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쿠치 겐조, 한국사를 유린하다』는 일제강점기 거물 언론인이자 재야 역사학자인 기쿠치 겐조의 활동을 통해 뼈아픈 역사를 돌아본다. 기쿠치가 어떻게 명성황후를 칼과 글로 두 번씩이나 치욕스러운 죽음으로 몰아넣었는지, 아직까지도 우리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한말의 어지러운 정치상과 인물들에 대한 혼란스러운 선입견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갖는다.
들어가는 글
01 낭인 기쿠치, 명성왕후를 살해하다
일본은 왜 명성왕후를 살해했나
《한성신보》 낭인들과 ‘여우사냥’에 가담하다
히로시마 감옥에서의 호사스러운 휴식
친일 정권을 타도하라, 춘생문 사건
02 구마모토의 기쿠치, 낭인이 되다
구마모토 국권당과 낭인
도쿠토미 소호와 또 다른 후원자들
기자가 된 기쿠치, 한국에 건너오다
03 돌아온 기쿠치, 한국 내 일본 언론계의 거물이 되다
《한성신보》와 《대동신보》 사장이 되다
통감부와 총독부 식민 통치의 보조 활동
04 ‘조선통’ 기쿠치, 한국사를 유린하다
《조선왕국》, 한국사 왜곡을 시작하다
《대원군전》, 픽션을 논픽션처럼
05 이류 사학자 기쿠치, ‘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 한국’을 쓰다
오류 투성이의 역사
며느리를 죽인 흥선대원군과 ‘악녀 민비’
부패와 타락, 미신과 무당의 정치를 한 ‘민비’
‘을미사변’, 그날의 왜곡
고종, 무능한 왕궁의 나무 인형
동학농민운동은 폭동, 청일전쟁은 조선의 독립을 위한 의전
06 식민학자 기쿠치, ‘문명 일본의 은혜로운 식민 통치’를 쓰다
선진 일본, 후진 조선
열등·불결·태만·천박·음험한 조선인
‘악정의 책임, 경상도’, ‘폭도의 고장, 전라도’
나오는 글
부록 1 관련 인물
부록 2 관련 표
주석
참고문헌
저자 : 하지연
저자 하지연은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1995)와 박사학위(2006)를 받았다. 1995년부터 서울 마포고등학교에서 역사과 교사로 재직 중이며, 2002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이해’, ‘한국사의 새로운 이해’, ‘한국 근대사의 전개’ 등 전공 및 핵심교양과목 강의를 맡고 있다. 이화사학연구소 연구원(2004~현재), 2011년 역사교육과정개발추진위원회 위원, 2011년 역사교육과정개발정책연구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한국병합’에 대한 재한일본 언론의 동향 잡지 《조선朝鮮》을 중심으로>, <한말 일제강점기 기쿠치 겐조菊池謙讓의 문화적 식민 활동과 한국관>,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의 《근대일선관계의 연구》와 한국근대사 인식〉 등의 논문과 《식민사학과 한국 근대사》, 《일제하 식민지 지주제 연구》 등의 저서를 썼다.
<출판사 서평>
120년 전 을미사변, 이어진 국권 침탈과 식민 통치 그리고 광복
그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왕비가 살해당했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인 1895년(을미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은 작전명 ‘여우사냥’을 시행했다. 주한 일 본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 아래 일본군 수비대 600명과 훈련대 800명 그리고 낭인 56명이 경복궁으로 난입해 명성황후를 살해한 사건이다. 왕비는 무참하게 살해됐고, 시신마저 불태워졌다. 그러나 이 천인공노할 만행은 서울 주재 외교관을 통해 세계 각국에 곧 알려졌고 미국·영국·러시아 등 열강은 일본이 저지른 “야만적 살인 행위”를 비난했다. 궁지에 몰린 일본 정부는 미우라를 비롯한 사건 관련자들을 히로시마 형무소에 수감하고 재판에 회부했으나, 관련자들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됐다.
칼로 왕비를 죽이고, 펜으로 한국사를 유린하다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 불리는 이 사건에 가담한 살인자들 가운데 이 책의 주인공, 기쿠치 겐조菊池謙讓가 있었다. 그는 1893년 스물셋의 나이에 한국에 첫발을 디딘 후, 을미사변, 청일전쟁 등 일본이 일으킨 주요 사건에 개입했다. 특히 청일전쟁에서 종군기자로서 한국 내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해,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귀국선을 타고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한국에서 자그마치 52년간 언론인이자 재야 사학자로 활동한 대표적 ‘조선통’이었다.
낭인으로서 을미사변에 가담한 기쿠치는 히로시마 형무소에서 석방된 후 일본이 한국에서 운영한 《한성신보》 기자로서 언론계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을미사변 전후로 맺은 다양한 인맥을 바탕으로 《한성신보》를 비롯한 여러 언론사를 직접 경영하거나 설립해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국사 관련 책들을 많이 펴내는 등 재야 역사학자로서도 많은 활동을 했다. 첫 시작은 을미사변을 합리화하고, 책임을 흥선대원군에게 돌리기 위해 히로시마 형무소 수감 중에 쓴 《조선왕국朝鮮王國》(1896)이다.
이어 이토 히로부미의 명을 받아 펴낸 《조선최근외교사 대원군전 부 왕비의 일생朝鮮最近外交史 大院君傳 附 王妃の 一生》(1910)는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을 목전에 두고 ‘조선망국론’ 입장에서 대원군과 고종, 명성황후의 정치적 무능력과 부패상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기쿠치는 이후로도 《조선잡기朝鮮雜記》 1·2(1931), 《근대조선이면사近代朝鮮裏面史》(1936), 《근대조선사近代朝鮮史》 상·하(1937·1939) 등을 통해 한국사 왜곡과 유린에 앞장섰다.
