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학과 한국 근대사’는 이 같은 일본의 논리가 조작된 것이라는 걸 보여주면서 조작 당사자들의 얼굴을 처음으로 드러내 보인다. 1876년 조선을 강제 개항한 일본은 관료와 학자, 언론인 등을 파견해 조선에 대한 조사와 연구, 언론 및 문필 활동을 펼치게 한다.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였음은 당연하다. 이 책은 여기에 참여했던 대표적인 일본 지식인 4명을 집중 분석한다.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식민사학의 뿌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작업이다.
기쿠치 겐조(1870∼1953)는 1893년 23세 나이에 한국에 처음 발을 디딘 후 1945년 일본으로 돌아가기까지 무려 52년 동안 한국에서 활동한 언론인이자 재야 사학자였다. 동학군 토벌, 을미사변, 청일전쟁 등 일본이 벌인 한국 근대사의 주요한 사건들에 거의 다 개입했으며, 대원군과도 교류했을 정도로 발이 넓었다. 또 한성신보 사장을 지내는 등 조선 내 일본 언론의 리더이자 왕성한 조선사 집필가이기도 했다. 생애 대부분을 한국에서 보내면서 한국사 왜곡에 전념했던 기쿠치라는 존재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조명되는 것이다.
기쿠치가 1896년 쓴 ‘조선왕국’은 식민사학의 원류가 된 책으로 1901년 출간된 ‘조선개화사’ ‘한반도’와 함께 ‘침략 3서’라고 불린다. 그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명을 받아 ‘대원군전’을 쓰기도 했다. 이 책은 한국 망국론의 관점에서 한국 근대사의 주역인 대원군, 고종, 명성황후의 정치적 무능력과 부패의 모습에 초점을 두어 의도적으로 저술한 것이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기쿠치는 한국 근대의 역사를 ‘대원군과 명성황후’ 양자 대결 구도와 고종은 그 틈바구니에서 우왕좌왕하는 나약한 군주라는 틀에서 망국의 필연성을 강조하였다”며 “기쿠치의 ‘대원군전’에서 만들어진 고종, 명성황후, 대원군의 뒤틀어지고 왜곡된 인물상과 망국적 한말의 정치상은 오늘날까지도 완전하게 극복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경성제대 교수로 한국사를 강의하며 ‘조선은 워낙 문제가 많아 해결할 수 없다’거나 ‘조선이 일본 통치 아래 들어가는 것은 일본의 자기 보존의 조건’이라는 식의 주장을 일삼은 오다 쇼고(1871∼1953)에 대한 연구 역시 이번에 처음 이뤄졌다.
다보하시 기요시(1897∼1945)는 상대적으로 국내 학계에 이름이 알려져 있으나, 이 책은 ‘비교적 양심적인 학자’라는 그간의 평가를 뒤집는다. 특히 ‘일본에 의한 조선의 근대화’라는 논리는 다보하시의 저술에서 강력히 제기되었음을 밝힌다. 일본 ‘식민학의 비조’로 불리며 옛 5000엔권 지폐 속 인물이기도 했던 니토베 이나조(1862∼1933) 역시 조선에 대한 멸시와 노골적인 침략야욕을 드러냈다.
저자 하지연(45)씨는 서울 마포고등학교 역사 교사로 이화여대 이화사학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권의 근대사 관련 책을 출간했다. 올 가을에는 기쿠치 겐조만을 다룬 단행본을 출간할 예정이다. 하씨는 “기쿠치와 같은 재야 사학자들의 조잡하고 왜곡된 논리가 오다나 다보하시 등 경성제대 교수들을 거쳐 실증과 이론의 틀을 갖추면서 식민사학이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국민일보 -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