할 정도로 일본을 향한 감정의 골이 깊다.

    그만큼이나 지난 12일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방문해 추모비 앞에서 사죄한 것은 의미가 컸다. 갈수록 우경화되는 일본 사회와 우익 정치인의 득세 속에서 진심으로 과거 역사에 대해 사죄하는 모습은 한국인과 중국인에게 큰 감동을 줬다.

    드물지만 이처럼 적극적으로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는 일본 지식인이 또 있다. 일본 시민운동의 아이콘이자 베스트셀러 '사회를 바꾸려면'의 저자인 오구마 에이지 일본 게이오대 역사사회학 교수다. 저자는 올해로 팔순을 맞는 아버지 오구마 겐지를 인터뷰해 한 개인의 일생으로 일본의 지난 20세기를 돌아본다. 전쟁이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을 수 있는지, '전후 평화의식'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90여 년 급변하는 사회 맥락 속에서 되묻는다.
    저자의 아버지 겐지는 1925년생으로, 스무살인 1945년 일본군에 입대했다. 알다시피 전쟁은 곧 끝나고 겐지는 소련군의 포로로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3년을 보낸다. 이곳에는 조선인 포로 오웅근도 있었다. 일본인이라 강제 징집됐지만, 조선인이라 무기도 없이 전쟁터에 끌려다닌 '조선인 일본군'이었다. 당시 이런 조선인이 소련에만 1만 명에 달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40여 년이 지나 일본 국적자, 즉 일본인에게만 전쟁피해자 위로금을 전달한다. 오구마 겐지는 이를 받았지만 오웅근은 제외됐다. 만주에 살던 오웅근을 일본인이라며 전쟁터에 끌고 다녔지만, 이제는 외국인(중국 국적)이라 보상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어처구니없게도 그 국적이라는 것을 바꾼 건 일본 정부였다. 일제 강점기 강제로 일본 국적을 부여한 일본 정부는 종전 이후인 1947년 '외국인 등록령'으로 조선·대만 등 식민지였던 지역의 일본 국적자를 '당분간 외국인으로 간주한다'고 선언한다. 1952년 연합군 총사령부가 철수하자 아예 일본 국적을 박탈했다. 그리고 그걸 근거 삼아 배상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겐지는 이 보상금을 받아 절반을 오웅근에게 보낸다.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징집해놓고 지금은 외국인이기 때문에 지급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리고 오웅근의 부탁으로 1996년 정부를 상대로 소송에 나선다. 일본계 일본인과 조선계 중국인 상관없이 전쟁 포로로 어려움을 겪은 모두에게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손해배상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패소한다. 2000년 도쿄지법은 '국민이 다 같이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 되는 전쟁피해'이기 때문에 보상할 수 없다는 청구기각 결정만 남겼다. 

    저자는 최근 일본이 미국과 중국에 공식 사과했으면서도 굳이 한국에는 끝까지 억지 주장을 펴는 이중적인 태도를 지적한다. 더불어 민간 합자기구를 통해 소액만 배상하는 것 역시 '눈속임'이라고 말한다. 원제는 '살아서 돌아온 남자 - 어느 일본군의 전쟁과 전후'다. 1만6,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