기쿠치의 글은 아주 쉽고 통속적인 경향으로 대중 전파력이 강했다. 게다가 그는 을미사변 현장에 있었고, 대원군과 지속적으로 친분 관계를 갖고 접촉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가 갖고 있던 역사의 현장성으로 인해 그의 글은 의심 없이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졌고, 이는 한국 근대사가 벗어나기 힘든 심각한 왜곡과 굴절의 굴레였을 뿐 아니라, 이후 식민 통치 내내 자리하게 될 일본 식민사학의 출발점이었다. 칼로는 왕비를 죽이고, 펜으로는 한국사를 유린한 셈이다.
120년 전, 그리고 지금
한편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기쿠치가 어떻게 명성황후를 칼과 글로 두 번씩이나 치욕스러운 죽음으로 몰아넣었는지, 아직까지도 우리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한말의 어지러운 정치상과 인물 들에 대한 혼란스러운 선입견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했다.
또한 저자는 기쿠치와 같은 일본 보수 우익의 침략 논리가 조금도 다르지 않게 현재에도 재현되는 일본의 역사 인식과 팽창의 움직임을 비롯해, 100여 년 전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힘겹게 줄타기 외교를 거듭하던 상황과 오늘날이 매우 유사하며, 식민사관이 아직도 일본의 기본 역사관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므로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와 우리를 둘러싼 주변 강대국과의 관계 그리고 일본 우익의 잘못된 역사관에 대응할 논리적 대응과 국제적 공감대 형성과 공조 등 우리에게 제시된 어려운 과제들을 차근차근 그리고 냉철하고 체계적이며, 합리적으로 접근해 풀어내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일제강점기 거물 언론인이자 재야 역사학자인 기쿠치 겐조의 활동을 통해 뼈아픈 역사를 돌아보는 일이, 현재 우리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다가올 미래를 대처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미디어 서평>
ㆍ기쿠치 겐조, 한국사를 유린하다
ㆍ하지연 지음 |서해문집 | 304쪽 | 1만5000원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10월8일 새벽, 기쿠치 겐조(1870~1953)는 흥선대원군이 탄 가마를 호위하며 일본 낭인 수십명과 함께 경복궁으로 들이닥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쿠치 일행은 명성황후를 찾아내 살해했다. 이른바 을미사변이다.
기쿠치는 일본 구마모토 출신 낭인이다. 낭인이란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사쓰마번·조슈번 출신이 아닌, 그래서 관료가 되지 못한 무사를 일컫는다. 일본 무사계층은 조선시대 사대부에 준한다. 이들은 막부체제를 떠받친 식자층이었다. 1만엔짜리 지폐 속 인물 후쿠자와 유키치도 무사 출신이었는데, 기쿠치 또한 상급 학교를 나온 지식인이었다.
출세의 길이 좁았던 낭인들은 일본 밖으로 진출했다. 일본 정부는 해외로 나간 낭인들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인접 국가의 국정을 농단했다. 낭인은 일제의 식민지 개척 척후병이었던 셈이다.
기쿠치도 같은 임무를 띠고 조선 땅을 밟았다. 그리고 을미사변에 가담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을미사변에 관여한 죄로 잠깐 동안 히로시마 감옥에 갇혀 지냈는데, 이때 <조선왕국>이라는 역사서를 썼다. 이 책에는 을미사변에 대한 변호를 비롯해 식민사관의 기초가 되는 기자조선설, 임나일본부설이 등장한다. 또한 조선은 한 번도 독립한 적이 없으며, 3000년 전부터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적었다. 저자 하지연씨는 <조선왕국>을 식민사관의 전형이라고 평가한다. 기쿠치는 또 흥선대원군 인터뷰를 바탕으로 <대원군전>을 펴내기도 했는데, 조선 근대사를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권력투쟁사로 그려내고 있다. 우리가 구한말 하면 반사적으로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암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기쿠치 영향이 크다. 그는 고종을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틈바구니에서 우왕좌왕한 나약한 군주로 평가한다. 대원군은 며느리를 죽인 냉혈한으로 “티끌만큼도 영웅과 위인으로서 존경받을 만한 고상한 성정을 찾을 수 없는” 인물로 묘사한다. 이런 인물평은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하씨는 이를 식민사관의 허다한 잔재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기쿠치는 해방 후 일본으로 되돌아가기 전까지 한반도에 머물며 언론인·역사 저술가로 활동했다. <조선잡기> <근대조선이면사> <근대조선사> 등 그가 쓴 역사서는 조선인을 외세 의존적이고 파당적이며 미개한 백성으로 규정하는 멸시사관을 바탕에 깔고 있다.
기쿠치는 관변 사학자였다. 일본 정부가 그의 저술활동을 지원했다. 따라서 집필의 초점은 식민지 침략 정당성 설파에 있어야 했다. 또한 친일파 조선 관료는 그를 고종실록·순종실록 편찬위원 자리에 앉히기도 했다.
기쿠치의 사례는 역사 집필 사업을 정부와 관이 주도할 때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준다. 역설적이게도 <조선왕국>은 큰 인기를 얻었다. 쉽게 쓰인 까닭에 조선인 대중의 호응이 컸던 것이다. 이 무렵은 조선인에게 민족이니, 국민이니 하는 개념이 한참 낯설 때다. 조선인은 그로부터 10~30년을 기다린 후에야 박은식, 신채호의 역사서를 만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왕국>을 비롯한 일제의 역사서가 한반도 역사 논의를 선점해버렸다. 식민사관은 한일합병보다 먼저 도착했고, 제국 군대보다 먼저 조선인 의식 속에 진격했던 것이다. 기쿠치 겐조는 그 선두에 섰던 일본 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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